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다산연구소(www.edasan.or.kr)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원로소설가 최일남 씨의 칼럼이다. 1100여 나치 전범을 법정에 세운 '유태인 나치사냥꾼' 시몬 비젠탈의 별세에 즈음하여, 일본 식민지배에서 6.25를 전후한 숱한 양민학살, 그리고 '광주'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피해자가) 용서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 (가해자의) 참회는 없"는 한국적 과거청산의 뒤틀림을 지적하고 있다. 다산연구소측의 양해를 얻어 이 칼럼을 전문 그대로 게재한다. <편집자>
***시몬 비젠탈의 질문**
두어 주일 전이다. 아침신문을 대강 훑다가 시몬 비젠탈이라는 유대인의 별세 기사에 눈이 딱 멈췄다. 마침 그가 쓴 '해바라기'(박중서 옮김. 뜨인돌 펴냄)를 사서 읽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구나 싶었다. 애초에 생소했던 이름이 새삼 의미있게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책 내용은 해바라기의 서정성과 동떨어진 전율로 참담하다. 그렇다면 향년 97세로 삶을 마치는 순간의 당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신문은 오스트리아 빈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고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미진한 느낌을 어쩔 수 없다. '나치 사냥'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던 탓이다.
***나치 사냥꾼 비젠탈이 겪었던 고뇌**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건축가 생활을 하던 비젠탈은 1941년 나치수용소로 끌려가 3년을 보냈다. 홀로코스트 속에서 89명의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 둘이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
그것으로 얘기가 끝났다면 이번 책을 포함한 몇몇 나치 고발 서적의 저자로만 알려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파천황의 대사업을 마음먹었다. 30여 명의 다른 집단수용소 출신 생존자들과 함께 유대역사기록센터를 설립해서, 1100여 나치 전범들을 법정에 줄줄이 세운 것이다.
수십 년이 걸렸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안네 프랑크를 체포한 경찰관이, 이들의 촘촘하고 집요한 색출 활동에 차례차례 걸려들었다. 비젠탈은 네덜란드, 이탈리아, 이스라엘 정부의 훈장과, 미국 의회가 주는 황금 메달을 받았다.
그의 이름을 기려 세운 시몬 비젠탈 센터는 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성명도 발표(2001년)했다. "주변국 침략에 대한 사실이 충분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나무랐다.
그러나 '해바라기'의 내면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이런 게 아니다. 기왕에 보아 온, 차라리 지루하기까지 한 그때 그 이야기와는 다른 질문을 중심화제로 밀고 나간다. 회개와 용서와 침묵에 대한 응답을 줄창 물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시물레이션 아닌 실제상황을 곧바로 들이대면서 말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기신기신 수용소 생활을 견디던 비젠탈은 어느 날 '임종실'에서 얼굴과 온 몸을 붕대로 감은 나치스 친위대원의 참회를 듣는다. 죽기 직전의 스물한 살짜리 SS대원은 고백한다. 200명 가량의 유대 어린이와 여자와 노인을 3층 가옥에 가두고 불을 질러 총질하는 살인행위에 자기도 가담했노라고. 어린애의 눈을 손으로 가린 채 2층에서 뛰어내린 부부를 떠올리며 읍소한다.
"저는 마음 편히 죽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누구든지 유대인을 만나 모든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압니다만 당신이 대답해주지 않으면 저는 결코 마음 편히 죽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선다. 고뇌 끝에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자초지종을 들은 수용소 단짝들의 의견 또한 갈렸다. '자네가 그를 용서했다면, 자네는 평생 자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이 모두 제 정신으로 돌아온다면 모를까,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말할 수조차 없는 사치'라는 소리도 나왔다.
그래서 그는 책을 통해 호소했을 터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고민해달라고.
***가해자 참회 있어야, 피해자 용서를 고뇌하거늘**
1976년 미국에서'해바라기'가 처음 나온 후로, 아닌 게 아니라 신학자와 윤리 지도자, 또는 작가들의 답변이 많이 들어 왔다고 한다. 해서 20년 후에 그런 견해를 모아 개정판을 다시 냈는데, 한국에서는 이번 여름에야 번역 출간된 모양이다.
여러 나라 여러 계층 인사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 아니지만, 한 독자로서의 나 역시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유대민족이 살았던 잔인무도한 세월을 십분 인정하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저 같은 군림은 무엇인가. 독일은 과거의 죄상 앞에 무릎을 꿇었거늘, 일본은 한사코 잡아뗀다. 오히려 은혜를 입혔다고 떵떵거린다. 그게 짧은 홀로코스트와 '야금야금 36년'의 차이인가.
'비젠탈 딜레마'는 필경 용서의 문제다. 때문에 과거사로 논란이 그칠 날 없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지난 날의 숱한 양민 학살과 '광주'의 예에서 경험했듯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용서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 참회는 없다. 그것이 지금껏 겪은 한국적 과거사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망각은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지만, 용서는 의지의 문제라고 시몬 비젠탈은 술회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고난을 당한 장본인뿐이라는 지적을 곁들여 슬픈 글쓰기의 끝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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