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을 살펴보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 세상 어느 가치보다 우선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사랑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품고,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시기. 사랑만이 존재의 이유이고 의미가 되는 시기. 사춘기에서 20대 중반까지가 바로 이런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 때는 일단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무모할 정도로 모든 정열을 소진시켜가며 그에게 몰두한다. 그 과도한 집착의 결과가 아무리 참담해도 사랑에 대한 환상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영화나 소설처럼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젊디 젊은 에너지를 무익한 연애에 탕진해 버리곤 한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을 본 것은 내가 사랑에 대해 이런 환상을 품고 있던 때였다. 명동에 있던 코리아 극장에서 보았는데, 그 때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영상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엘비라 마디간>은 그때까지 내가 품고 있던 사랑에 대한 핑크빛 환상을 구체적인 영상으로 보여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줄거리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엘비라 마디간>은 1889년 덴마크의 한 숲 속에서 스웨덴 육군 장교 식스틴과 덴마크의 줄 타는 소녀 엘비라 마디간이 동반 자살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 것이다.‘불륜’이라는 소재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요즘 시각에서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영화지만 당시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금지된 사랑’이라는 것에서 더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들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풀밭. 그 풀밭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들. 그리고 그 나비를 따라가는 한 쌍의 연인. 이것만으로도 내 환상은 충분했다. 그런데 여기에다 사랑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는 드라마틱한 결말까지 가미되어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적인 사랑이란 말인가.
이 영화에서 나를 매료시킨 또 하나의 환상은 바로 모차르트의 음악이었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제2악장이 이 영화의 주제음악인데. 두 사람이 풀밭에서 나비를 좇는 장면을 비롯해 영상이 아름다운 장면이면 어김없이 이 음악이 등장해 영화 전체를 로맨틱 무드로 끌어가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처음 <엘비라 마디간>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음악이 주는 달콤한 로맨티시즘에 매료되었다. 영화를 본 후 너무나 음악이 좋아서 악보를 사다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그 멜로디에 도취되기도 했었다. 현악기의 피치카토 반주에 맞추어 등장하는 피아노의 멜로디가 두 연인이 느끼는 무한한 행복감을 그대로 음악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이 음악을 배경으로 식스틴과 엘비라는 각각 이런 대사를 읊는다.
“때때로 내 자신에게 행복한가 물어볼 때가 있어. 그러면서 혼자 되뇌이곤 하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하고 말이야. 사람들은 아마 우리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들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 변화를 과감하게 받아 들일거야.”
“전쟁을 본 적이 있나요. 식스틴? 당신은 군인이잖아요. 그런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전쟁은 군인의 일이죠. 그렇죠? 파리에서 서커스 텐트가 불 탄 적이 있었어요. 누군가 수류탄을 던졌나 봐요. 저는 그때 겨우 두 살이었지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동물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대요. 그 냄새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해요. 전쟁은 환상의 행진이 아니예요. 식스틴. 불타버린 육신의 냄새 같은 것이지요.”
이 대사에서처럼 두 사람은 불타 버린 육신의 냄새와도 같은 전쟁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들의 도피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 현장으로부터의 도피이자 도덕과 인습의 두꺼운 장벽으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다. 식스틴과 엘비라는 자신들을 옥죄던 두 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덴마크의 숲 속에서 완벽한 행복감을 느낀다. 사랑이 무슨 죄란 말인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아다지오의 로맨틱한 선율은 두 사람이 느끼는 이런 완벽한 행복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 멜로디 어디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위험한 사랑의 어두운 그림자를 달콤한 로맨티시즘으로 감쪽같이 은폐한 당의정과 같다.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에 대해 핑크빛 환상을 갖도록 한다. 물론 개중에는 이 음악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미로운 슬픔, 그 슬픔조차도 아름다움으로 즐기는 로맨틱한 슬픔일 뿐이다.
어느 날, 현실의 벽에 부딪친 엘비라가 식스틴에게 말한다. 사람은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 사랑의 환상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자살을 위해 권총을 준비해 간 식스틴은 엘비라가 풀밭을 뛰어다니다가 나비를 잡는 순간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총성이 울리자 나비를 잡으며 행복해하고 있는 엘비라의 모습이 정지화면으로 잡힌다. 곧 이어 들리는 또 한 방의 총성.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완결되었다. 그 정지화면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렇게 영원하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서 사랑을 빼앗아갈 수 없어요.”
영화의 배경으로 쓰인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은 1785년 모차르트가 스물 다섯 살 때 비인에서 작곡해 그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로부터 숭고하고 장엄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면 ‘숭고하고 장엄하다’는 평은 이 곡의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엘비라 마디간>의 주제음악으로 쓰였던 2악장 아다지오는 더욱 그렇다.
나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전에는 몰랐던 모차르트 음악의 진가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빠른 곡보다는 느리고 서정적인 곡이 좋은데, 그런 곡을 들을 때마다 모차르트를 왜 위대한 음악가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아다지오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의 아다지오 목록에서 제외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의 취향일 뿐이며, 이런 내 취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천재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내릴 만큼 내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로맨틱한 선율이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일까. 그 지나치게 달콤한 살롱음악적인 분위기가 갑자기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이 곡을 굳이 색깔로 비유하자면 핑크빛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랑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을 때에는 이런 핑크빛 무드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런 무드에 빠져들 수 있었으며, 달콤한 표정으로 그것을 즐길 수 있었다. <엘비라 마디간>처럼 두 남녀가 슬로우 모션으로 풀밭을 뛰어다니는 장면이나 바닷가 모래사장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달려가는 장면을 보면서도 충분히 감동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직접 그렇게 멋진 장면을 연출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 간지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 동안 내가 꿈꾸어오던 그런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상처를 받았다. 환상이 워낙 컸기 때문에 절망도 깊었으며, 그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데에도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엘비라 마디간>과 같은 감미로운 사랑의 환상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은 사랑에 대해 얼마든지 무모할 수 있는 젊은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니까. 물론 지금도 어느 날 문득 젊은 시절 가슴을 훑고 지나갔던 찬란한 희열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때가 있다. 코 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문득 봄을 느낄 때, 빗방울이 들이치는 유리창 너머로 축축하게 젖은 거리를 바라볼 때,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지난 시절의 유행가를 우연히 듣게 될 때. 그럴 때면 <엘비라 마디간>을 동경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던 젊은 시절의 나를 떠올리곤 한다.
끝내는 깨질 수밖에 없는 찰라적인 행복에 목숨을 걸었던 시절. 모차르트의 감미로운 선율에서 지고지순한 사랑의 환상을 찾았던 시절. 그 시절이 찬란하기는 하지만 설사 누가 내게 그 시절을 돌려준다 해도 결코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찬란한 희열의 순간은 없지만 더 이상 가슴저린 사랑의 아픔도 없는 지금의 안정감이 나는 좋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그리고 그 속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내게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하는 빛바랜 로맨티시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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