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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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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5>

소외된 영혼을 깨우는 거리의 악사: 샬리 반 담의 '바이올린 플레이어'

나는 연주한다. 그러나 왜?
다른 무엇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나의 삶
나는 바이올린에 미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연주한다.
세속엔 가리고 싶은 추악한 단면이 너무나 많기에
그리고 나는 목소리가 아닌 음악으로 말하기에
나의 기억은 내게 속삭이듯 끊임없이 일깨우는 영감을 연주하라 한다.

어린 시절 들었던 뜨내기 바이올린 연주자가
버림받은 도회지의 지하철 통로에서 연주했던
그 멜로디를 연주하라 한다.

양지의 햇살 따스한 도시의 땅굴 밖 세계에선
모든 것이 현란하기만 하나
백열전구의 가녀린 눈꺼풀마저 내려앉는 이곳 지하 통로에선
누구나 가슴 속에 촛불을 켠다.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부활을 꿈꾸며...

앙드레 오데의 소설 <무지칸트> 중에서

예술과 유행의 도시 파리. 우리는 파리 하면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 세느강과 미라보 다리를 먼저 머리 속에 떠올린다. 그러나 이것만이 파리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처음에는 파리의 이런 겉모습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처음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금 차분한 마음으로 도시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런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어 있는 파리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내가 파리에서 처음 느낀 것은 이 도시가 제도권 예술은 물론이고 비제도권 예술까지 폭넓게 수용하는 포용성을 지닌 도시라는 점이었다. 파리에 가면 어디에서나 쉽게 거리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지하철역과 역 사이를 연결하는 지하통로에서, 세느강을 가로 질러 놓여있는 다리 위에서, 몽마르뜨르 언덕을 찾아 올라가는 길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파리의 세느강 위에는 나무로 만든 다리가 하나 있다. 돌로 만든 다른 다리와는 달리 이 다리 위로는 차가 지나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세느강 위의 유일한 해방구인 셈인데, 공간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서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바로 이 다리 위로 온갖 종류의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다리의 이름도 '예술의 다리'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딴따라의 다리, 떨거지의 다리가 되는 셈이다.

이 다리가 딴따라들의 지상(地上) 무대라면, 파리의 지하도와 하수도는 이들의 지하(地下)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 세느강의 화려함과 낭만에 눈 먼 에뜨랑제들은 모르리라. 그 화려한 거리 바로 밑 지하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샬리 반 담 감독의 <바이올린 플레이어>는 우리에게 바로 이런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제도권에서 밀려나 지하세계로 스며든 한 사람의 예술가와, 그의 음악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우는 소외된 사람들의 얘기이다. 앞에서 소개한 앙드레 오데의 소설 <무지칸트>가 이 영화의 원작이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르몽은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짐짓 고상함을 가장하고 음악을 즐기는 척 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값비싼 옷에 천박한 교양을 장신구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단 한 곡도 연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사사건건 동료 음악인들과 충돌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위선으로 가득 찬 이른바 '제도권'을 떠나 '비제도권' 예술가들의 무대인 파리의 지하도로 스며든다. 파리의 지하도는 이름 없는 예술가들의 해방구와 같은 곳이다. 서로 피부색도 다르고, 즐기는 음악도 다르지만 이곳 지하세계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어느 날 아르몽은 한 늙은 첼로 주자와 함께 지하세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화려하고 질펀한 음악의 향연을 벌인다. 두 사람은 본래 바이올린 혼자 연주하도록 되어 있는 바흐의 <샤콘느>를 함께 연주하면서 음악적 영감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연주를 듣고 지하세계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든다. 그리고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 향연에 합세한다. 음악에 맞추어 아코디언을 치는 사람, 이름 모를 민속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들고 있던 유리병을 타악기 삼아 두드리는 사람,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사람 등 출신배경과 피부색은 다르지만 모두가 '각기 독립적인 소리의 조화로운 결합'이라는 바로크적 이상으로 한데 뭉쳐 질펀한 향연을 벌인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바흐의 음악을 매개로 한 폴리포니적인 상황 연출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가 지니고 있는 다면적인 얼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렇게 거리의 악사로 변신해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던 아르몽에게 어느 날 불행이 닥친다. 거리의 불량배들이 그의 바이올린을 부수어 버린 것이다. 새 바이올린을 장만할 돈이 없었던 아르몽은 자신의 연주를 담은 테이프를 틀어 놓고 연주하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때 아르몽의 친구가 나타나 그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준다. 오랜만에 바이올린을 잡은 아르몽. 내친 김에 몇 소절 연주해 보지만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곧 연주를 멈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죽음을 눈앞에 둔 할아버지가 제발 음악을 들려달라고 애원한다.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다. 할아버지의 간청에 감동을 받은 아르몽은 드디어 바이올린을 들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영혼의 연주를 시작한다. 어두침침한 지하도에서 그가 연주한 곡은 바로 바흐의 <샤콘느>.

지하통로를 타고 길게 울려퍼지는 영혼의 바이올린 소리. 풍부한 잔향을 가진 <샤콘느> 소리는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아련하게 지하세계 사람들의 영혼을 깨운다. 이때 화면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아르몽의 모습과, 그의 연주를 들으며 하나 둘 씩 영혼의 잠을 깨는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비추어준다. 어떤 사람은 그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음악을 들으며 이들 지하세계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은 채 마지막 남은 빵을 건넨다. 소외된 사람들이 벌이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그 위를 흐르는 <샤콘느>의 영감어린 선율. 음악이 흐르는 동안 처음에 음악을 들려달라고 간청하던 그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남루한 옷자락을 잡은 채 서서히 숨을 거둔다.

<바이올린 플레이어>는 흥미위주의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15분간을 모두 바흐의 <샤콘느>에 할애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15분 동안 영화는 진지한 표정으로 음악을 경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씩 영상으로 잡아내고 있는데, 이렇게 스토리의 전개 없이 오로지 음악과 영상에만 15분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줄거리의 재미보다는 영상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비롯된 삶의 깊은 의미,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추구하는 프랑스 영화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에서 실제 바이올린을 연주한 사람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라고 한다.

<샤콘느>는 바흐가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2번> 중에 나오는 곡이다. 바흐는 생전에 모두 여섯 편의 무반주 바이올린 곡을 작곡했다. 그 중에 1, 3, 5번에는 소나타라는 이름이, 그리고 2, 4, 6번에는 파르티타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하나의 번호에 대여섯개의 곡을 모아 놓은 모음곡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샤콘느>는 <파르티타 제2번>의 제5곡에 해당되는데,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곡 중에서 가장 유명해서 파르티타 2번을 얘기할 때 '<샤콘느>가 들어있는 바로 그 파르티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반주곡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반주가 없는 곡을 말한다. 여기서 반주란 피아노 반주를 말하는데, 클래식 음악에서는 피아노를 제외한 독주악기를 반주 없이 혼자 연주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런 예외적인 상황 때문에 여기에 특별히 '무반주'라는 말이 따라붙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독주악기가 피아노 반주 없이 혼자 연주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바이올린 혼자서 연주하다 보면 기량의 한계는 물론 연주자의 미세한 실수까지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웬만한 기량을 갖추지 않고서는 연주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게다라 바흐의 곡은 바이올린 한 대로 두 개의 성부가 각각 독립적으로 들리도록 연주해야 하는 데다가 단순함 속에 음악적 깊이를 담아내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연륜이 짧은 젊은 연주자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주문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일생의 화두로 삼고 있다. 젊은 날의 열정과 화려한 기교, 관객의 환호와 갈채, 그로부터 얻는 삶의 희열, 그러다 그 뒤에 숙명처럼 따라오는 좌절과 고통, 그리고 극복..... 연주자로서 그리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삶의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얼굴'이 되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곡이 바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곡이다.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의 꽃 <샤콘느>. 이것은 하나의 독백이다. 열정과 관조, 화려함과 단조로움, 음지와 양지, 지하와 지상.....이 두 개의 상반된 세계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런 독백. 젊은 날의 열정을 상기시키듯 격정적으로 포효하다가 어느새 조용히 잦아들고, 투명하게 속삭이는 듯 하다 다시 격렬하게 토로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아르몽은 하수(下水) 위를 떠가는 작은 배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하수로 천장을 어른어른 비추는 푸른빛과 그것을 배경으로 광명의 세계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작은 배. 아르몽의 바이올린은 지하의 영혼을 구원하고, 자신을 버렸던 지상의 세계로 또 다시 나아가기를 시도한다.

드디어 화면에 눈부신 지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어두컴컴한 지하세계와는 대조를 이루는 찬란한 세계, 초록의 숲과 나무, 영롱하고 푸른 물빛. 이 영상을 배경으로 흐르는 <샤콘느> 소리와 함께 아르몽의 영혼도 승천한다. 또 다른 영혼의 구원을 꿈꾸며 지하에서 지상으로, 그리고 다시 지상에서 영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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