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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愛日堂)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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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愛日堂) (3)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3>

허균은 왜란 나기 몇 해 전에 일어난 정여립 옥사 때 유정이 이에 연루되었다 해서 원주에서 명주(강릉) 관아로 끌려가 봉욕을 당할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유정의 스승 서산대사 휴정이 쓴 시였다. 휴정이 금강산 향로봉에 올라간 감회를

모든 나라의 큰 성(城)들은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들은 또한 하루살이 초파리일 뿐


이라고 시작되는 시에 담은 적이 있었다.

화려하고 웅장해 보이는 것들, 권세와 명예로 낯을 빛내는 사람들, 그런 게 다 인간의 헛된 욕심에서 그리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경계의 뜻을 드러낸 시였다. 그걸 무업이라는 승려가 정여립의 모반에 동조하는 시라고 무고를 해서 휴정은 물론이고 그 제자인 유정까지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 전해에 형 허봉이 죽고, 그 해 3월 누이 허난설헌이 죽는 일을 당한 허균이 마음을 둘 데 없이 떠돌다가 오대산에 머물러 있던 유정을 만나고 온 도성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유정은 월정사에 딸린 영감난야에서 참선을 하고 있다가 포졸들한테 끌려갔는데 허균이 이를 뒤늦게 알고 강릉의 외가 식구들에게 급히 파발을 보냈다. 한데 그 파발이 닿기도 전에 반곡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과 유생들이 먼저 유정 스님의 무고함을 탄원하는 연명부를 작성해 강릉 감영으로 몰려가 있었다.

"송운 스님에게 오라를 매기는커녕 형방 이하 모든 군뢰들이 스님의 설법을 오래 듣고자 하루를 주무시고 가시게 한 형국이었네."

나중에 외사촌이 그렇게 전해왔다. 유정이 누명을 벗었음은 물론이다. 유정은 그 뒤로 동안거 때나 하안거 때는 주로 월정사에 딸린 영감난야를 찾곤 했다.

"나으리께서 오대산에 들러 송운 큰스님께 들러보시지요. 그러고 나서 도성으로 행차하시면 제가 버선발로 마중을 나가겠습니다요."

춘섬의 말에 웃으며 한참 고개를 끄덕이던 허균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너희들,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비록 귀하든 천하든 유자든 불자든 가리지 않고 사귀고 존경하며 살아서 너희 행수와도 만만하게 지내고 있고, 게다가 낙향해서 이 누추한 곳에서 외가 힘을 빌려 지내고 있다만, 아무리 급한 일이고 또 도성에서 왔다 해도 여기는 너희 같은 기녀들이 함부로 드나들 곳도 아니고, 또한 너희들이 와서 훈계를 하고 있을 집도 아니야. 너희들이 송운 큰스님을 위한답시고 나라 다스리는 어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 돌아다니다가는 큰스님께 도리어 큰 해가 될 것임을 알아야지."

뜨끔해진 춘섬이 슬쩍 홍주를 꼬집듯이 눈빛을 돌렸다가 이내 허균에게 야속하다는 눈빛을 보내 왔다.

"아이 참, 나으리도! 저희가 그런 눈치도 없이 이리 먼 길을 찾아왔을까요. 행수 어른 말이 나으리께서 큰스님이 대마도로 가시는 걸 막지 못하시면 방도는 한 가지밖에 없다 하셨으니, 이는 나으리께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요."

"방도가 한 가지밖에 없고, 내가 또 책임을 져야 한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살짝 흘기는 춘섬의 눈에 물기가 비치는 듯했다.

"큰스님께서 일본으로 가시면, 저도 따라가야 한다고……"

"뭐라고!"

실소도 화도 아니었다. 허균은 정말 놀랐다. 허균의 마음을 쏙 빼놓는 춘섬이 그 험한 뱃길을 건너 대마도로 가게 된다는 걸 실제 믿고 상상해서도 아니었다.

왜란 때 진주에 살던 논개라는 기생은 왜장의 몸을 끼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들었다. 평양 기생 계월향은 자기가 섬기는 장수를 도와 왜장을 유인해 목을 벴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아닌 기생이었다. 세상에 그런 기생들과 같은 기생이 진짜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육례원의 기생들이, 참으로 온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며 늙어간 한 중을, 이렇듯 진심을 다해 아끼고 섬기고 있었다.

허균은 잠시 목이 탔다.

그때 뜻밖에도 홍주가 불쑥 말했다.

"저희가 불쑥 찾아와 나으리를 어지럽게 한 걸 사죄드리는 뜻에서 나으리 몸 편치 않으신 데다 침을 놓아 드려도 되겠는지요?"

그러자 허균은 아픈 몸 구석이 소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침을? 어디서 침술을 배웠더란 말이냐!"

"송운 큰스님을 따르다 큰스님의 한 제자분께 배워 그때그때 기방에서 써먹었는데, 꽤 효험을 보았습니다. 그걸 믿고 나으리를 편히 해 드리려는 뜻이지, 나으리 옥체를 업수이 여겨 드리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뵈올 때부터 나으리 어깨가 불편하신 듯해서 버릇없이 나섰습니다. 고깝게 생각되시면 아주 꾸짖어 주십시오."

"언니, 우리 나으리가 이런 걸로 고깝게 여기시겠어? 그렇지 않사옵니까, 나으리. 어서 옷고름을 푸시고 언니한테

어깨를 맡겨 보세요."

춘섬이 마치 허균의 첩이라도 된 양 허균에게 다가왔다. 허균이 못 이기는 체하고 옷고름을 풀고 어깨를 드러내 보이려는데, 홍주의 말이 들려왔다.

"옷을 내릴 것까지는 없사옵니다, 나으리. 이 침은 수족에만 놓는 침입니다."

작가 노트
<홍길동전>의 허균이 사명대사의 비문을 지은 까닭은?
▲ 허균평전ⓒ프레시안

사명대사 비의 비문을 쓰고, 또 사명대사의 문집 <사명집(四溟集)>의 서문을 쓴 사람은 우리에게 <홍길동전>의 작가로 잘 알려진 허균(1569-1618)이다. 두 사람은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사명대사는 승려였지만 조선 중기의 문인, 학자, 정치인들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선조 시대 무수한 문인들과 그가 화답한 시문이 오늘에 전하고 있어 이를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사명대사와 친했던 인물이 허봉(1551~1588), 바로 허균의 둘째형이었다. 그 아래가 유명한 여성시인 허난설헌. 허봉은 교리(校理), 전한(典翰) 등의 벼슬을 하던 중에 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했다가 오히려 귀양살이를 했고 이 이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방황하다가 병들어 죽는다.

허균은 1586년 형 허봉을 따라 서울 봉은사에 가서 마중나온 "법체가 훤출하고 그 용안이 엄숙한" 사명대사를 처음 만난다. 이후 허균은 사명대사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허균은 사명집 서문에 "서울에 오시면 언제나 왕래하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됨을 한탄했다"고 적고 있다. 허균이 유학자답지 않게 불교에 심취한 것이, 어쩌면 사명대사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하는 짐작도 가능해진다. 허균은 광해군 때 역모를 꾸민 혐의로 사형당한다. 나는 <소설 사명대사>를 쓰기 위해 여러 자료를 뒤적이다 허균이라는 존재를 재발견하게 되었고, 그만 허균을 알아가는 재미에 한참 빠져 <소설 사명대사>를 접어두고 광해군 때의 허균 처단 사건을 주요 소재로 하는 역사소설 집필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 소설은 물론 미완성이다. 허균 얘기를 살피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책을 여기에 소개한다. 꿈속에서도 허균을 만나곤 한다는 허경진 교수(연세대)의 <허균 평전>(돌베게, 2002)이 그 책이다.(2008.1.)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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