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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2)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5>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으니
  죽고 살고 오고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휴정의 부음을 접하고 조상을 하기 위해 말을 타고 묘향산으로 향하는 내내 유정의 귀에는 서산대사 휴정이 마지막 남겼다는 게송 한 대목이 웅웅거렸다. 유정은 그 게송을 따라 외어 보았다. 구름이란 본시 실체가 없으니, 죽고 살고 오고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시종들과 함께 한참 동안 말없이 뒤를 따르며 유정의 입에서 흐르는 게송을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처럼 듣고 있던 해구가 말했다.
  
  "큰스님, 저는 서산대사께서 쓰신 시문 중에 이런 게 기억에 남습니다."
  
  유정은 흥미롭다는 듯이 해구를 돌아보았다.
  
  해구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눈 내린 들판을 밟으며 걸을 때는,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옮기지 말아라. 오늘 걷는 그 발걸음은 반드시 뒤에 걸어가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그래, 그 절구는 나도 자주 외워 보는 시라네."
  
  눈 내린 들판을 밟으며 걸을 때는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옮기지 말아라.
  오늘 걷는 그 발걸음은
  반드시 뒤에 걸어가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눈밭을 헤치고 길을 가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둘을 따르는 시종들도 눈밭 속으로 까무룩 스며들어갈 듯 조용했다. 눈 밟는 소리가 바드득바드득 났고, 간간이 부는 찬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우는 소리를 냈다.
  
  "스님, 제가 늘 궁금하던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해구는 용문산을 지나 양근(지금의 양평) 쪽으로 북상하는 길참에서 쉬게 되면서 문득 유정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스님이 휴정 큰스님께 가서 승방 입실을 하신 것이 바로 서른둘, 지금 제 나이입니다. 제가 여태 생각이 짦아서 이런 걸 여쭙게 되는 듯합니다만, 제가 스님 같았으면 말입니다, 휴정 큰스님과 따로 교분을 쌓았을지는 모르지만 굳이 승방 입실까지 해서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유정도 모처럼 입을 떼게 되어선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자네가 이제 나를 떠나고 싶은 게로구먼."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그럼 갑자기 나이 얘기를 왜 들먹이는 건가? 지금이라도 나를 떠나 자네 도량을 찾아가시게나."
  
  "스님 같으신 큰스님도 제 나이 때 다른 스승을 찾아 제자가 되셨는데 제가 어찌 감히 제 도량을 만들겠습니까?"
  
  유정이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러 갔을 때 두 사람이 서로의 법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벌였다는 전설 같은 선문답들은 속가 사람들뿐 아니라 스님들 사이에서도 그게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일 거라는 추측이 나돌 정도였다. 해구는 그런 얘기를 꺼내려다가 이내 말을 아꼈다.
  
  "서산대사의 법력이 대단타 해도 스님 또한 지위가 그에 못지않으셨는데 어째서 스스로 찾아가서 제자를 자청하셨을까, 그런 생각이 가끔 들어서입니다."
  
  해구는 열세 살 때 유정에게 수계를 받고 줄곧 유정을 따르며 지내온 제자였다. 마땅히 홀로 수행하고 만행하는 시간도 필요했지만, 도중에 왜란을 만나는 바람에 유정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보좌하는 것으로써 수행을 대신해 왔다. 그 덕분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칼을 휘둘러 피를 본 것은 그보다 더 많았다. 한편으로는 남이 모르는 유정의 소심한 내면을 읽기도 했지만 왜란을 다 지나고 나니 정말 이만한 큰 인물을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게 부처님이 맺어준 연이 아니겠나.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 나는 면벽 수행도 하고 묵언 수행에, 만행에, 수도하는 승려로서 해볼 것은 다 해보고 지냈지. 절 주지도 해보고 이 가람 저 가람을 돌려 설법도 해보지 않았겠나. 학문하고 문장 좋다는 뭇 선비들과 유학의 경전을 논하고 시문을 화답하기도 했지. 한데, 도무지 득도의 길은 아득하기만 했어. 겉으로 내 법력이 대단해 보였는지도 모르지만, 그 무렵 나는 화두를 안고 참선에 들어도 도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 애송이 땡중이었던 거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서산대사의 법문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단전으로 자꾸 힘이 모이는 것 같더란 말씀이야."
  
  그때껏 유정이 서산대사의 설법을 들은 것은 봉은사에서 한 차례뿐이었다. 유정이 만난 스님들의 설법은 주로 선과 교를 구분해 어느 한쪽의 타당성만을 강조하는 식이었다. 유정으로서는 배불을 당해 불교가 날로 괄시받고 있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회의가 만만치 않던 차였다. 물론 서산대사도 선종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 내막을 곰곰 따져보면 종파를 넘어선 부처의 원 가르침인 진성(眞性)을 설파하고 있었다. 서산대사는 말했다.
  
  "조그만 배를 타고 창해를 건너 만왕을 설복시키고 그의 헐벗은 수천 만 백성들을 고래 아가리에서 구한 것이 바로 대자비가 아니겠는가! 그 대자비가 보리반야의 종법이라, 감히 금석도 이를 뚫을 수 없고, 천둥 번개 또한 이를 범할 수 없고, 쇠 이마를 가진 소가 있어도 그 강함을 다툴 수 없도다! 이를 따르면 천당으로 오르고 이를 어기면 지옥으로 떨어지나니, 외를 심으면 외가 나고 종을 치면 종소리가 들리어, 한 생각의 인과(因果)가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나니, 그 법이 부처고 곧 인륜이다."
  
  남들이 종파를 말할 때 서산대사는 그 너머의 근원을 말하고 있었다. 남들이 그 너머의 근원에 부처가 있음을 말할 때 서산대사는 그 부처 있음 너머의 근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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