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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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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10>

긴 겨울의 끝에서 건져 올린 작은 희망: 류장하의 '꽃피는 봄이 오면'

절망과 희망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요즘처럼 절망과 희망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주변에는 온통 어두운 이야기뿐이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절망의 늪을 빠져 나갈 방법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많다. 춥고 긴 이 겨울은 과연 언제 끝이 날까? 서양의 시인 셸리는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건만 과연 그 봄이 정말 오기는 오는 것일까?

‘여긴 다른 데보다 겨울이 길어요.
그래도 봄은 오긴 오죠.’

류장하 감독의 <꽃피는 봄이 오면>은 이런 프롤로그로 시작을 한다. 다른 데보다 겨울이 춥고 긴 탄광촌에서 작지만 따스한 희망을 건져낸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대학에서 트럼펫을 전공한 현우는 음악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변변한 돈벌이도 갖지 못하고, 결국 사랑하는 여자와도 헤어지게 된다. 현실에 대한 불만을 냉소적으로 토로하며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탄광촌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관악부 지도교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본다. 그는 거의 도피하는 심정으로 그곳으로 내려간다.

유난히 춥고 긴 탄광촌의 겨울. 온통 어둡고 절망적인 이야기만 가득할 것 같은 이곳 탄광촌에서 현우는 의외로 따뜻한 사람들과 만난다. 그곳 중학교의 관악부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비로소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몸이 아픈 재일이 할머니의 병원비를 위해 평소의 소신을 꺾고 캬바레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반대로 관악부에 나오지 못하는 용석이를 위해 그의 아버지를 설득하러 가기도 한다. 도대체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나름대로 밝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자신도 가슴 속에 작은 희망을 키운다.

그러던 중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이 왔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시골 약사 수현의 말처럼 봄이 오기는 온 것이다. 벚꽃이 만개한 어느 화사한 봄날, 서울로 올라온 현우는 한적한 서민 아파트의 벤치에 앉아 헤어진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눈처럼 떨어지는 벚꽃잎을 맞으며 그는 긴 겨울의 끝에서 건져 올린 작은 소망을 여자에게 얘기한다.

<꽃피는 봄이 오면>에 나오는 탄광촌은 참으로 따스하고 아름답다. 풍경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여자 친구 앞에서 온갖 폼을 다 재며 섹소폰을 연주하는 용석이. 용석이는 장래에 ‘케니 지’같은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런 용석이가 연습에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현우는 용석이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탄광으로 간다. 막장에서 막 일을 끝내고 나온 용석이 아버지는 현우에게 젊었을 때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해, 그리고 그 후에 만났던 절망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나도 젊었을 때는 꿈이 있었노라고.

그로부터 며칠 후, 탄광을 찾은 아이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광부들 앞에서 연주를 한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이 연주하는 곡은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제1번> 중에 나오는 <희망과 영광의 나라>이다. 세익스피어의 <오델로>에 나오는 대사에서 제목을 따 왔다고 하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은 지금도 널리 연주되고 있는 아주 유명한 곡이다. 그 동안 내가 이 곡을 들어본 것만 해도 족히 백 번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처럼 독특한 느낌을 주는 연주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 가슴 벅찬 환희와 감동을 느낄 수 없는 어두운 연주는 행진곡이 아니라 마치 장송곡 같았다. 비를 철철 맞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아이들의 표정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광부들의 웃음에서 어떤 근원적인 어두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연주를 듣는 용석이 아버지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스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그가 나팔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나이브한 발상이 아닐까.

영국 런던에 있는 로열 앨버트 홀에서는 해마다 ‘프롬’이라는 여름 음악제가 열린다. 매해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세계 각국의 유명 연주자들이 참가하는 이 여름음악제는 언제나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시작을 한다. 체코의 ‘프라하의 봄 축제’가 언제나 스메타나의 <몰다우>로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제를 어떤 작곡가의 곡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가 곧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엘가는 바로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지만 본래부터 엘가가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 남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엘가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 무명 작곡가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비약적인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보다 9살이나 연상인 앨리스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고 난 후부터였다. 상류계급 출신이었던 아내 덕분에 엘가는 상류 사회로 진출할 수 있었고,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비천한 출신의 사람이 성공하면 으레 그런 것처럼 엘가 역시 자기가 하층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감추고 싶어 했다고 한다. 촌뜨기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언제나 신사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다녔으며, 시골뜨기 냄새가 나는 액센트도 고쳤다. 엘가가 이런 컴플렉스와 얼마나 악전고투했는지는 그가 자신의 작품에 ‘품위있게’라는 의미의 악상기호를 자주 사용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는 뼈 속 깊이 상류층이기를 열망했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고 에드워드 1세가 즉위하게 되자 엘가는 그의 대관식에서 연주할 찬가를 작곡했다. <위풍당당 행진곡>의 느린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희망과 영광의 나라>라는 가사를 붙인 다음 이것을 음악적으로 발전시킨 장엄한 대관식 찬가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 삽입된 <희망과 영광의 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영국 왕실을 빛내기 위해서, 더 나아가 대영제국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서 작곡한 것이다. 말하자면 엘가가 왕실과 조국에 바치는 일종의 충성가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영국 사람들은 이 곡을 애국가처럼 부른다. 대영제국의 영광이 이미 무너져버린 지금도 그 때의 영광을 반추하며, 또 언젠가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기대하며 감격에 차서 부른다.

그러나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 아이들이 연주하는 <희망과 영광의 나라>는 이런 거창한 희망과는 거리가 먼 듯 보였다. 그들이 연주하는 엘가는 위풍당당하지도 않았고, 밝고 힘차지도 않았다. 듣는 이에게 벅찬 희망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몇 년 전에 TV에서 도계중학교 관악부 아이들과 지도 교사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 내용이 하도 감동적이어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꽃피는 봄이 오면>을 보면서 이 이야기가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도계의 아이들은 음악 속에서 꿈을 찾고자 했다. 관악부 아이들 중 몇 명이 서울의 유명 예술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접하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대한민국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음악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TV를 보면서 앞으로 그 아이들이 겪게 될 크고 작은 좌절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 아이들은 과연 음악 속에서 진정한 희망을 찾았을까. 아니면 너무나 큰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고 말았을까. 영화 속에서 비를 맞으며 ‘위풍당당’하고는 거리가 멀게 엘가의 곡을 연주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장면이 암시하듯이 <꽃피는 봄이 오면>의 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화려한 봄이 아니다. 만개한 벚꽃처럼 눈부신 봄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에 삽입된 음악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음악이 들어간 영화의 경우, 줄거리와 상관없이 그냥 음악만으로 빈 가슴이 꽉 채워지는 것 같은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것이 음악의 힘일 것이다. 하지만 <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는 그런 장면이 없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장면은 있다. 황혼이 깔린 바닷가에서 재일이가 트럼펫을 부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정작 음악 자체에서는 그다지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그 동안 너무 일급 연주자의 연주만 들어왔기 때문일까. 연주가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가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비록 연기는 배우가 하지만 정작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의 연주는 숙련된 연주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계적인 바이올리스트 기돈 크레머를 기용했던 프랑스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처럼 대부분의 영화들이 영화 속에서 정상급 연주자의 연주를 들려준다. 그래야만 음악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꽃피는 봄이 오면>에 나오는 트럼펫 곡은 현우 역을 맡은 최민식이 직접 연주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른 영화들처럼 숙련된 연주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아마추어의 연주를 쓴 데에는 아마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 현우는 그저 평범한 트럼펫 연주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삶에서 화려한 반전을 기대하기는 어차피 힘들다. 뒤늦게 그의 실력을 알아본 서울의 일류 교향악단에서 그를 모셔간다거나 유명 음악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모셔간다는 식의 반전도 없다. 그가 긴 겨울을 보내고 찾아낸 희망 역시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벚꽃이 화사하게 핀 어느 봄날, 헤어진 여자에게 우회적인 방법으로 프러포즈할 용기를 내는 것, 고작 이 정도이다. 그리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의 앞날에도 그렇게 엄청나게 화려한 봄날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추어 연주가 최민식의 소박한 연주는 리얼리티를 갖는다.

유난히 춥고 긴 이 겨울에도 우리는 봄을 기다린다. 왜?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하니까. 여기서 현우와 탄광촌 아이들이 부는 나팔소리는 긴 겨울의 끝에서 건져낸 작은 희망과 같은 것이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꽃피는 봄이 올 것이라는 작지만 소중한 희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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