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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3)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6>

서산대사 휴정의 법문을 떠올리던 유정이 문득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스님, 새삼스러우십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의 예화는 말할 것도 없이 임제선사의 가르침을 전하는 말이다.

"임제종을 따르는 스님 치고 이 말을 하지 않는 스님은 없지. 그런데, 서산대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 말을 그냥 말이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부처를 죽이기는커녕 아직 부처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는 생각으로 결국에는 서산대사께 달려간 거지."

유정의 입에서 쉽게 서산대사 얘기가 풀려나오자 해구는 내친김이라는 듯이 한 발 더 내디뎠다.

"그렇게 서산대사께 나아가셔서 제자가 되셨으니 스님이야말로 우리 조선 불교의 법맥을 이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산대사께서는 스님을 절에 두지 않으시고 전장으로 나가시게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내가 전장에 나가서 죽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자네가 나를 따라 전장에 나갔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했는가?"

유정은 짐짓 꾸짖듯 해서 해구의 입을 막았다. 유정으로서도 내친 김에 시원스레 말이라도 풀어놓고 시름을 달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을 하자면 사연도 길어지고 그럴수록 서산대사 생각에 사무칠 것 같았다. 해구 또한 유정이 서산대사의 인도로 전장에 나간 것을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었다. 해구가 생각하기에도 서산대사와 유정의 교분은 참으로 부처가 맺어준 것이 아니라면 달리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왜군의 침략을 당한 임금은 궁을 버리고 북으로 몽진을 갔다. 위기에 몰린 임금은 서산대사를 불러내 8도16종 도총섭이라는 직첩을 주면서 승군을 일으키라 했고, 서산대사는 기꺼이 전 사찰에 승군 봉기령을 내렸다. 이에 강원도 건봉사에 머물러 있던 유정이 승병을 일으켜 서산대사 앞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두 사람의 돈독한 인연이었고 나아가 국운을 위한 인연이었다. 이후 서산대사가 물러나고 실질적인 8도16종 도총섭의 지위에 오른 유정은 평양성 탈환을 비롯해 여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유정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정은 전쟁의 종결을 위해 여러 차례 왜군이 쌓은 성안으로 들어가 적장 앞에서 목숨 건 설전을 벌여 명과 왜 사이에 고립되고 마침내 두 동강이가 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냈다.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과연 서산대사가 아니었으면 승군이 총궐기해서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치러낼 수 있었을까? 서산대사가 아니었으면 국왕이 승군을 총지휘하는 8도16종 도총섭의 지위와 그 실제적인 권한을 그 누구에게 주었겠으며, 또한 그 권한이 유정에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유정이 아니고 그 어떤 불자가 조정의 중심 대신들과 거리낌 없이 교통하고 명군과 공동전선을 구축해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을까? 서산대사와 유정의 만남은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고 불교계만의 것도 아니며 바로 우리의 국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왜란이 종결되고 6년이 지나는데도 국왕은 유정에게 당상관의 지위를 지키게 하고 도성 근처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정이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고부터 시작된 운명이 아직 그 끝에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해구도 몰랐고 유정 또한 몰랐다.
▲ 월정사 경내

용문산 기슭을 지나면서 날이 어둑해지자 유정 일행은 양근 오빈에 있는 어느 객줏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국밥을 청해 한 그릇씩 먹으며 주린 배를 채우고 있는데 멀리서 말울음소리가 어둠을 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해구는 마치 전장에서 유정을 보좌하듯 일행을 일으켜 세워 객줏집 마당으로 내려서서 사위를 경계했다.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와 함께 객줏집 안으로 밀려들어온 사람들은 뜻밖에도 관복을 입은 관원들이었다. 임금이 유정에게 내려 보낸 교지가 당도한 거였다.

"왜란이 끝나고 수년이 흐르는 동안 왜에서 문호를 열어달라는 청을 여러 번 했는데, 이제 그 답을 할 때가 왔다. 다만 왜국 정세를 몰라 답답하니 송운에게 그 소임을 맡기고자 한다. 속히 입궐하라."

선전관이 전하는 교지를 들으며 유정은 유성룡의 집 정원에 가 있던 간밤의 꿈속 일을 떠올렸다. 그 꿈은 결국 서산대사의 현몽이 아니라 여러 차례 정승의 지위에 오르며 국난을 견뎌온 유성룡과 조정 대신들의 현몽이었다.
"조정에 그렇게 사람이 없는지요?"

해구가 유정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리듯이 볼멘소리를 했으나 유정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스승께서 가시면서 내게 할 일이 더 남아 있음을 알리시는 모양이구나."

이튿날 유정은 도성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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