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본 한 편의 영화에 사로잡힌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언젠가 자신이 영화감독이 되면 이 매혹적인 영화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보리라 결심한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정말 영화감독이 되었고, 마침내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게 된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만든 피터 잭슨 감독이며, 어린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영화는 메리안 C 쿠퍼가 만든 1933년작 〈킹콩〉이다. 종이와 헌옷가지로 이 기이한 괴수의 인형을 만들며 자신의 욕구를 달래야했던 소년의 꿈이 디지털 기술과 막강한 자본의 힘을 빌어 실현된 것이다.
***원작에 충실한 피터 잭슨의 〈킹콩〉**
야수에게 제물로 바쳐진 미녀, 그리고 그녀에게 매혹당한 야수의 슬픈 운명을 다룬 영화 〈킹콩〉에 매료된 사람이 비단 피터 잭슨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1933년의 원작은 아니었지만, 1976년에 리메이크된 존 길리엄 감독의 〈킹콩〉에서도 뉴욕을 초토화시키던 킹콩의 모습과 괴수에게 제물로 바쳐진 제시카 랭의 치명적인 매력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도 선명하게 새겨져있다. 따라서 2005년에 다시 리메이크된 〈킹콩〉은 피터 잭슨의 꿈의 실현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추억을 되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소재를 다시 다루는 일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팀 버튼의 〈혹성탈출〉, 이안의 〈헐크〉의 경우를 생각해보아도 원작의 아우라에 도전하는 일이 녹록치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리메이크작품에 도전했던 이 두 감독은 원작의 매력을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했다. 피터 잭슨은 원작에 도전하기보다는 원작을 철저히 존중함으로써 원작 숭배자들의 비판을 비껴간다. 그는 1933년의 원작을 기초로 뼈대를 세우고 여기에 약간의 상상력과 약간의 볼거리를 덧붙인다. 그럼으로써 그의 〈킹콩〉은 이제까지 어떤 리메이크 영화보다도 원작에 충실한 영화가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킹콩〉은 1976년에도 리메이크 된 바 있지만, 피터 잭슨은 이 1976년판을 훌쩍 뛰어넘어 원전과 직접적인 교류를 시도한다. 그 결과 1976년 영화에서 수정되거나 생략되었던 부분들이 피터 잭슨의 영화 속에서 다시 복원된다. 예를 들어 원작의 무대를 1970년대로 옮겨오는 방식을 선택한 1976년판에서 킹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아닌 세계무역센터를 기어오르지만, 피터 잭슨의 영화에서 킹콩은 다시 1930년대 뉴욕의 상징이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기어오른다. 또 1976년판의 주인공들은 석유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지만, 2005년판 〈킹콩〉의 주인공들은 원전과 마찬가지로 모험 영화를 찍기 위해 항해를 떠나는 영화 촬영팀으로 설정되어 있다. 원전에 대한 피터 잭슨의 오마쥬가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다. 감독은 엔딩 크레딧의 문양마저도 1933년도 RKO에서 제작된 원전의 문양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2005년판 〈킹콩〉을 1933년의 원작과 비교해보는 일은 이 영화를 보는 또다른 재미이기도 하다. 차근차근 공통점과 차이점을 짚어가노라면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이 어린 피터 잭슨을 사로잡았는지, 소년의 몽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 새로운 킹콩이 태어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녀와 야수의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
원작 〈킹콩〉은 괴수영화 혹은 공포영화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어린 피터는 이 영화를 치명적인 러브 스토리로 받아들인다. 물론 원작도 '미녀와 야수'의 운명적 사랑이라는 모티브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원작의 여주인공 페이 레이에게 '비명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선사할만큼 1933년의 〈킹콩〉은 이 거대한 괴물 고릴라에 대한 공포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피터 잭슨의 여주인공 나오미 왓츠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킹콩과 일종의 정신적 교감을 나눈다. 킹콩이 자신을 해하려는 뜻이 없음을 이해하는 순간 여인은 이 야수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그의 친구가 된다. 원작에는 없었던 놀이장면, 킹콩의 품에서 편히 잠든 여인의 모습 등은 피터 잭슨이 '미녀와 야수'의 사랑 이야기를 좀 더 강조하고 싶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장면들이다. 이 영화를 완벽한 러브 스토리로 만들기 위해 감독은 여기에 또 하나의 사랑을 포개놓는다. 바로 여주인공 앤 대로우와 극작가 잭 드리스콜 간의 사랑이야기다. 그럼으로써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야수와 예술가의 삼각관계가 완성된다.
어린 피터의 상상은 여기서 더 나래를 편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일까? 그녀는 어디서 왔을까? 원작은 감독 칼 덴햄과 여배우 앤 대로우의 우연한 첫 만남을 아주 간략하게만 보여준다.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원작은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소년에게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할 무엇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이렇게 상상한다. 그녀는 배우였다. 그것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희극배우. 어렵고 힘들어도 자존심을 잃지 않으며,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모두가 생기를 얻는 그런 여인. 누구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여인이었기에 야수마저도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라고..... 원작에 비해 1시간 이상 길어진 피터 잭슨 영화의 전반부는 대부분 이 사랑스런 여인을 묘사하기 위해 바쳐진다.
***야수와 연적이 된 예술가**
그녀를 사랑할 야수를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첨단 그래픽 기술과 〈반지의 제왕〉의 골룸을 탄생시켰던 '웨타디지털'사의 노하우를 총동원한 피터 잭슨은 야수의 연적이 될 잭 드리스콜의 캐릭터에도 손질을 가한다. 원작에서 다소 마초적인 항해사로 그려진 잭의 캐릭터에 불만을 느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는 그를 감수성 예민한 재능 있는 극작가로 바꿔놓는다. 야수와 예술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둘 다 순수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애정다툼은 좀더 흥미진진한 구도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런 애정구도 속에 피터 잭슨은 열정적이면서도 독단적인 영화감독 칼 덴햄을 슬쩍 끼워넣는다. 원작에서 다소 중립적인 화자(話者)에 가까웠던 칼 덴햄은 피터 잭슨의 영화 속에서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로 설정된다. 그는 과도한 열정으로 동료들을 희생시키고, 끝내는 뉴욕을 초토화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막무가내이고 독단적이긴 하지만 결코 미워하기는 쉽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이다. 피터 잭슨 감독은 이 감독의 캐릭터를 통해 소년 시절의 꿈이 실현하는 장소에 슬쩍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피터 잭슨의 〈킹콩〉은 막대한 제작비나 놀라운 테크놀로지만으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색다른 즐거움은 이 영화를 통해 70년 전에 만들어졌던 한 편의 영화와 그 영화가 만들어졌던 세상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두 편의 영화 위에 다시 나의 유년의 기억이 겹쳐질 때 이 영화가 선사하는 뜻밖의 즐거움은 더욱 각별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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