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화요일 프랑스 남부의 툴루즈에 있는 에어버스 본사 마당에서는 수천 개의 모자가 환호성과 함께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수퍼 점보 여객기인 A380 제1호기가 격납고에서 그 웅자를 드러내던 순간이었다.
이날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 등 에어버스 컨소시엄 참여 4개국 정상들은 행사 뒤 오찬 회동을 갖고 각종 현안을 논의하였다. 또 시라크 총리는 “우리가 미국을 눌렀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이날 행사에는 대한항공의 조양호 회장도 참석했는데, 국내 언론 기자들을 상대로 대한항공은 2007년 말부터 A380 5대를 순차적으로 도입한다고 밝히면서 한편 2010년까지 세계 10대 항공사로 도약함은 물론 향후 10년동안 10조원을 투자해 동북아 허브를 이끄는 항공업체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미국과 유럽의 제트여객기 전쟁에서 유럽이 미국에게 크게 한 방 먹이는 의미가 있었다. 이미 작년의 중국 수주(受注)전에서 미국의 보잉사를 크게 앞지른 에어버스였지만 이번 출고행사를 통해 에어버스가 앞서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리고 이 비즈니스 전쟁은 에어버스와 보잉사간의 경쟁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 유럽과 미국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의 성격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이 날 행사가 있던 날은 음양오행으로 갑신(甲申)년 정축(丁丑)월 임인(壬寅)일이었다.
작년과 올해 갑신(甲申), 을유(乙酉)의 해는 탈 것, 즉 수송수단에 관해 많은 이슈가 주어지는 기간들인데. 이는 교통수단이 오행상으로 목(木)이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서 피터 만델슨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성명을 통해 “정부 보조금 문제를 둘러싼 에어버스와 미국 보잉의 분쟁과 관련해 다음 주로 예정된 양측 협상에서 신속한 성과가 도출되길 바란다"고 촉구하면서, 또 "전 세계 시장은 양사 모두에 충분히 크다. 우리의 목표는 양사 사이의 공정한 경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라며 미국을 달래는 것인지 엿 먹이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가는 앞선 자의 여유를 보여주었다.
필자 눈에는 그 성명이 “이제 전 세계 시장은 우리의 독식 체제로 갈 것인데, 당신들은 무슨 대안이 있는지” 하는 조롱으로 읽혀졌다.
그러다가 어쩌면 이 시장은 장차 우리나라의 차기 주력시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득- 스쳐지나갔다. 그간의 흐름으로 볼 때 충분히 타당한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의 상용 제트여객기 시장은 미국의 보잉과 유럽의 에어버스의 2강 체제를 이루고 있다. 사실상의 과점 시장인데, 이번에 에어버스는 그것을 독점 시장으로 만들겠다고 깃발을 높이 치켜든 것이다.
그간 에어버스사는 향후의 항공여객시장이 여전히 허브와 허브를 잇는 대형 여객기 시장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지금의 보잉 747 점보보다 더 큰 A380을 개발해왔다.
잠깐 A380 에 대해 간략히 얘기하면 2층 구조로서 여객기내 공간이 지금의 747 보다 근 50 %가 더 크며, 넓은 공간 덕에 스낵바나 면세점, 카지노, 스포츠 시설 등을 설치할 수 있어 하늘에 떠 있는 호텔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탑승객도 555명으로 747의 417명에 비해 훨씬 많다.
이에 반해 보잉사는 장차 허브와 허브를 잇는 여객 수송보다는 포인트와 포인트를 잇는 편의 위주의 수요가 더 클 것으로 판단하고 중형 여객기인 7E7 드림라이너를 개발하고 있지만 그 1호기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아직은 보잉사의 쟁쟁한 전통과 과점 시장 지배자로서의 위용은 가신 것이 아니고, 또 에어버스와의 한판 승부가 뚜렷하게 결론이 지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보잉사는 이미 추락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잉사가 어떤 회사인가?
보잉사는 사실상 항공기 시장의 최대 강자였고, 지배자였다.
1969년에 처녀비행을 시작한 이 회사의 747 점보 여객기는 지구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어주었다. 대량 항공 수송의 시대를 연 것이 바로 보잉사였고, 그 매체가 점보 여객기였다.
이 기종은 엄청난 성공과 부를 회사에 안겨주면서 그간 끊임없이 개량과 개선을 거듭해 왔지만, 묘한 것은 이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보잉사는 그 후속기를 사실상 개발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유럽 4개국 정부의 노골적인 지원 아래 에어버스 기종은 착실하게 성장해 왔던 것이다. 물론 정부 지원에 대한 미국과 유럽간의 논쟁도 끝이 없었다.
그러면 그동안 보잉사는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인수합병을 통해 사업을 다각화해왔으며, 방위산업과 우주항공산업, 심지어는 영화 산업에까지 손을 대기도 했었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이 회사의 문제는 모험을 기피해왔다는 점이다. 건강한 핵심사업 분야에 집중한다고 말해왔지만, 모험을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경영학 컨설턴트나 경영학 학자들의 말을 빌면 대단히 건전하고 바람직한 경영 모토였지만, 사실은 그런 말들이 거짓이요 허구일 수 있는 것이다. 모험을 하지 않는 기업은 결국에 가서 피폐해지고 사양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은 역사가 누누이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 회사는 그러다가 급기야는 미 국방부의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서 뇌물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명성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보잉사 역시 고객 항공사들이 자사 제품을 구입할 때 리스를 제공하는 금융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었는데 이것이 또 최근 미국 항공사들의 부진으로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커져버렸다. 급기야 차세대 여객기 개발에 필요한 재원확보에 자신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신형 차세대 여객기 개발이 모험이다 싶었던 이 회사는 결국 하나의 묘안을 짜내었는데 그 내용은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신형 7E7 모델 개발에 일본의 항공사들을 참여토록 하여 개발비를 분담시킨 것이다. 일본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 정부 역시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된 ‘항공개발기금’이란 것이 있어 이를 통해 항공사들과 항공기 제조업체들을 지원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유럽의 에어버스 역시 이런 종류의 기금을 통해 사업을 키워왔다.
여객기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오랜 숙원인 바, 보잉사의 제안이 달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미리 신형 7E7 개발 참여를 통해 여객기 개발기술을 흡수하고자 나선 것이다.
여기까지가 최근의 흐름이고 여객기 시장은 여전히 유럽과 미국, 일본의 무대이니 그저 구경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것이 아니라 이번 에어버스와 보잉간의 승부 여하에 따라 우리나라도 여객기 시장에 뛰어들 절호의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세계 제1의 조선(造船)국이고 자동차 역시 작년에 나온 현대의 신 차종은 서서히 구미 시장에서 프리미엄급 자동차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모두 갑신년과 을유년, 목기(木氣)가 강한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지만, 초음속 연습기(사실은 전투기)인 T-50 이 이제 양산 체제에 들어가는 단계에 와 있다.
그간 우리의 여객기 시장에서의 위치는 동체의 일부나 고리 날개, 플랩 등 대단히 미미한 부문에서 끼어들었지만, 이는 사실 우리나라가 여객기를 제법 많이 수요로 하는 나라이어서 메이커인 에어버스나 보잉이 우리의 체면을 봐준 것에 불과한 점도 있다.
우주위성 시장 역시 여전히 그런 정도이지만, 우리의 기술력과 산업력은 이번의 에어버스/보잉 간의 항공 대전 여하에 따라 새로운 기회가 급격하게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잉이 에어버스와의 일전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해질 경우, 일본은 물론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역할이 주어질 것이고 또 한 가지 커다란 변수인 중국 항공시장이 2008년 올림픽을 계기로 급성장할 경우에도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기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초일류 산업선진국이 아니면 참여를 허용치 않았던 이 시장에도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은 본시 강자의 독점을 오래토록 허용하지는 않는 법이다.
우리나라가 항공기 개발에 뛰어든 것은 1994년 갑술(甲戌)년의 일이다. 당시 KT-1 훈련기가 최초의 국산화 기종이었다. 그 이후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가 설립된 이래 이 비행기는 지난 2003년에 인도네시아로 최초 수출되는 경사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T-50 이라는 별 손색없는 고급 음속 훈련기도 양산해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대한한공 역시 나름으로 에어버스나 보잉사에 대한 수주 및 납품을 통해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원래 정비창에서 항공기 정비하는 것을 하청받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우리의 항공 산업이 언제쯤이면 우리에게 지금의 수출 효자 품목인 자동차나 배처럼 여객기 및 기타 항공기 시장에서 활개를 펼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한 번 음양오행을 통해 예측해보기로 하자.
보잉사의 퇴락 또는 고전은 항공기 시장에서의 부단한 합종연횡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그 시기는 다음번에 오는 나무의 해들인 2014년과 2015 년 갑오(甲午),을미(乙未)년을 기폭점으로 해서 커다란 변화의 시기가 올 것이다. 우리가 항공우주산업으로 본격 도약해가는 시기가 바로 그 때인 것이다.
(지난 주 글이 실리지 않았었는데, 필자는 근 20년 만에 겪는 심한 감기몸살로 아예 누워 지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독자분들의 양해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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