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서 있던 사내는 남장을 하고 섰지만 사내가 아니라, 춘섬이 육례원에 들어오기 여러 해 전부터 와 있어 허균도 익히 아는 기생 홍주였다. 홍주는 춘섬 곁으로 걸어와 남정네처럼 절을 하고 앉아서 입을 열었다.
"제가 그날 그 방에 들었다가 나으리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아는 어르신들 이름이 나와서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나랏님께서 나라에 출입을 허락해 달라는 왜인들의 청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한데, 그 전에 사람을 대마도를 보내 왜인들이 과연 지난번처럼 우리나라를 쳐들어올 것인지 아닌지 살피시기로 하셨는데, 대마도에 가서 적정을 살필 탐색사로 발탁된 분이 바로 송운 큰스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내내 비장한 기운이라 진짜 남정네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더니만, 송운, 큰스님, 이렇게 말할 때 결국 속에서 울음을 퍼올리는 여자 음색이 완연해졌다.
"송운 큰스님을 대마도로 가는 탐색사로 뽑으셨다고?"
허균의 머릿속으로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말에 오르던 유정의 긴 수염이 떠올랐다. 그게 십수 년 전 서애 유성룡 공의 집 앞에서였는데 유정 스님을 떠올릴 때는 어째서 그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이어 허균은 형 허봉이 이승을 하직했을 때 빈소로 찾아와 마치 속가의 사람처럼 비통해 하며 통곡하던 유정의 모습도 떠올렸다. 허균은 속으로 죽은 형의 나이를 헤아렸고, 그러고 나니 자기 나이가 어느새 서른 후반이라는 사실이 새삼 뼈아프게 느껴졌다.
"유정 스님의 연세가 속가 연치로 작년에 갑년을 넘기질 않으셨는가!"
허균의 탄식을 홍주가 바로 맞받았다.
"그렇습니다. 송운 큰스님의 연세 올해 예순하나이십니다. 그런 분이 왜의 소굴로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서삼경을 터득하고 대국의 정세를 눈 밝게 읽으시는 선비들이 그득한 조정에서 정승, 판서 다 젖혀두고 불가에 귀의해 큰 깨침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계시는 큰어른을 불러......"
"어험, 듣기 거북하구나!"
허균의 입에서 마침내 "네 이년!" 하는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천한 기생의 입으로 어쩌다 정승 판서하고 이부자리 농짓거리는 할 수 있어도 국정이 어쩌네 나랏님의 명이 어쩌네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춘섬마저도 홍주를 보며 입을 막아 보려는 몸짓이었다. 홍주는 그러나 별로 몸을 사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송구하옵니다. 송운 큰스님은 이미 왜란 때 목숨을 수십 개나 던져서 구국을 하신 분입니다. 이제 회갑을 넘긴 그런 어른한테 또 다시 목숨을 내놓으라니 겉으로 대의명분을 내세워 구국충정한다 큰소리만 치고는 왜란 때 힘 한 번 못 쓰고 이 나라 도성에 대궐까지 내놓고 달아나던 분들이 이젠 왜란을 뒷수습하는 일까지 노인에게 맡기고 다 어디 가 계시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허균이 호통을 치는 대신 "허!" 하고 실소를 하고 만 것은 아무래도 국정에 전혀 간여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 때문이라고 봐야 옳았다. 비루한 행색으로 식솔을 이끌고 피난을 가면서도 먹을 때가 되면 다 젖혀두고 혼자 나무수저를 들곤 하던 자신이 부끄러워 아내와 자식을 잃고 난 한때 먹기만 하면 토하는 증세를 보이기도 했던 그였다.
"허허, 춘섬아! 니 언니란 자가 아주 작정을 하고 날 찾았구나. 언니의 말이 나처럼 먹물만 많이 먹은 사람들 가슴을 바늘처럼 콕콕 찔러!"
춘섬도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홍주가 대단해보여 혀를 내둘렀다.
허균은 한참만에야 육례원 행수 도원이 굳이 홍주와 춘섬을 급히 자신에게 보낸 연유를 알아차렸다.
도원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유정 스님을 따르는 소문난 보살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유정 스님이 도성에 들 때는 처소를 마련해 주기도 했고, 도성 가까운 봉은사에 머물 때는 아예 홍주를 데리고 봉은사에 가서 지내다시피 했다. 이제 유정이 회갑을 넘긴 연세로 대마도로 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도원의 생각일 터였다. 그 간절한 뜻을 전하자면 홍주가 제일이었고, 또 춘섬이라면 허균이 행동으로 나서게 할 수 있을 거라 계산했을 거였다. 홍주는 사내 종 하나와 함께, 아직 어린 춘섬을 에워싸고 여복도 하고 남복도 하면서 나귀를 타고 허균을 찾아 강릉까지 온 거였다.
홍주는 매조지듯 다시 말을 이었다.
"미천한 것이 알아 뫼시기로, 나으리께서는 오래 전부터 송운 큰스님과 교분을 두텁게 쌓아 오셨습니다. 큰스님 성품으로 늙은 불자라 하여 나랏님의 뜻을 저버리기는커녕 도리어 횃불을 들고 불속으로 들어가실 분이시지 않습니까? 하나, 이제는 평평한 땅 위를 걷는 것도 조심해야 할 연세이십니다. 큰스님을 만류하실 분으로는 나으리만한 분이 없으시다고 행수 어른이 그러셨어요. 부디 큰스님을 만류해 주십시오. 간청드리옵니다."
"너와 행수의 뜻은 그만하면 알았다. 하나, 내가 송운 큰스님을 평소 존경하고 또 때로 가까이 모시기도 하지만 그분의 깊은 뜻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리겠으며, 만일 내가 만류한다고 해서 그런 분이 한 번 굳힌 뜻을 쉬이 굽히려 하시겠느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 어른을 만나서 과연 적의 소굴로 가실 뜻이 있으신지, 가실 뜻이 있으시면 아무리 왕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연로하신 몸으로 그렇게 꼭 가셔야 하는지 여쭙기만 할 뿐이겠구나! 그것도 송운 큰스님이 벌써 도성에 드셔서 왕명을 받은 연후라면 늦은 일일 것이고."
"그러기에 저희가 이렇게 촌각을 아껴 달려온 것이 아니옵니까. 송운 큰스님은 일전에 봉은사에 다녀가신 뒤에 금강산 유점사로 가셨고 그 후도 고성의 건봉사에도 들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얼마 전 전해 오기로는 이즈음은 오대산에 계신다고 하십니다. 큰스님께서 오대산하고는 인연이 깊어 동안거나 하안거를 드실 때면 자주 오대산으로 찾으신 걸 나으리께서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 연재됩니다)
* 이 소설을 무단으로 다른 사이트로 옮겨 가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