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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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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이무영의 MyOST]영화 〈파리 텍사스〉의 OST

우리는 종종 정처없이 세상을 떠도는, 소위 '거지'나 '부랑자'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과연 그들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이유로 방황하는 영혼이 됐을까? 그들도 분명 한 때는 지붕이 있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았던 적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초점 없이 두 눈을 깜빡일 뿐…

영화 〈파리 텍사스〉의 주인공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 분)는 오늘도 멕시코와 인접한 황량한 미국 남서부 텍사스주의 시골길을 걷고 있다. 집도 없이, 기억도 없이 헤매다 쓰러진 그의 주머니에는 동생의 연락처가 들어 있다. 지난 4년 간 행방불명 상태였던 자신을 대신해 아들을 키워 온 동생. 트래비스는 그의 도움으로 새 삶을 찾아간다. 처음 보는 아버지가 어색한 아들과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트래비스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과연 무슨 연유로 그는 오랜 세월 홀로 세상을 떠돌아야 했을까?

영화 〈파리 텍사스〉는 이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던 한 남자가 한 때 자신이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그의 가슴 아픈 추억과 회개를 보여줌과 동시에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느린 전개와 매우 우울한 정서로 일관하는 이 슬픈 영화는 뜻밖에도 보는 이에게 따스한 긍휼의 손을 내민다.

〈파리 텍사스〉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관객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매우 건조한 톤으로 울려 퍼지는 라이 쿠더의 기타 소리, 로비 뮬러 촬영감독의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황색 사막의 풍광, 남루한 코트와 야구 모자 차림으로 무작정 걷는 트래비스의 모습은, 매우 슬프지만, 동시에 너무도 아름다운 오프닝 시퀀스로서의 매력을 뽐낸다.

쿠더의 어쿠스틱 기타가 빛을 발하는 〈파리 텍사스〉의 사운드트랙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미국 남서부 시골의 황량함과, 상실과 외로움에 둘러싸인 트래비스의 심정을 단조의 애절한 선율과 미니멀한 태도로 표현해냈다. 전체적으로 델타 블루스에 대한 쿠더의 진한 애정이 묻어나는 사운드는 매우 느리고 건조하지만, 몇몇 트랙에선 듣는 이의 감정을 자극,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사운드트랙의 앞부분을 장식하는 테마곡 'Paris, Texas'와 'Brothers', 'Nothing Out There'를 통해 들려지는 쿠더의 기타는 연주라기보다는 기타 줄을 튕김으로써 발생하는 소음처럼 느껴진다. 쿠더의 슬라이드 기타만으로 이루어진 전체 사운드는 우리 귀에 익숙한 음악이 아니라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는 미국 남서부 지역 특유의 황량함의 표현이며, 공허한 트래비스의 삶을 반영한 것이다. 쿠더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의해 파생되는 기타 줄의 떨림은 냉혹한 삶의 칼날이 되어 듣는 이의 폐부를 도려낸다.

이어서 등장하는 괴이한 남미의 연가 'Cancion Mixteca'는 곧 부서져 흩어질 듯한 해리 딘 스탠튼의 보컬로 인해 더욱 애절하게 들린다. 너무도 슬픈 멜로디에 어우러지는 스탠튼의 우스꽝스러운 보컬은 이 곡 자체의 고유 정서와는 전혀 다른 코믹한 느낌을 유발하기도 한다. 음악이라기 보다는 음향효과에 가까운 트랙 'No Safety Zone'에 이어지는 'Houston in Two Seconds'와 'She's Leaving the Bank', 'No Couch'는 전반부 트랙들과 마찬가지로 건조한 기타 줄의 튕김으로 일관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트래비스가 핍쇼(peep show-남자들이 돈을 내고 벗은 여자들을 관람하는 장소)의 스트리퍼가 된 아내를 찾아가 대화하는 내용을 그대로 실은 'I Knew These People'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트랙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비록 트랙 후반부에 배경음악이 등장하지만, 긴 대사를 그대로 사운드트랙에 삽입한 것이 쿠더가 창조한 실험적인 음악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도 일리가 있으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두 주인공의 대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 트랙은 강렬한 위력을 발휘한다. 사운드트랙이 영화의 철학과 정서를 지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분명 'I Knew These People'은 충분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손님으로 가장해, 자신을 보지 못하는 아내에게 마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부부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을 얘기하는 트래비스. 아내가 가정을 버린 이유가 자신의 소유욕과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는 트래비스의 말을 통해 남편임을 알게 되는 아내 제인. 트래비스는 결국 아내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아들과 함께 묵었던 숙소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나서 다시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난다.

〈파리 텍사스〉의 음악은 영화의 보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적인 가치를 충분히 보여준다. 일단 영화를 보고나서 사운드트랙을 감상해 보라. 특히 'I Knew These People'을 듣노라면 분명 가슴 속에 담아뒀던 슬픔이 눈물이 되어 울컥 쏟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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