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후, 수많은 학살의 드라마가 있었다. 굳이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도 지구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목적과 동기가 무엇이었든 학살은 지극히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짓이다. 그것은 또 다른 증오를 낳고, 그리고 그 증오가 또 다른 학살을 불러온다.
이런 학살의 드라마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 누구나 주저 없이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꼽을 것이다. 나치가 붕괴하고 히틀러가 세상을 떠난 지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이 전대미문의 드라마는 아직도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그 악몽을 재현해내고 있다. 어쩌면 지나치게 많이 재현된 감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솔직히 ‘또 그 얘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유태인 학살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다는 그 발상의 전환이 놀라웠다. 영화의 주연과 감독을 맡았던 로베르토 베니니는 이 영화를 통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주인공을 희화화시킴으로써 ‘웃음 속의 눈물’이라는 기존의 사실주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귀도는 모든 일을 유머러스하게 풀어가는 매우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어린 아이 같이 천진난만한 웃음과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그는 바로 그 순수함으로 상류사회 처녀인 도라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곧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조수아라는 귀여운 아들까지 얻는다. 하지만 이들 가족 앞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장벽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다. 귀도는 아들 조수아가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매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심지어는 아들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면서도 자기들은 재미있는 게임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얘기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을 극심한 공포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해 그는 지극한 부정(父情)으로 눈앞에 닥친 현실을 처절하게 헤쳐 나간다. 행여 아들이 눈치 챌세라 모든 것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용소로 끌려온 귀도와 도라에게도 여느 남녀와 마찬가지로 행복하고 달콤하게 떠올리고 싶은 젊은 날의 추억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얼굴도 볼 수 없고, 손도 잡을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도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귀도는 독일군 장교 파티의 시중을 들면서 한쪽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축음기에 음반을 건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Les contes d'Hoffmann> 중에 나오는 뱃노래(barcarolle) <아름다운 밤, 오! 사랑의 밤이여 Belle nuit, o nuit d'amour>이다.
도라에 대한 사랑으로 들떠 있을 무렵, 귀도는 오페라 극장에서 이 노래를 듣고 있는 도라의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었다. 그의 젊은 날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때 그는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열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가. 이 노래를 들으며 멀리 도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 밤은 정말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무대 중앙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곤돌라. 그리고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 하프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소프라노와 메조 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마치 꿈속의 멜로디처럼 달콤하고 감미롭게 극장 안을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 오! 사랑의 밤이여.
우리 기쁨을 향해 미소 지어라.
밤은 낮보다 달콤한 것.
오! 사랑스런 밤.
시간이 흐르면
서로를 애무하던 이 추억도
기억 저 너머로 흘러가겠지.
이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부드러운 산들바람이여!
애무하는 듯한 그대 숨결을 우리에게 보내 주오.
그리고 키스해 주오.
아! 아름다운 밤이여.
오! 사랑의 밤이여.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는 독일 작곡가 오펜바흐가 작곡한 것이다. 본래는 독일 태생이지만 오랫동안 파리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오페라는 주로 프랑스어로 썼는데, <호프만의 이야기>도 프랑스어 대본에 의한 것이다. 원작자는 술, 마약, 여자에 빠져 46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독일작가 호프만으로 여기에는 호프만이 사랑했던 스텔라, 올림피아, 안토니아, 줄리에타라는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이 오페라의 제3막의 무대배경은 이탈리아의 베니스이다. 물의 도시 베니스에는 곤돌라가 있다. 베니스와 곤돌라. 왠지 향락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 향락의 도시 베니스에서 호프만은 줄리에타라는 여자를 만난다. 줄리에타는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헤픈 여자’다. 하지만 호프만은 마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마법에 걸린 듯 이 향락의 화신에게 뛰어든다. 줄리에타는 이미 정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프만을 유혹하고, 사랑에 눈이 먼 호프만은 그로 인해 줄리에타의 정부인 쉴레밀을 죽인다. 그러나 무모한 살인 뒤에 돌아온 것은 철저한 배신 뿐. 달빛 흐르는 밤, 줄리에타는 다페르투토라는 남자의 팔에 기댄 채 곤돌라를 타고 그의 곁을 떠나간다.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노래는 이 막에서 줄리에타가 호프만의 친구인 니콜라우스와 함께 곤돌라를 타고 부르는 이중창이다. 대중적으로 <호프만의 뱃노래>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곡인데, 줄리에타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니콜라우스는 본래 남자지만 오페라에서는 대개 메조소프라노가 남장을 하고 이 역할을 맡는다. 결국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되는 셈이다. 잔잔한 물결이 뱃머리에 부딪치는 것을 묘사한 하프 반주가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 노래다.
이 노래에서 줄리에타와 니콜라우스는 낮보다 밤이 달콤한 곳, 달빛이 유난히 아름다운 베니스의 밤을 마음껏 즐기기를 권한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의 애무를 받으며, 오늘밤 사랑을 속삭일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낮이 되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오늘밤 서로를 애무하던 추억도 낮이 되면 머나먼 기억 속에 묻혀 버릴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호프만의 뱃노래>는 찰라적인 사랑, 순간적인 향락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뱃머리를 가르며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물살처럼 그렇게 오늘밤의 이 사랑도 결국은 머나먼 과거의 얘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인생과 사랑은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감미로운 멜로디에 실어 반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호프만이 줄리에타의 정부 쉴레밀을 살해한 후 줄리에타의 방으로 가자 호프만에게 칼을 빌려 주었던 다페르투토는 쉴레밀의 사망을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칼을 거두어들인다. 사랑에 눈이 먼 호프만은 결국 줄리에타와 다페르투토가 꾸민 음모의 희생자가 된 셈이다. 이렇게 호프만이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 후에도 멀리 무대 밖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람들이 부르는 <뱃노래>가 무심하게 들려온다.
오페라의 줄거리를 알고 이 노래를 들으면 그것이 그저 감미롭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그 달콤한 멜로디 속에 무언가 야릇하고 음습한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것이 감각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영화 속에 이 노래를 집어넣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하튼 영화의 후반부에서 <뱃노래>가 이와 비슷한 암시적 효과를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용소의 차가운 침대 누워 있던 도라는 멀리 남자 수용소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게 된다. 그리고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이 귀도가 자신에게 보내는 노래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서서히 창가로 다가가는 도라. 귀도가 보낸 뱃노래에 귀 기울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밤인가. 시간이 흐르면 이 고통스러운 시간도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지겠지.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만나게 되겠지. 뱃노래의 멜로디가 장벽을 넘어 내 귀에 들리듯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죽음의 장벽을 넘어 나에게 다가오겠지. 화면은 뱃노래의 멜로디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흘러간다. 푸른 빛 안개가 자욱한 수용소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이때 귀도도 잠든 아들을 안고 숙소로 돌아온다. 뱃노래의 멜로디처럼 달콤한 꿈을 꾸면서. 내일이면 이 모든 것이 꿈이 될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아들을 안고 숙소로 돌아가던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희멀건 시체 더미였다. 순간 노래가 멎는다. 뱃노래의 달콤한 추억은 결국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 비극적인 현실이 꿈이 아니라 방금 그가 들었던 뱃노래가 꿈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처럼.
며칠 후, 귀도는 수용소의 한 귀퉁이에서 사살된다. 총살을 당하러 가면서도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숨어서 그를 지켜보는 아들에게 윙크를 보낸다. 마치 재미있는 게임을 하러 가는 표정을 하고.
영화 속에 삽입된 <호프만의 뱃노래>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제목에 일조하는 음악적 반어법이다. 그 멜로디가 너무나 꿈같이 달콤하기 때문에 그 뒤에 섬뜩한 밤의 음모가 숨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귀도의 눈에 들어온 거대한 시체 더미. 이것이 바로 뱃노래 뒤에 숨어있는 밤의 음모가 아닐까.
* 음악 링크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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