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디어 헌터>를 다시 보았다. 오래 전에 보아서 기억에 가물가물한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본 것은 이라크전쟁을 일으킨 미국인들이 과연 베트남전은 어떤 시각으로 그렸는지 문득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은 미국이 먼저 도발하고, 한국군이 참전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베트남전쟁 때야 파월 장병들에게 위문편지만 보내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쟁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라크 전은 다르다. 이라크전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삶도 위협한다. 이라크 땅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대한민국에서도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테러를 걱정하며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9.11 사태에서도 보았듯이 테러를 자행하는 사람들은 도대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바로 이런 점이 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딜레마가 아닐까 싶다. 사실 '너 죽고, 나 살자'하고 덤비는 사람은 별로 무서울 것이 없다. 하지만 '너 죽고 나 죽자'하고 덤벼드는 사람은 도대체 피할 방법이 없는 법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 뛰어 들었으니 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전쟁은 전쟁일 뿐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지닌 전쟁이라도 전쟁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설사 전쟁에서 승리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전쟁터에서 처참하게 죽거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은 그 승리의 나라에 들지 못하는 것을.
그렇다면 영화 속의 전쟁은 어떨까? 어렸을 때 반공영화 비슷한 성격의 전쟁영화를 꽤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는 으레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가 나오게 마련이다. 물론 처음에는 나쁜 나라가 이긴다.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 인물들이 하나 둘 씩 총탄에 쓰러지는 것이다. 총알을 맞고 쓰러진 군인들은 주인공의 팔에 안겨 '내 원수를 갚아주오'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아! 이런 전우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우리의 주인공. 갑자기 벌떡 일어나 짐승 같은 목소리로 '야, 이 XXX들아'라고 외친 다음 적을 향해 미친 듯이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하나 둘 씩 쓰러지는 적군들. 그야 말로 일당백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의 혁혁한 공으로 이때부터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적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하나 둘 씩 쓰러지는 가운데 장엄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관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극장 안은 순식간에 눈물과 콧물을 동반한 감동의 도가니가 된다.
어린 시절, 나에게 전쟁영화는 나쁜 나라 사람들을 물리치는 좋은 나라의 영웅 이야기였다. 그때 본 전쟁영화의 대부분이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는 반공영화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우리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던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부당한 개입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심한 배반감을 느꼈다. 아마 내가 <디어 헌터>를 본 것은 그 이후였을 것이다. 지금은 오래 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영화를 보고 조금 실망했었던 것 같다. 영화 자체의 작품성은 있었지만 이미 <전환시대의 논리>로 단단히 무장을 끝낸 나에게 <디어 헌터>는 너무 '여린' 영화였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한 철광 마을.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의 제철소에서 일하는 닉, 마이클, 스티븐은 틈 날 때마다 친구들과 더불어 사슴 사냥을 즐기는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베트남 전에 함께 참전하기로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사슴 사냥을 떠난다.
드디어 산에 도착한 이들. 화면 가득 대자연의 장엄한 경치가 펼쳐지고, 이것을 배경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합창곡이 엄숙하게 울려 퍼진다. 화면은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갖고 있는 사슴과 그 사슴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마이클을 번갈아가며 비쳐준다. 험준한 산과 계곡을 가득 메우는 장엄한 합창소리. 세속의 그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성가의 울림이 이 장면에 제의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사슴사냥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라도 되는 것처럼.
사냥을 끝내고 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클럽을 찾는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이 중첩된 감정으로 약간 들떠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면서 술을 마신다. 그런데 바로 이때 클럽 한쪽에서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한 친구가 석별의 정을 담아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쇼팽의 <야상곡 G단조 Op.15 제3번>. 그 전까지 왁자지껄 떠들던 친구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숙연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다. 쇼팽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모두 알고 있으나 끝내 입 밖에 내서 말할 수 없는 암묵적인 진실을 가슴 깊이 감추어둔 채.
그 후 베트남 전에 참전한 닉과 마이클, 스티븐은 베트콩의 포로가 된다. 그리고 이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베트콩들이 러시안 룰렛 게임에 포로들을 끌어 들였던 것이다. 강제로 끌려온 포로들이 베트콩의 강요에 못 이겨 자기 머리에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스티븐은 공포과 경악의 비명 소리를 지른다.
이렇게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경험한 세 친구들. 이 중 닉은 탈영을 해서 생사를 모르는 상태가 되고, 스티븐은 다리를 다쳐 불구의 몸이 된다.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성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 마이클. 그러나 그는 자신을 환영하려고 모인 친구들 앞에 선뜻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저 먼 발치에서 오랫동안 남몰래 연모의 정을 품어온 닉의 애인 린다가 자기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는 친구들을 배웅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이 영화의 주제곡인 스탠리 마이어즈의 <카바티나>가 흐른다. 이 영화에 삽입되어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존 윌리암스가 연주한 후 클래식 기타의 명곡이 된 곡이다. 같은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She was beautiful>이라는 노래도 기타곡 만큼이나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 <카바티나>는 일종의 주제곡으로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앞에서 얘기한 쇼팽의 <야상곡>과 함께 듣는 사람을 로맨틱한 슬픔에 빠지게 한다. 영화 장면과 함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찌릿하고 애잔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음악의 힘으로 전쟁의 참혹함은 아련한 슬픔으로 바뀐다.
고향에 돌아온 마이클은 닉이 탈영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아 다시 베트남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러시안 룰렛을 하고 있는 닉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린 닉은 마이클을 알아보지 못한다. 닉은 마이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러시안 룰렛을 감행하고, 방아쇠를 당긴 총에서 나온 총알이 기어이 닉의 머리를 관통하고 만다.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닉은 러시아 정교회의 엄숙한 장례미사곡을 들으며 땅에 묻힌다. 닉의 장례를 끝내고 린다의 집에 모인 옛 친구들은 모두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누군가 <God bless America>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모두들 노래를 따라 부른다.
미국에 축복을/ 사랑하는 내 조국/ 보호하고 이끄소서
밤에는 천상의 빛으로/ 산에서 평원으로/ 대양의 흰 포말까지
미국에 축복을/ 정다운 나의 집
어빙 벌린이 작곡한 <God bless America>는 미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일종의 애국가요라고 할 수 있다. 독립기념일은 물론이고, 9.11 테러와 같은 국가적인 불운을 당했을 때마다 이 노래는 미국인의 결속을 다지고,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모두가 맥없이 우울한 표정을 하고 <God bless America>를 부른다. 하지만 사실 이 노래는 그렇게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아주 힘차게 애국심이 충만한 표정으로 불러야 한다. 생각해 보라. 만약 우리가 <아! 대한민국>을 이런 식으로 부른다면 어떻겠는가. 하지만 이들은 이 애국가요를 맥없이 부름으로써 자신들의 꿈이 결국 좌절되었다는 것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 아마 이들의 부모 혹은 조부모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멀리 러시아로부터 미국 땅에 들어온 이민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이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랑하는 조국 아메리카가 그들의 꿈을 실현시켜주지 못했던 것이다. 노래가 끝난 후 모두들 닉을 위해 축배를 드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영화가 끝난 후 주제곡인 <카바티나>의 로맨틱한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화면에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하나씩 나타난다. 화면 속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닉이 환하게 웃고 있다. 마이클은 익살스런 표정을 하고 있으며, 린다 역시 누군가에게 행복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전쟁이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기 전의 모습들, 이 환한 모습들을 배경으로 <카바티나>의 애잔한 선율이 흐른다. 바로 이 선율이 이들의 이야기를 아픔으로 추억하게 만든다. 이렇게 음악은 잔혹한 전쟁의 끝마저도 애잔한 로맨티시즘으로 바꾸어 놓는다. 내가 <디어 헌터>를 너무 여린 영화, 너무 로맨틱한 영화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어제 또 한 사람의 무고한 젊은이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렇듯 이 전쟁은 무모하고, 몰상식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 로맨티시즘의 시대는 갔다. 적어도 내 기억에 이라크 전의 참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한, 참수 직전 눈을 가린 채 울부짖던 그 젊은이의 영상이 남아 있는 한 이런 식의 전쟁영화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디어 헌터'를 보면서 훗날 미국 감독들이 이라크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든다면 어떻게 만들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도 여전히 낭만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깔면서 세상 떠난 친구를 애잔하게 추억하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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