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기는 했다.
국왕을 배알하고 여러 대신들과 매화가 만발한 종묘 앞을 걸어갔는데 어느덧 서애 유성룡의 집이었다. 이덕형의 얼굴도 보였고, 죽은 허봉도 살아생전의 건장한 모습으로 함께 해 있었다. 불현듯 허봉이 유성룡의 집 사랑의 뜨락에서 매화 한 가지를 꺾어와 유정에게 무슨 설명을 하는데, 다른 이들이 전혀 불쾌해 하는 빛이 없었고 유정이 그 꽃을 두고 시를 읊자 다들 감탄해 했다. 유성룡이 미소를 머금고는 짐짓 모른 체 뒷짐을 지고 먼데 산을 바라보았다. 시의 내용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런 꿈을 꾼 사실도 점심 공양을 하고 마당에 내려섰을 때 먼 아래 상원암 쪽에서 취혜가 못 보던 행자 하나를 거느리고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떠올렸다.
유성룡은 왜란 직후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아예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서는 임금이 여러번 찾는데도 병을 칭하고는 상경하지 않았다. 당연히 유정과도 뜸해져서 한 해에 겨우 한 차례 정도 서신만 주고받으며 지냈다. 무슨 기별이 올 거면 조정에서거나 아니면 이항복이나 이덕형 같은 중신들의 집에서겠거니 했다. 왜란이 평정된 후에도 유정은 당상관의 지위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라는 직책으로 도성에 있어야 했다. 유정이 이번에 금강산과 오대산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지난 해 겨우 청을 드려 윤허를 얻은 덕분이었다.
취혜가 전하는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큰스님, 묘향산에서 온 행자가 한 식경 전에 당도했습니다. 서산대사께서 지난달 입적하셨다 하옵니다."
함께 온 행자가 가쁜 숨을 미처 다 고르지도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가부좌를 트신 채 조용히 입술을 움직이시면서 말씀을 받아 적게 하시고, 그 말씀이 다하는 때 입적하셨습니다."
무수한 주검을 접하고, 그토록 오래 수행을 했으니 이제는 이런 느낌이 드는 때가 없으리라 싶었는데, 아직 아니었다. 서산대사 휴정 입적. 언제고 닥칠 일이라 속으로 셈을 하고는 있었으되, 가슴을 쿵 하고 치고 가는 울림이 이처럼 둔중할 줄 몰랐다.
유정이 서산대사 휴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지난 해 여름 금강산 유점사에서였다. 소식(小食)이기는 해도 공양 때 밥알 한 톨 남기지 않으셨고, 힘에 부친 듯하면서도 말씀을 하실 때 가끔씩 눈썹이 일어나는 듯한 기색은 여전해 보였다. 유정이 이제는 국왕의 부름에 그만 응하려 한다는 뜻을 밝히자 휴정은 떠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절에 있건 저자의 진흙구덩이에 있건 중의 몸이 어찌 그 누구의 것이겠느뇨. 중생을 구하고자 창칼을 들고 저자에 나섰던 몸을 숲이 가릴 것이며 구름이 가릴 것인가. 이 나라 중생이 언제 또 전란과 화마에 휩쓸리지 모르니, 언제든 가서 구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또한 부처의 뜻일 터!"
딱히 다시 변란이 있을 조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내내 알 수 없었다. 유정은 유점사를 떠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가는 서산대사의 손을 오래오래 붙잡았다.
"제가 내년 봄에는 묘향산에 가서 꼭 시봉하겠습니다. 그때까지 편히 지내십시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번에 오대산을 나서면 금강산에 다시 한번 들렀다 도성으로 가서 국왕을 배알한 다음 묘향산으로 가리라 마음을 다잡아 왔다. 그런데 그 스승 서산대사 휴정의 부음이 날아든 거였다.
모든 인연이 다 그렇기는 하다지만, 유정에게 있어 서산대사만큼 특별한 인연이 된 존재는 다시 찾기는 어려웠다.
유정을 가르친 스승으로 치면 어릴 때 모신 황여헌 선생이 계셨고, 부모를 차례로 여읜 뒤 열여섯에 직지사로 출가하면서부터 계를 내려주시며 큰 가르침을 주신 신묵화상이 계셨다. 신묵화상의 인도로 알게 된 보우대사는 유정을 이 나라 불교의 중심으로 이끈 분이셨다. 보우대사가 머물던 봉은사에 드나들면서 알게 된 재상 노수신은 불교에 경도해 있던 유정을 유학의 세계로 인도한 분이셨다.
이렇듯,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깊고도 넓게 가르침을 주고 깨침을 얻게 한 훌륭한 스승들 덕분에 유정은 불교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점차 남의 따름을 받는 스승의 지위에 올라갔다. 직지사 주지가 되면서 법회를 주도하게 되자 경상 일대 사람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려 몰려왔다. 오대산, 금강산, 설악산 일대의 절은 유정이 다녀갈 때마다 반상 구분 없이 많은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또 한 분의 스승을 모셨으니 그분이 서산대사였고, 그분이야말로 유정의 운명을 전혀 다르게 바꿔 놓으신 분이었다.
서산대사는 이 나라 불교의 법맥을 정통으로 잇고 세운 인물이었다. 서산대사 직전에 그런 역할을 한 분이 보우대사였다. 보우대사는 지금 국왕의 선대인 인종, 명종 대에 왕실과 내명부들의 특별한 보살핌 아래 불교를 중흥시킨 큰 인물이었다. 과거제도에 선과를 다시 개설하고, 승려의 신분을 보장하는 도첩제를 부활케 한 사람이 그였다. 이미 선사의 반열에 들어서 있던 서산대사는 기꺼이 그 부활된 선과 시험 첫 해에 과장에 나가 급제함으로써 제도 개편으로 불교를 중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숭유억불의 시대에 불교 중창을 주도한 주역 보우대사는 오래지 않아 전 유림의 배척을 받았고, 끝내는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제주목사에게 장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 빈 자리를 서산대사가 이었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그 법맥은 신라의 원효, 의상, 자장과 신라 말의 구산선문 조사(九山禪門祖師)들, 보조, 지눌, 지공, 나옹 혜근, 무학 자초 등으로 고려와 조선 초까지 그 중심을 이어왔다. 이 법맥을 이은 사람이 바로 서산대사라고 보는 것이 후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견해다. 한편으로, 서산대사의 이후 법맥을 이은 선사들은 이와는 달리 이 나라의 법맥을 중국 임제종에서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 普遇)로 이어 이후 환암 혼수, 등계 정심, 벽공 지엄, 부용 영관을 거쳐서 청허 휴정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떻든 조선 시대, 특히 조선 중기의 불교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 서산대사라는 사실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서산대사는 숭유억불을 실천하는 조정 대신들과 유학자들과 때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때로 학문적으로 교유함으로써 보우대사가 비명횡사하면서 끊어지는 듯했던 이 나라 불교계의 법맥을 되살려냈다.
서산대사는 그런 존재였다. 그 이름 앞으로 많은 불도들이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묘향산으로 찾아가 엎드렸다. 유정이 서산대사 휴정을 직접 만난 것은 열여덟 살의 나이에 봉은사에서 열린 선과에 응시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시험에 몰두하느라 의식을 못했지만 시험이 끝나고 사방을 둘러볼 여유를 가졌을 때 비로소 보우대사를 비롯한 여러 큰스님들이 줄지은 말석에 앉은 휴정이 눈에 들어왔다.
선과에 급제한 유정은 이후 십수 년 동안 직지사, 회암사, 봉은사 등을 오가며 수행을 하는 틈틈이 재상 노수신의 집을 드나들며 노자, 장자, 문자, 열자를 비롯해서 무수한 유교의 경전을 공부했고, 한편으로 당송의 문장을 익혀 자주 시문을 뽐내곤 했다. 불가에 몸을 담지 않았으면 어쩌면 유정은 일찍 문과에 등과를 하고 관의 부름을 받아 날로 벼슬이 높아졌을 것이다. 유정에게는 불교와 유교가 따로 한껏 깊어져 있는 데서 서로 경계 없이 소통하는 학문으로 함께 이해되기도 했다. 노수신을 찾아오는 많은 학자들이며 선비들과 자연스레 시문을 화답하며 친해지는 게 조금도 이상할 게 없었다. 퇴계 이황의 문하이면서도 이황과 사단칠정의 이론으로 8년간이나 격론을 벌인 기대승이 유정을 두고 불가에 든 것을 안타깝게 여긴 일화가 일찍부터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유정은 위로는 박순으로부터 유성룡, 이산해를 비롯, 이달, 최경창, 임제, 이항복, 허봉, 이덕형, 이익지 등과도 교분을 깊이 쌓았다. 허봉을 통해 알게 되어 또 각별한 인연을 쌓은 허균은 스물다섯 살이 아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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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정도 서른두 살 되던 해에 묘향산으로 찾아가 서산대사 문하에 승방입실을 해 누구보다 돈독한 제자가 된 것이다. 사대부가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해 가던 서른둘의 유정이 그 법력에서 그때껏 불교계의 양대 법맥인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면서 마침내 조선 불교의 큰어른으로 군림하고 있던 서산대사 휴정의 문하가 된 일은 두 사람의 운명이나 나아가 조선의 불교계, 더 나아가 조선의 역사에 있어 일대 사건이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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