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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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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13>

전장에 울려 퍼진 실존의 아다지오: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

우리나라 젊은이가 이라크 무장세력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던 지난 여름, 나는 TV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눈을 가린 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젊은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TV를 통해 수없이 잔인한 장면을 많이 보았지만 세상에 이것처럼 보는 이를 진저리치게 만드는 장면이 또 있을까. 나는 그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과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이제는 제발 그만 좀 보여주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이런 고통과는 상관없이 문제의 그 장면은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내 눈과 귀를 괴롭혔다.

그가 저항세력에게 붙잡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안전을 기원하는 촛불 집회에 참석했었다. 모든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내 스스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촛불을 들고 처절한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을 한 인간을 생각했다. 그때 눈을 가린 채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적어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명분도 없는 개죽음에 불과하니까.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을 저버리고 그가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위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앞 다투어 이 사건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무고한 젊은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그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아주 특이한(?) 주장을 담은 글도 더러 있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인간의 생명을 수량적으로 계산해 이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그의 죽음이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니 뭐니 하면서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를 순국열사로 만들어주는 글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런 종류의 글 중에서 가장 특이했던 것은 그를 죽인 이라크 무장세력에게서 우리 인간은 왜 이렇게 잔인할까 하는 식의 실존적 고뇌를 끄집어낸 글이었다. 인간의 잔인함을 애통해 하는 그 글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플래툰>을 보았을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은 전쟁의 본질과 인간본성의 문제를 파헤친 영화다. <디어 헌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베트남 전쟁 그 자체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어떤 전쟁이라도 좋다. 어쨌든 전쟁이라는 것이 인간을 지극히 잔인하게 만든다는 것,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선과 악을 서로 대립하게 만든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영화이다.

주인공인 크리스 테일러는 대학에 다니다가 자원해서 군에 입대한 신참 군인이다. 막연한 사명감을 가지고 군인이 된 그는 직접 전투에 뛰어들면서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사랑하던 전우들이 하나 둘 씩 처참하게 죽어가고, 이에 따라 대원들의 증오와 복수심도 점점 커져간다.

그런데 그가 소속된 부대에는 번즈 중사와 라이어스 하사라는 서로 상반된 성격을 가진 상관이 있다. 번즈는 타고난 전쟁광으로 살상을 밥 먹듯이 하고, 이 때문에 휴머니스트인 라이어스 하사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두 사람이 이렇게 견원지간처럼 서로 반목하고 있던 어느 날, 번즈는 정글 숲을 혼자 걷고 있는 라이어스를 발견한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번즈는 라이어스를 겨냥해 총을 쏜다. 번즈는 곧 뒤따라온 크리스에게 라이어스가 전사했다고 말하지만 크리스는 직감적으로 번즈가 라이어스를 죽였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수세에 몰린 미군들이 적의 공격을 피해 헬리콥터를 타고 주둔지를 빠져나올 때, 저 밑에서 죽은 줄 알았던 라이어스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적지를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들고 구원을 요청하는 라이어스의 몸에 사정없이 총탄이 박힌다. 화면 가득 비장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라이어스는 슬로우 모션으로 장렬하게 전사한다.

라이어스가 전사하는 장면에서 비장하게 흐르는 음악은 바로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라는 곡이다. <플래툰>의 주제음악으로 쓰이고 나서 아주 유명해진 곡인데, 이 영화에서는 이 장면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 곡이 배경으로 깔린다. 장면에 맞게 여러 개의 음악을 사용하고 있는 다른 영화와는 달리 <플래툰>에서는 <현을 위한 아다지오> 단 한 곡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이 곡을 작곡한 사무엘 바버는 미국의 현대 작곡가이다. 그는 1935년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동안에 현악 4중주 제1번을 썼는데,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그 중 2악장을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1938년 세계적인 지휘자 알투르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 교향악단의 연주로 세계 초연되어 원곡보다 더 유명해졌다.

이 곡을 연주하는 현악 오케스트라에는 제1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이렇게 다섯 개의 악기군이 있는데, 이중 제2 바이올린 파트와 첼로 파트가 다시 두 개로 나뉘어져서 모두 7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사무엘 바버는 현대 작곡가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난해하고 복잡한 음악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음악은 다른 현대음악에 비해 지극히 단순하고, 어느 면에서 보면 보수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현을 위한 아다지오>만 보아도 그가 어떤 성향의 작곡가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 곡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전이나 낭만시대의 음악과는 다르다. 일정한 리듬과 형태를 가진 뚜렷한 멜로디가 기승전결의 법칙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변형, 발전되는 기존의 음악과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7개의 파트가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서로의 움직임에 대응하고 있다. 특징적인 리듬은 없고, 4분음표로 이루어진 단순한 음형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여러 파트의 음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우주공간을 유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유영하다가 때로는 같은 음으로 합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합쳐져서 두터운 화음을 이루기도 한다.

처음에 낮은 곳에서 조용히 시작된 이들의 유영은 아주 느린 속도로 점점 고도를 높여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모든 음들이 유영을 멈추고 한 곳에서 날카롭고 투명한 화음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다. 이런 클라이맥스 뒤에 곧 숨 막힐 듯 날카로운 침묵이 이어지고, 이렇게 찰라와 같은 침묵이 끝나고 나면 모든 음들이 처음과 비슷한 몸짓으로 조용히 느린 여행의 마무리를 짓는다.

영화 속에서 사무엘 바버의 음악이 주는 효과는 비장하다.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된 장렬한 전사 장면에 아주 잘 어울린다. 온몸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처참한 죽음도 이 음악이 깔리면 장렬한 죽음이 된다. 비장하기는 하지만 처참하다는 느낌은 안 든다. 비단 이 장면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여러 장면에 수시로 등장하면서 영화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분위기는 장엄하고 비장하고 엄숙하다.

크리스가 부상을 당해 헬리콥터로 호송되는 장면에서도 이 음악이 나온다. 이 곡을 배경으로 크리스의 독백이 이어진다. 주인공의 입을 통해 영화의 주제가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헷갈릴지도 모르는 관객을 위해 이렇게 알아서 요약까지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돌아보면 우린 적이 아닌 우리 자신과 싸웠습니다.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었지요. 전쟁은 끝났지만 그 기억은 늘 저와 함께 할 겁니다. 라이어스는 번즈와 싸우며 평생 동안 제 영혼을 사로잡으려 하겠지요. 때로는 내가 그 둘을 아버지로 해서 태어난 아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어떻든 간에 살아남은 자에게는 그 전쟁을 다시 상기하고 우리가 배운 것을 남에게 알리며 우리의 남은 생을 바쳐 생명의 존귀함과 참 의미를 알아야할 의무가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도 내게는 아주 낯설었지만 그 보다 더 뜻밖인 것은 그 내용이었다. 뭐야? 이거 전쟁영화가 아니라 실존주의 영화잖아? 이런 느낌이 들었다. 전쟁을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규정한 영화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을 위한 아다지오> 같은 음악을 틀어놓고 슬로우 모션으로 비장하게 죽어가는 장면의 연출이 가능한 것이다. <디어 헌터>의 마이클 치미노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만든 올리버 스톤 감독 역시 베트남 전쟁 자체에 대한 정치적 시각은 없는 듯했다.

물론 나의 이런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전쟁영화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아야지 그것을 그 전쟁의 부당성을 알리는 선전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쩌랴.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볼 때마다 영 마음이 불편한 것을. 전쟁이 전쟁 아닌 그 무엇으로 윤색되는 것이 나는 싫다. 특히 거기에 로맨틱하거나 장엄한 음악이 가미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왜? 전쟁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갖게 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은 전쟁에 참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지막지한 증오와 복수와 공포가 반인륜적인 참수와 자살폭탄으로 이어지는 저주받은 전쟁에는 역시 바그너의 음악이 어울린다. 여기서 미군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틀어놓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베트콩 마을에 무차별적으로 총질을 해댄다. 바그너의 음악을 틀어놓는 이유는 베트콩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라나.

금관악기로 팡파르처럼 울려 퍼지는 그 기이하고도 괴상한 음악.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음악을 이 지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러나 실제로는 일어나고 있는 그 상황에 맞추어 튼다면 정말 전쟁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영화는 음악과 더불어 리얼리티를 얻게 될 것이다. 그 음악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음악인 것처럼 들리므로. 그 상황은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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