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한창 상영되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주인공인 스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연주한 곡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때까지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어디선가 쇼팽의 <발라드>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네 개의 발라드 중에서 몇 번을 쳤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이 아닐까요?’라고 대답했었다.
그 후 이리저리 일이 바빠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놓치고 뒤늦게 비디오를 통해서 <피아니스트>를 보게 되었다. 짐작했던 대로 스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연주한 음악은 바로 쇼팽의 <발라드 제1번>이었다.
독일군의 눈을 피해 오랫동안 빈 집의 다락방에 숨어 있던 스필만은 어느 날 배고픔을 참지 못해 먹을 것을 찾으러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아낸 통조림 깡통을 따다가 실수로 그것을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바닥에 구르며 아까운 내용물을 쏟아내고 있는 통조림 깡통을 따라가는 카메라. 그런데 이렇게 깡통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던 카메라에 갑자기 독일군 군화(軍靴)가 잡힌다. 군화를 잡은 카메라는 밑에서 위로 서서히 앵글을 이동시킨다. 발에서 다리, 그리고 허벅지에서 가슴을 거친 카메라는 드디어 화면 가득 독일군 장교의 얼굴을 잡는다. 수려한 용모의 독일군 장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 순간 숨 멎을 듯한 공포가 온 몸을 엄습해 온다. 영화를 보는 내가 이 정도였으니 실제로 일을 당한 스필만은 어땠을까.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독일군 장교가 먼저 물었다.
“깡통을 따고 있습니다.”
그러자 장교가 다시 묻는다.
“직업이 뭔가?”
스필만은 독일어로 ‘Ich bin....’ 즉, ‘피아니스트입니다’라고 대답하려다 곧 말을 바꾸어 ‘Ich war Pianist' 즉, ‘피아니스트였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즉, 지금은 피아니스트가 아니고 과거에 피아니스트였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독일군 장교는 그를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안내한다. 그리고는 한 곡 쳐 볼 것을 권한다.
"나는 쇼팽의 <야상곡 C#단조>를 쳤다. 제대로 조율도 안 된 피아노 줄의 탁한 울림이 텅 빈 집과 계단을 지나 길 건너편에 있는 빌라의 폐허에 부딪쳐 맥 빠지고 우울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연주를 끝내자 그 침묵은 전보다 한층 더 음울하고 괴괴했다. 거리 어딘가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밖에서 총성과 함께 사납게 짖어대는 독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필만의 자서전에서)
몸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그는 피아노를 쳐야만 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전혀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었다. 먼지에 쌓인 조율 안 된 피아노와 배고픔과 추위에 굳어버린 손가락,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포 속에서 달콤하고 로맨틱해야 할 쇼팽의 <야상곡>이 맥 빠지고 우울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위에는 말쑥한 독일군 장교의 외투와 모자가,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그가 그 긴장된 상황에서도 목숨처럼 부둥켜안고 있었던 초라한 통조림 깡통이 마치 이미지의 콘트라스트를 강조한 정물화처럼 놓여 있다.
이때 스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쳤던 곡은 쇼팽의 <야상곡 C#단조>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발라드 1번>을 치는 것으로 나온다. 오랫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는 사람이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스필만은 거의 2년 반 동안 한 번도 피아노를 만져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 난방이 안 된 방에서 지낸 탓에 손가락이 동상 일보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손톱도 깎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피아노를 제대로 친다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발라드 1번>같이 엄청난 에너지와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스필만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연주하기 쉽고 멜로디가 무난한 <야상곡 C#단조>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영화에서 이런 상황에 야상곡을 연주했다면 얼마나 싱거웠을까. 이렇게 극적인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순간,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이 <야상곡 C#단조>를 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극적인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쇼팽의 곡은 무엇일까. 서정적이고 달콤한 <야상곡>이나 <전주곡>? 아니면 우아하고 발랄한 <왈츠>나 <스케르쪼>? 유감스럽게도 쇼팽이 작곡한 곡 중에는 이런 상황에 어울릴만한 곡이 별로 없다. 일생 동안 피아노라는 악기에만 집중했던 쇼팽은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여성성’을 드러낸 작곡가다. 그의 음악은 지극히 여성적이고, 로맨틱하고, 우아하고, 섬세하고, 경쾌하고, 발랄하다. 힘차게 건반을 두드리는 작품에서조차 그는 뼈 속 깊이 남성적이지는 못했다. 여성들에 둘러싸여 보냈던 유년 시절과 남자친구에게 열렬한 구애의 편지를 보냈던 청년 시절의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유난히 하얀 피부에 여윈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기억 속에 들어있는 쇼팽은 지극히 섬세한 감성을 지닌 여성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나중에 당대 최고의 여류문인 조르쥐 상드의 연인이 되긴 했지만 아마 둘 사이의 관계에서도 쇼팽은 정서적으로 여성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발라드 1번> 속의 쇼팽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쇼팽의 나이 스물여섯 살 때 작곡했다고 하는 이 곡에는 열혈청년 쇼팽의 내면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남성적인 열정과 고뇌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나는 그의 작품 중에서 이처럼 독창적이고 거칠게, 이처럼 격렬하게 남성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는 작품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유태인과 독일군 장교가 서로 맞닥뜨리는 극적인 장면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도록 한 것은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현실과 영화는 다르다.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현실보다 더 그럴듯하게 현실적이어야 한다. 화면 속의 현실은 본래는 현실이 아니기에 그것을 진짜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보다 극적인 장치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은 바로 이 장면의 영화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 말고도 이 영화에 쇼팽의 <발라드>가 들어가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곡에 결집되어 있는 폴란드인의 애국심이다. 이 곡은 쇼팽이 폴란드의 애국시인 미츠키에비치가 쓴 서사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쇼팽은 스무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조국을 떠나 그 후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이런 그에게 미츠키에비치의 시는 조국 폴란드와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정서적 끈이었다. 아마 쇼팽은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가 지니고 있는 충만한 민족성과 애국심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유태계 폴란드 영화감독인 로만 폴란스키는, 유태계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수난을 다룬 영화에, 폴란드 애국시인의 서사시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폴란드 작곡가의 음악을 사용했다. 참으로 절묘한 조합이 아닌가. 극적인 효과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상징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쇼팽의 <발라드> 1번은 이 영화의 필연이었다.
이 곡은 오른손과 왼손이 같은 음을 연주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느린 도입부로 시작한다. 이렇게 특징적인 도입부가 끝나고 나면 아주 독특한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모티브가 연주된다. 처음에 조용하게 시작된 이 모티브는 그 후 형태를 달리하면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표현의 강도가 높아진다. 처음에 피아노는 아주 여리게, 지극히 서정적인 울림으로 무엇인가를 갈구한다. 그 멜로디는 감성의 끝을 어루만지듯 섬세하고, 때로는 지극히 감미롭기까지 하다. 이 시적인 울림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점점 갈증의 강도가 높아져 간다. 스필만은 갈구한다. 자유와 평화를. 이 비극적인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과 영원한 해방을. 점점 더 격렬하게 원한다. 그러나 그의 애타는 바람은 번번이 절정의 문턱에서 좌절당하고 만다. 이렇게 애타게 문을 두드리기를 여러 차례. 어느 순간 드디어 그토록 열망하던 해방의 순간이 찾아온다. 격렬한 열망의 에너지가 마침내 봇물처럼 터져 나와 건반 위에서 포효한다.
쇼팽의 <발라드 1번>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곡 중의 하나이다. 사춘기 때부터 지금까지 참 줄기차게 이 곡을 들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도 평소에 이 곡을 들으면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에서는 곡의 중간 부분이 생략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무려 15분에 이르는 바흐의 <샤콘느> 전곡을 내보냈던 프랑스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처럼 이 극적인 장면에서 <발라드 1번>의 전곡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전쟁이 끝난 후 스필만은 한 친구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독일군 장교의 소식을 듣게 된다. 소련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스필만의 이름을 대며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스필만은 그 독일군 장교를 돕는 데 실패한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가 소련의 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으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그를 구해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로 인해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처럼 ‘착한 독일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그 독일군 장교의 이름은 빌헬름 호젠펠트였다. 스필만의 자서전에 실려 있는 사진을 보니 영화 속의 독일군 장교 만큼이나 수려한 용모를 가진 미남이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끝내 미소를 보내지 않았다. 빌헬름 호젠펠트는 그로부터 몇 년 후, 소련의 한 포로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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