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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사정(蓋棺事定)과 환부지인(患不知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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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사정(蓋棺事定)과 환부지인(患不知人)

한의사 이혁재의 '건강 如談' <5>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말이 있습니다. 관의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인데요. 두보(杜甫)가 쓰촨성[四川省] 동쪽 쿠이저우[夔州]의 깊은 산골로 낙배해 있을 때 친구의 아들인 소혜가 유배되어 그곳에 와서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이를 보다 못한 두보가 <군불견간소혜(君不見簡蘇徯)>이란 시를 지어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목 : 君不見簡蘇徯

君不見道邊廢棄池,
君不見前者摧折桐.
百年死樹中琴瑟,
一斛舊水藏蛟龍.

丈夫蓋棺事始定,
君今幸未成老翁,
何恨憔悴在山中.
深山窮谷不可處,
霹靂魍魎兼狂風.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길에 버려진 못을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 뒤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
한 섬의 오래된 물은 교룡이 숨기도 한다

장부는 관 뚜껑을 덮어야 모든 일이 결정된다
그대는 아직 늙지 않았거늘
어찌 원망하리 초췌해 있음을
심산 유곡은 살 곳이 못된다
벼락과 도깨비와 미친 바람이 불고 있으니.

태음인이 판단을 미루려 할 때, 그 미룸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도도한 역사의 흐름 내지 짧은 주기에는 관찰하기 힘든 긴 주기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두보가 소혜에게 준 위안은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해결책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끝장난 듯이 여기는 좌절의 순간에 “그 일은 사소할 뿐이야” 라는 큰 마음을 내어 주면서 불안해 하는 상대방에게 안정을 도모합니다.

두보의 일생을 참작해 보건대, 새옹지마와도 같은 세파에서 이런저런 ‘꾀(籌策)’도 내어 보고, 그 꾀가 몇 번 적중함에 따라 ‘교만함(驕心)’도 생기고, 그러다가 오히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경험을 겪고 난 뒤, 인생의 말미에 이르자 놓지 말아야 할 ‘큰 흐름’(一)과 ‘핵심(女)’을 굳게 지켜 대소와 장단을 가려내는 ‘위의(威儀)’를 자연스레 몸에 밴 분이 아닐까 합니다. <군불견>이란 시는 바로 이 위의로써 어떻게 평상심을 유지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태음인의 '교만한 마음'(驕心), 소음인의 '자기 긍정이 과도한 마음'(矜心), 태양인의 '남을 잘라내고자 하는 마음'(伐心), 소양인의 '과장하고자 하는 마음(夸心)과 같은 '사심'(私心, 邪心)이나, 소음인의 '남의 것을 뺏고자 하는 마음이나 행동'(奪心), 태음인의 '어설프게 치장하려는 마음이나 행동(侈心), 소양인의 '이 정도면 됐어 하며 게을러지려는 마음이나 행동'(懶心), 태양인의 '남의 것을 눈치 안 채게 훔치려는 마음이나 행동'(竊心)과 같은 '태행'(怠行)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될 거라 보입니다. 단, 고사성어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오히려 사심과 태행을 조장하는 경우도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하겠죠. 예컨대 ‘개관사정’을 ‘합리화와 게으름의 천재’인 ‘아큐’(노신의 소설인 ‘아큐정전’의 주인공 말입니다) 같은 이가 본다면 그 부작용이 가관이 될 테지요.

사람이 사람을 평가한다는 건 참 어려운 거지만, 한편으로 재밌는 일이기에 모든 사람은 그걸 즐길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무료한 일상에 산뜻한 청량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여튼 인류가 존속되는 한 백인이면 백색의 평가가 나올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헤겔만 해도 그렇게나‘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강조하는 걸 보면 평가 내지 인정은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굴레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한편 [논어(論語)]의 첫 편인 ‘학이(學而)’의 첫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배우고 때에 맞게 익혀 버릇 삼으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멀리서 반드시 (혹은 먼 지방에서) 온다고 하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은근히 열받지 않는다면 또한 참으로(尹) 방정하게(口) 씨뿌리지(子) 않겠는가

중학교 한문 교과서에서 이 구절을 본 이후로 내내 궁금했던 건, 바로 ‘또한’이란 뜻의 ‘역(亦)’이란 글자였습니다. 굳이 없어도 되는데 들어가 있는 글자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다가 공자가 [주역(周易)]에 대한 해설을 달았다고 알려진‘계사전(繫辭傳)’을 보면서 ‘역(亦)’이란 글자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역(易)은 천지와 인간이 하나 되거나 서로 감응하는 삶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역(亦)’은 ‘자연스런 살림살이’에 덧붙여 또한 즐거운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심신이 수고롭기 마련인데,‘학이(學而)’의 첫구절은 이를 치유할 원칙을 말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學而’의 마지막 구절은 ‘不患人之不己知요 患不知人也니라’입니다. ‘타인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人不知)’에 대한 말이 첫머리와 마지막에 모두 나오고 있습니다. 해석하면,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두 중심에 마음을 두어(患) 우왕좌왕 하지 말고, 기왕 걱정하려거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에 두어라”라는 뜻이 되겠죠. 의학적으로 보자면, 전자는 중증이요 후자는 경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전자는 스스로 마음을 돌려야 가능하지 그렇지 않고선 매우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人之不己知”에 대해 태음인 두보가 “丈夫蓋棺事始定”을 그 치유책으로 삼았던 것처럼, 태양인 공자는 그 치유책을 “患不知人”로 삼았습니다. 두보가 걱정의 크기를 줄이는 데 치중하는 ‘위의(威儀)’를 방편으로 삼았다면, 공자는 걱정의 크기는 그대로 둔 채 아니 어쩌면 더 깊고 크게 만들어 방향을 180도 바꾸는 ‘방략(方略)’을 방편으로 삼았다고 하겠습니다.

<후기>

태소음양인에 대해 상세한 설명없이 사상의학적인 글을 쓴 것이 그리 개운하지는 않습니다만, 앞으로 연재될 글에서 조만간 독자 여러분들과 체질여행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가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한도에서 조금씩 조금씩 걷고자 합니다. 사실 [동의수세보원]이란 책은 한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만의 전공서라고 하기에는 훨씬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동의수세보원]을 직접 읽겠다는 분에게는 제 글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언제고 [동의수세보원]을 읽으면서 자신의 체질을 알아내겠다는 분들에게는 작은 징검다리가 될 수는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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