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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올리버 트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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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올리버 트위스트

[김이석의 올드 & 뉴]로만 폴란스키 〈올리버 트위스트〉와 캐롤 리드의 〈올리버!〉, 데이비드 린의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영화와 TV 시리즈 등으로 각색되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만한 작품은 데이비드 린, 캐롤 리드, 로만 폴란스키의 작품이다. 세 명의 감독 중에서 런던 빈민굴을 무대로 한 고아 소년의 이야기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감독은 데이비드 린이었다. 문학작품의 각색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가진 데이비드 린 감독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946)에 이어 〈올리버 트위스트〉(1948)를 연출함으로써 디킨스의 초기 대표작과 후기 걸작을 모두 스크린으로 옮긴 감독으로 기록된다.

데이비드 린은 이 방대한 원작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최대한 원작의 인물과 사건을 훼손시키지 않음으로써 디킨스의 원작에 가장 충실한 서사구조를 가진 작품을 만들었다. 그 대신 이 감독은 원작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사회비판적 시선을 덜어내고 올리버의 출생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강조함으로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상승시킨다. 데이비드 린에 이어 디킨스 소설의 영화화를 시도한 감독은 〈제 3의 사나이〉(1949)를 연출한 캐롤 리드 감독이다. 1960년에 초연된 라이오넬 바트의 동명 뮤지컬을 각색한 캐롤 리드의 〈올리버!〉(1968)는 런던의 빈민굴을 헐리우드 뮤지컬에 어울리는 모험의 공간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과감한 재해석이 돋보이는 로만 폴란스키의 〈올리버 트위스트〉**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로만 폴란스키의 〈올리버 트위스트〉(2005) 역시 캐롤 리드의 작품에 못지않게 원작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폴란스키의 방식은 디킨스의 문제의식을 좀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예를 들어 폴란스키는 이 영화에서 디킨스가 당대 사회구조와 지배계급에 대한 맹렬한 분노를 표현하기 선택했던 냉소적인 유머 대신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묘사를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폴란스키는 데이비드 린과 캐롤 리드의 영화에서 약화되었던 디킨스 특유의 사회악에 대한 분노, 노동계급의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문제들을 다시 영화의 중심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감독의 명성만큼이나 개성 넘치는 이 세편의 〈올리버 트위스트〉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는 런던이라는 공간에 대한 묘사에서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이 시기의 영국은 근대화의 모순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공업화로 인해 노동 계급과 도시 빈민이 양산되고 있었으며, 대도시 곳곳에서는 빈곤과 착취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데이비드 린은 이 19세기 초반의 런던을 상징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표현주의풍의 조명과 미술을 통해 재현된 런던은 소외된 존재들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의 도시다.

세인트 폴 성당의 압도적인 모습과 버림받은 인간 군상들의 왜소한 모습의 대조를 통해 데이비드 린은 당시의 런던을 잠재적인 위협이 상존하는 공간으로 재현한다. 데이비드 린 영화의 뛰어난 상징성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아래서 비틀거리며 나타나는 올리버의 생모의 모습을 통해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암시하는 도입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캐롤 리드의 영화에서 런던은 활기차고 스펙터클한 도시로 묘사된다. 전형적인 뮤지컬의 집단 가무와 휘파람이 어울리는 도시 런던은 낯설지만 새로운 모험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밝고 화사함을 간직한 캐롤 리드의 런던에서 올리버는 불우한 고아가 아니라 오즈의 성을 찾아가는 유쾌한 모험가가 된다. 하지만 유태인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살아야했던 로만 폴란스키는 디킨스의 작품이 아이들의 동화로 읽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폴란스키는 디킨스가 공들여 묘사했던 런던의 풍속도를 그대로 재현한다. 아니 더 나아가 폴란스키는 디킨스의 소설에서 풍자적인 웃음마저도 제거해버린다. 그 결과 그의 영화 속에서 런던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연구하기 위해 머물던 시절의 습하고 추악한 도시로 되살아난다.

***생존 앞에서 무력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냉정한 묘사**

디킨스의 원작에 대한 폴란스키의 재해석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소매치기 무리의 두목인 페이긴이라는 문제적 인물에 대한 묘사다. 원작에서 이 유쾌한 (디킨스 특유의 냉소적 묘사이긴 하지만) 유태인은 올리버를 위기에 빠뜨리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오갈 데 없던 소년을 죽음의 늪에서 건져낸 인물이기도 하다. 디킨스는 소설의 결말에서 이 유태계 노인에게 교수형을 선고하면서도 동정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이 이중적인 인물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를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 바 있다. 디킨스의 소설을 각색함에 있어서 미스터리의 구조에 비중을 둔 데이비드 린은 페이긴이라는 인물을 상대적으로 단순화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이 인물은 돈의 노예이며 올리버가 겪는 불행의 원인제공자이다. 감독은 이 용서받지 못할 악인에게 비참한 죽음을 준비해놓는다. 캐롤 리드의 영화에서 페이긴은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된다. 〈올리버!〉에서 페이긴은 말 그대로 악의 없는 악당이며, 그가 지휘하는 소매치기 집단은 서커스단처럼 유쾌한 집단으로 그려진다. 이 집단에서 소매치기는 일종의 놀이며 그 일당들이 저지르는 일탈적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 모험이자 유희다. 캐롤 리드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페이긴에게 처벌 대신 새로운 여행을 떠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 유쾌한 유태인이 간직한 순수함을 보상해준다.

이 두 감독의 해석 역시 독창적이지만 그들은 디킨스의 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 디킨스가 유보시켰던 페이긴에 대한 최종 판단에 대해 답변을 제시하는 것은 로만 폴란스키다. 그의 영화에서 페이긴은 악인이라기보다는 비주류적인 방식으로 세상에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영민한 생존력으로 사회의 그늘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자이며,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생존의 방식을 집단화하는 인물이다. 그 방식은 정의로운 삶과는 거리가 있지만 적어도 시민계급이 노동계급에게 강제하는 방식(예를 들어 빈민구호소)보다는 더 인간적인 방식이다. 페이긴이 비록 끔찍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는 비정상적인 사회가 탄생시킨 기형아로서 동정 받을 가치가 충분한 존재이며, 용서받지 못할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심마저 앗아가는 물화된 사회라는 것이 폴란스키가 디킨스의 원작에서 찾아낸 최종적인 답변이다.

* 덧붙임 :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에서 이처럼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의 6,70년대의 작품들에 매료된 사람들에게는 생경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치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었으며, 68혁명 당시 프랑스의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투쟁에 나섰던 그의 개인사를 생각해본다면 〈피아니스트〉나 〈올리버 트위스트〉 역시 폴란스키의 영화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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