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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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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클래식이 영화를 만났을 때' <14>

프랑스적 감각으로 그려낸 베트남: 트란 안 홍의 <그린 파파야 향기>

나는 시를 못 쓴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시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열심히 글을 쓰다가 문득 단어 하나 문장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해 버리는 한 편의 시를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허탈하기 짝이 없다. 그 한 편의 시에서 내가 온갖 수사를 동원해서 애써서 얘기하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끝내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 단 한 구절 아니 단 한 단어로 너무나 산뜻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 저런 경지에 오르나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내 산문은 늘 시를 그리워한다.

시만 못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채화도 못 그린다. 수채화에 대해서는 아픈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 우리는 모두 운동장의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나는 수채화를 그리는 방법을 몰랐다. 아니 방법은 알았던 것 같다. 붓에 물을 너무 많이 묻히면 안 된다는 것과 칠한 곳에 너무 많이 덧칠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나무와 꽃을 더 멋지게 표현하겠다는 욕심에 붓질을 한 곳에 또 다시 색을 칠하고, 그 다음에 또 다시 다른 색을 칠했다.

그 과욕의 결과는 참담했다. 조금 지나자 내가 칠했던 나무 색, 줄기 색, 꽃잎 색들이 모두 줄줄이 도화지 한 가운데로 모이더니 이 모든 색깔이 합쳐진 거무스레한 빛깔의 물웅덩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마침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고 있던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다. 심지어는 체육 선생님마저도 “얘는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웅덩이를 만들어 놓은 거네.”하면서 놀렸다. 나는 아직도 내 역작에 그토록 가혹한 비평을 했던 그 체육선생님의 이름과 얼굴은 물론 그 때 내 얼굴에 내리쪼이던 햇볕의 온기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와 수채화. 아직 ‘느끼한’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이 두 가지는 영원한 콤플렉스다. 그래서일까. 산문처럼 장황한 수사를 동원하거나 유화처럼 덕지덕지 물감을 쳐 바르지 않고 ‘산뜻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예술작품을 보면 그 자리에서 매료되고 만다. 이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도 바로 그런 작품 중의 하나이다.

내가 한 편의 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아마 9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세상에 이렇게 말이 없는 영화도 있나 하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에서 나레이터 역할을 하는 것은 카메라이다. 카메라가 등장인물들과 배경들을 그저 천천히 ‘보여줌으로써’ 말을 한다. 숨을 죽이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따라가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그린 파파야 향기>의 배경은 베트남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낯설겠지만 우리 같은 동양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해서 오히려 진부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품의 배경은 1951년 베트남의 사이공, 열 살의 어린 소녀 무이는 어느 부잣집의 종으로 들어간다. 그 집의 여주인은 비록 부잣집 마님이지만 가슴 속에 나름대로의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다. 몇 년 전에 무이와 같은 또래의 딸을 잃는 아픔을 겪은 데에다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할 남편이 현실적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풍류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베트남 전통악기를 띵까띵까 타면서 무위도식을 일삼고, 그러다 방랑벽이 도지면 집안에 있는 돈을 몽땅 가지고 나가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안 들어오곤 한다. 이런 인간형이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남자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누구 말마따나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고루 퍼져있는 모양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서 아마 이와 비슷한 소재의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를 머리 속에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 속에 흔히 나올 법한 진부한 대사와 진부한 흐느낌을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지극히 진부한 동양적인 소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소재는 동양적이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지극히 서양적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극히 프랑스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거둔 가장 커다란 성과는 이렇게 진부한 소재를 지극히 산뜻한 감각으로, 전혀 느끼하게 않게 풀어냈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산문이 아닌 시로, 유화가 아닌 수채화로 그려냈다는 얘기다.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당에 호박을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린 파파야를 기른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무이가 잘 익은 그린 파파야 열매를 따서 독특한 방식으로 채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조금 엉뚱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식물이 풍성하게 잘 자라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굶어죽을 염려는 없겠구나. 사막이나 추운 지방과 같은 혹독한 굶주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이 식물성 영화에는 더운 지방 특유의 풍성하게 잘 자란 초록의 식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한 마디로 초록의 향연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생명을 상징하는 이 풍성한 초록빛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양분을 충분히 빨아들여 잘 자란 초록색 잎사귀와 그것을 안식처 삼아 살아가는 작은 벌레들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그 곁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의 어두운 그늘을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싱싱하다. 그래서 인간사조차도 각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슨 걱정이야. 저렇게 식물들이 지천으로 잘 자라는데.

풍성한 초록빛이 이 영화의 시각적 배경이라면 끊임없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 소리, 새 소리는 이 영화의 청각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대사는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이 자연의 소리는 영화가 시작해서 끝나는 순간까지 끊이지 않고 들린다. 사람은 침묵하고, 대신 풀벌레와 개구리, 새, 세차게 떨어지는 빗줄기만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은 후반부에 나오는 드비시의 <달빛>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 새 스무 살이 된 무이는 자신을 딸처럼 아껴주던 마님 집을 떠나게 된다.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무이를 거둘 수 없게 된 마님이 무이를 큰 아들 트렁의 친구인 쿠엔의 집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으로 딸에게 주려고 했던 옷과 패물을 무이에게 챙겨준다.

무이의 새 주인 쿠엔은 넓은 집에 혼자 살면서 작곡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부잣집 아들이다. 작곡가라고는 하지만 뭐 그렇게 치열하게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소일거리로 작곡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특히 그가 곡을 끄적거릴 때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드비시 풍의 감각적인 멜로디와 화성이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이렇게 무이가 쿠엔의 집으로 옮겨간 후 영화는 더욱 프랑스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무이는 쿠엔의 충실한 몸종 역할을 한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왜냐하면 처음 마님 집에 들어갔을 때부터 트렁과 함께 집에 놀러온 쿠엔을 남몰래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이가 나긋나긋한 식물성 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장만하고, 그것을 쿠엔의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리는 동안 바로 드비시의 <달빛>이 흐른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처럼 기름기를 뺀 피아노의 산뜻한 울림이 쿠엔에 대한 무이의 순진무구한 사랑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에게는 늘 약혼녀가 있게 마련이다. 쿠엔에게도 멋지고 세련된 약혼녀가 있었다. 그녀는 쿠엔의 집에 수시로 찾아와 연인에게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치곤 하는데, 이런 그녀를 바라보는 무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물론 영화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적어도 그 감정이 질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보다는 자기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순진무구한 호기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무이가 쿠엔의 약혼녀가 벗어놓은 금빛 샌들을 발가락으로 살짝 건드려 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금빛 샌들. 가난하건 부자이건 배웠건 못 배웠건 젊었건 늙었건 여자라면 누구나 꾸는 꿈이 있다.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에 나오는 가사처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 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로 들어가는 꿈이다. 이것은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세상 모든 여자들의 공통된 꿈인데, 여기서 금빛 샌들은 바로 그런 꿈을 상징하고 있다. 무이가 발가락으로 금빛 샌들을 살짝 건드려보는 바로 그 순간 드뷔시의 <달빛>이 흐른다.

이 곡을 작곡한 드비시는 음악사에서 인상주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미술에서처럼 여러 화가가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음악의 인상주의는 거의 드비시 혼자 창안해 낸 독창적인 소리의 세계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분위기의 음악’이다. 드비시가 음악을 통해 무슨 얘기를 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그는 절대로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들려줄 뿐이다.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가 그저 보여주는 것처럼.

애매모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포착하기 힘든 세계의 신비로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묘한 흐름, 기본적인 강세의 법칙은 무시되고, 마디의 분절점은 베일에 싸이고, 멜로디는 한 마디에서 다음 마디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덧없는 화성과 미묘한 음색, 베일에 싸인 색조의 혼합과 감지할 수 없는 어렴풋한 빛. 바로 이런 것이 드비시 음악의 특징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무이가 발끝으로 살짝 건드린 금빛 샌들은, 그리고 그 순간에 흘러나오는 <달빛>은 금빛 샌들에 대한 루이의 동경과 꿈이 그렇게 절절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저 순진무구한 호기심, 드비시의 음악처럼 그렇게 가벼운 터치의 호기심일 뿐이다. 무이가 쿠엔의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약혼녀의 립스틱 역시 금빛 샌들과 같이 새롭고 예쁜 것에 대한 여성적인 호기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 연주되는 드비시의 <달빛>은 무이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우아하고 감미로운 감각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무이와 쿠엔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무이를 아내로 맞은 쿠엔은 그녀에게 글을 가르친다. 쿠엔이 연주하는 드비시 풍의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무이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천천히 글자를 읽어나간다. 그리고 이어서 만삭이 된 무이가 새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시를 읊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베트남에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가면 풍성한 초록빛의 그 싱싱한 생명들을 만날 수 있을까. 드비시의 <달빛>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그런 감각적인 공간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누군가 말했다. 그것은 프랑스적 환상이 그려낸 베트남일 뿐이라고.

이 영화를 만든 트란 안 홍 감독은 베트남에서 태어났지만 열두 살 때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그 곳에서 줄곧 교육을 받고 활동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을 맡은 톤 탓 티트 역시 프랑스 국립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어린 무이 역을 맡은 꼬마 역시 프랑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감독과 작곡가를 제외한 스태프들도 대부분 프랑스 인이다.

그 뿐 아니다. 그토록 우리 눈과 귀를 매료시켰던 영화 속 공간 역시 베트남이 아니라 프랑스에 지어진 세트장이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그토록 베트남적인 것으로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 영화는 베트남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프랑스 영화다. 영화 속의 베트남은 프랑스적 감성으로 빚어낸 가상의 베트남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려낸 베트남이 참으로 매혹적이다. 프랑스적 환상을 대변하는 <달빛>의 신비로운 선율은 현실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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