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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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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9>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의 힘: 첸카이거의 <투게더>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잘 우는 편이다. 꼭 잘 된 영화만 보고 우는 것은 아니다. 내가 우는 것은 그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와는 별 상관이 없다. 영화 속에 조금이라도 신파적인 장면이 있으면 그대로 울어버린다. 몇 년 전인가. 내용이 아주 진부한 미국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도 펑펑 울었다. 주인공이 아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뭐 이렇게 시시한 영화가 다 있어’ 이렇게 욕하면서 울었다. 아마도 나의 뇌 속에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부위와 예술적 판단을 관장하는 부위가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해 있는 모양이다.

첸카이거 감독의 <투게더>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신파영화다. 가난한 시골 요리사 리우 청에게는 샤오천이라는 아들이 있다. 세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해 각종 대회의 상을 휩쓸면서 인근에서 바이올린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사람들이 ‘리우 청’하면 누군지 몰라도 ‘샤오천의 아버지’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그에게 아들 샤오천은 삶의 희망이자 빛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자 자부심이다.

이들 부자가 어느 날 청운의 꿈을 안고 북경으로 올라온다. 하지만 샤오천은 북경에서 열린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겨우 5등을 차지하는 데 그친다. 그러자 리우 청은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인 지앙 교수를 찾아가 아들을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리우 청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샤오천을 제자로 받아들인 지앙 교수는 현실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인 사람이다.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릇된 현실을 고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현실을 애써 외면한 채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추억과 음악에 대한 열정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는 비가 오면 바닥에 온통 물웅덩이가 고이는 골목길 옆의 허름한 집에서 길에서 주워온 고양이 몇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예술에 대한 이상은 높고 크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비천하고 남루하다. 그 생활의 남루함은 그가 연탄을 쌓는 사소한 문제로 무식한 옆집 아낙네와 악다구니로 언성을 높이는 장면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이때 그가 벌이는 원색적인 말다툼은 현실에 대한 무력감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평소에 그가 보여주는 냉소적인 태도 역시 이런 무력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책인지도 모른다. 그는 처음에 샤오천에 대해서도 지극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샤오천과 인간적으로 친하게 되고, 그러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정한 의미의 사제지간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정작 샤오천을 지앙 교수에게 맡겼던 리우 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달라진다. 아들의 출세를 갈망하는 아버지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지앙 교수가 아들의 장래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선생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지앙 교수를 찾아간 리우 청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들에게 미래가 있나요?”
“그야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바라는 것이 부와 명예요? 아니면 훌륭한 음악가요?”

그러자 리우 청이 주저 없이 대답한다.

“그야 물론 부와 명예지요”
“아. 그건 보장 못해요.”

이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끝났다. 리우 청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아들을 단지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아들의 성공이었다. 아들에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가져다주는 그런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 말이다. 가난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가난하지만 훌륭한 음악가’는 전혀 매력적인 구호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가난과 무명의 서러움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내세우는 정신적 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우 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훌륭한 음악가’ 운운하며 아무 것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지앙 교수를 떠나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 사람에게 가는 것이다. 이때 리우 청이 택한 현실적 대안이 바로 음악계의 실세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 교수였다.

샤오천이 지앙 교수에게 마지막 레슨을 받던 날. 지앙 교수는 평소와는 달리 아주 깔끔한 차림으로 샤오천을 맞는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리스트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때 지앙 교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샤오천이 연주하는 곡은 리스트의 <위로 Consolation 제3번>라는 곡이다. 본래는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지금은 바이올린으로도 많이 연주되고 있는 리스트의 명곡이다.

샤오천이 지앙 교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리스트의 음악을 연주하는 이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리스트의 음악은 진정한 음악을 상징한다. 진정한 음악이란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음악을 의미한다. 어지러운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음악,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해주는 음악, 세속의 욕망을 잊게 해주는 음악, 그럼으로써 삶과 영혼에 건강한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음악. 아마 그런 음악일 것이다.

본래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의 달인으로 알려진 작곡가다. 대표작인 <초절기교 연습곡>을 비롯해 그는 피아니스트에게 초인적인 기교를 요구하는 곡을 많이 작곡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위로>는 이런 작곡가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약간 비껴나 있다. 애써 기교를 부리지 않은 편안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듣는 이의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안겨준다. <위로>라는 제목처럼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지앙 교수와 샤오천은 모두 냉혹한 현실의 칼날에 베이고 찢긴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두 사람이 그동안 음악을 통해 진정한 영혼의 교감을 나누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쳐 서로에게 작별을 고해야만 한다. 샤오천에게 이것은 지앙 교수와의 결별인 동시에 진정한 음악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 결별의 의식에서 두 사람은 리스트의 <위로>를 함께 연주한다. 그 편안한 멜로디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려는 듯이.

한편 두 사람이 이렇게 아쉬운 작별의 의식을 치르고 있는 동안 리우 청은 소위 음악계의 실세인 유 교수를 찾아간다. 뜻하지 않은 그의 방문에 당황해 하고 있는 유 교수 부부에게 리우 청은 그 동안 숨겨왔던 샤오천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샤오천이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 역에 바이올린과 함께 버려진 아이였다는 것, 그것 때문에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아이가 커서 이 사실을 알고도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든 아이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리우 청 같이 돈 없고 배경 없는 시골뜨기가 유 교수와 같은 권력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리우 청의 눈물겨운 호소는 효과가 있었다. 유 교수 부부는 샤오천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샤오천을 제자로 받아들인 유 교수는 앞으로 다가올 국제 콩쿠르에 대비하기 위해 샤오천을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한다. 샤오천은 유 교수의 도움으로 촌티를 벗고, 이런 아들에게서 리우 청은 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는 이제 아들을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쓸쓸하게 깨닫는다. 몰라보게 달라진 아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아들을 시켜 옷을 사 입으라고 돈을 준 유 교수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그는 아들이나 유 교수에게 이런 감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북경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진 리우 청은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샤오천이 콩쿠르에 출전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는 유 교수의 부탁으로 대회장에 가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콩쿠르가 열리는 바로 그날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북경역으로 향한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부터 첸카이거는 일반적인 신파의 공식을 무시한다. 초라한 아버지가 아들의 체면을 위해 대회장에 가지 않는 것까지는 보통의 신파와 비슷하다. 신파영화에서는 이럴 경우, 아들은 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다음 우승의 영광을 안고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과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관객의 눈물을 짜내야 한다.

하지만 첸카이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끝내 아버지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샤오천으로 하여금 콩쿠르에 나가지 않고 아버지를 만나러 북경역으로 달려가도록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신파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샤오천이 북경역에서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의 3악장이 시작되고, 이것을 배경으로 리우 청이 역에 버려진 샤오천을 안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담은 지극히 신파적인 회상 장면을 삽입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영화는 현실로 돌아온다. 인파를 헤치고 아버지 앞으로 달려온 샤오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의 피날레를 연주한다. 사실 이 부분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피날레 중에서도 결말로 몰아가는 에너지가 가장 강렬한 대목으로 알려져 있다.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소리와 격렬한 바이올린 소리가 서로 교차하면서 음악을 절정으로 몰아간다. 자신을 떠나려는 아버지 앞에서 그 동안 억눌려 있던 샤오천의 열정이 비로소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다. 그가 연주하는 격정적인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은 그 동안 아들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겪었던 쓸쓸한 소외감에 대한 화려하고도 찬란한 보상이다. 이로써 리우 청의 부성애는 드디어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샤오천의 얼굴에 어느덧 눈물이 흐르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눈물이 흐른다.

그렇다. 신파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퇴영적인 눈물만 자아내야 하는 법은 없다. 가난하고 초라한 아버지에게도 아들의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해할 권리가 충분히 있는 것처럼 신파도 충분히 장대하고 화려한 결말을 가질 수 있다. 평소에 가슴 벅찬 감동과 환희를 안겨주던 차이코프스키의 피날레가 이 영화에서는 나를 울게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신파의 힘이다. 샤오천이 연주하는 열정적인 피날레는 이렇게 위대한 신파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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