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때 아버지의 서가(書架)는 내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거기에는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은 물론이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 루소의 <에밀> 등 온갖 종류의 철학서와 사상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생경한 저자 이름과 책 제목들이 내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했다. 서가 앞에 서면 그때까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책의 대부분이 어린 내가 읽기에 너무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저 저자 이름과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 벅찬 지적 포만감을 느끼곤 했다.
그 책들 중에는 톨스토이의 작품이 있었다. <안나 까레리나> <부활> <전쟁과 평화> 이런 것들이었다. 그러던 중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에서 연극으로 공연된 <부활>을 보게 되었다. 카츄샤 역에 최은희, 네플류도프 공작 역에 남궁원이 출연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나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후 영화 <닥터 지바고>와 소설 <안나 까레리나>를 보았고, 그때부터 라라와 안나 그리고 카츄샤는 내 가슴 속에 비운의 트로이카가 되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부활>과 <닥터 지바고> <안나 까레리나>를 다시 읽었다. 책을 읽고나서 나는 주인공들에 대한 소녀 시절의 로맨틱한 환상이 엉뚱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작품 모두 단순한 남녀상열지사로 치부할 작품이 아니었다. 톨스토이와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속에는 당시 러시아가 처한 사회, 경제, 정치적인 현실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렇게 된 데에는 작품을 단지 남녀상열지사 쪽으로만 몰고 간 연극과 영화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소개하는 영화 <안나 까레리나>는 지난 1997년 버나드 로즈 감독이 만든 것으로 소피 마르소가 안나 역으로 나온다. 끝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안나 까레리나의 비극적인 운명을 처연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이 이 영화의 주제음악으로 쓰였다.
<비창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겨울의 나라 러시아가 느껴진다. 태양이 숨어버린 동토(凍土)의 춥고 어두운 겨울, 광대한 시베리아 벌판 위를 부는 바람 같은 거대하고 서늘한 슬픔이 생각난다. 태양빛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특유의 근원적인 우울, <비창교향곡>은 바로 이런 우울을 담고 있는 곡이다.
“지금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야. 곡을 쓰면서 이것이 내 작품 중에서 최상의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구나. 여행 중에 곡을 쓰면서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몰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1악장을 작곡하는데 겨우 나흘 밖에 걸리지 않았단다.”
차이코프스키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인데,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이 작품에 열정을 쏟았는지를 알 수 있다. <비창>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여섯 개의 교향곡 중 마지막 것이다.
이 영화에는 <비창> 외에도 제목이 ‘비(悲)’ 자로 시작되는 곡이 두 개 더 나온다. 라흐마니노프의 <Elegie(비가) 작품 3의 1번>과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Trio Elegie(피아노 삼중주 비가) 작품 36의 2번>이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에 ‘비’ 자로 시작되는 곡이 세 개 씩이나 들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어둡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이 영화의 정서적 배경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모스크바 역에서 우연히 브론스키 백작을 만나기 전까지 안나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미 결혼을 해서 여덟 살짜리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결혼이라는 인습에 갇혀 지내기에는 너무 젊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서히 권태에 빠져 들어가던 안나 앞에 어느 날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브론스키 백작이었다. 그가 잠자고 있던 안나의 욕망에 불을 붙였다.
안나의 가슴 속에 서서히 피어나는 사랑에의 감정과 그와 더불어 고조되는 갈등은 무도회에서 안나가 브론스키와 함께 추는 왈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장면에 나오는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 1막에 나오는 <왈츠>이다.
이 곡은 흔히 듣는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처럼 그렇게 달콤하고 평이한 곡이 아니다. 그 안에는 감정의 점진적인 고조 끝에 찾아오는 클라이맥스가 있고, 그것을 극적으로 맺어주는 화려한 대단원이 있다. 그 장면만 보고서도 안나의 가슴 속에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장면에서 음악이 발휘하는 극적인 효과는 압권이다. 마침내 음악이 힘찬 코다로 끝을 맺을 때, 다음과 같은 레빈의 독백이 이어진다.
“브론스키와의 만남은 어둠 같은 그녀의 인생에 한줄기 빛이었다.”
오빠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왔던 안나는 그 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 중간에 잠시 기차가 멈춘 사이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온 안나는 뜻밖에 브론스키 백작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황량한 겨울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러시아의 어느 기차역에서 위험한 사랑의 수렁에 빠져버린 두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휘날리는 눈보라를 맞으며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갈등하는 안나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그 유명한 <비창교향곡> 1악장의 주제선율이 흐른다.
이 영화의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1악장의 주제선율은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나온다. 안나가 브론스키와 처음으로 육체적 접촉을 갖기 시작하는 장면과, 안나가 남편에게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고백하는 장면, 그리고 아이를 유산하고 병석에 누운 안나를 브론스키가 데려가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비창교향곡>이 많이 나오지만 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특히 여기에 나오는 1악장의 주제선율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멜로디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단순히 ‘아름답다’ 혹은 ‘슬프다’라는 느낌을 넘어선 그 무엇, 오직 우수와 비애를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비장하고도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숙명적인 슬픔의 심연을 파고드는 1악장 주제선율의 장대한 울림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 깊은 음영을 드리운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과 함께 이 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비가>이다. 피아노 독주로 연주되는 이 곡은 매우 로맨틱한 슬픔을 담고 있다. 안나가 브론스키에 대한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장면과, 브론스키의 아이를 유산한 후 남편에게 용서를 비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브론스키와 크게 싸운 후 생의 마지막 장소인 기차역으로 가는 장면에서 이 곡이 나온다. 안나의 망연자실한 표정 위로 흐르는 라흐마니노프의 <비가>가 가슴 저리게 어필해 오는 장면이다.
기차역에 도착한 안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비창교향곡>의 4악장이 흐른다. <비창교향곡>의 네 악장 중에서 가장 유명한 악장은 물론 1악장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비창’이라는 제목에 더 어울리는 악장은 4악장이라고 생각한다. 1악장의 주제 선율도 좋지만 ‘처연한 슬픔’ ‘비극적 최후’라는 측면에서 보면 4악장이 훨씬 여기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병석에 누운 안나를 본 후 집으로 돌아온 브론스키가 권총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바로 이 악장의 도입부가 나오는데, 여러 개의 현악기가 일제히 상승하면서 만들어내는 화음의 처연함이 일품이다.
<비창교향곡>을 작곡할 때,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이 최후의 교향곡이 마치 나 자신을 위한 진혼곡처럼 느껴진다’라고 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최후의 교향곡’이니 ‘진혼곡’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비창교향곡>의 초연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난 후, 차이코프스키는 한 레스토랑에서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끓이지 않은 맹물을 그냥 마셨다. 그랬다가 그만 콜레라에 걸리고 말았다. 고열에 시달리던 그는 <비창교향곡>이 초연된 지 엿새가 지난 1893년 11월 3일, 새벽 3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대로 <비창교향곡>이 결국 그 자신의 진혼곡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많은 작품을 통해 러시아 특유의 우수와 비애를 노래했던 차이코프스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장대한 스케일의 비가(悲歌)를 세상에 남기고 죽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창교향곡>은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해 왔던 비장하고 처연한 아름다움의 결정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가 대합실에 앉아 최후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비창교향곡>의 4악장이 흐르기 시작한다. 기차가 흰 연기를 뿜으며 서서히 역으로 들어온다. 기차가 다가오자 안나는 점점 더 철로 쪽으로 몸을 숙인다. 비장한 음악은 이제 그녀에게 비극적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을 예고한다. 조용히 철로를 바라보던 안나가 마침내 그 위로 몸을 던진다. 안나의 몸이 천천히 밑으로 떨어진다.
비극은 끝났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장한 선율을 배경으로 안나는 끝내 기차에 몸을 던졌다. 기차가 지나가고 난 후 피에 젖은 안나의 눈이 파르르 감긴다. 촛불이 꺼진 후 어둠 속에서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이여.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안나의 죽음은 결국 신의 심판이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의 죽음은 처참하고 잔인하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무서운 환영이 나를 따라다닌다. 그녀의 몸이 바퀴 밑에서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광경이 자꾸 연상되는 것이다. 그 처참한 환영 저 너머로 톨스토이가 인용한 소설의 에피그램이 들려온다.
‘원수 갚는 것은 내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로마서 12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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