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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곡 이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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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곡 이달-(1)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7>

이달은 가야금 소리를 듣고 있는 게 아니었다.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떠밀려나가는 소리 끝에서 어떤 희끄무레한 기운이 아른대는 듯했다. 그런 기운 속에서 춤추고 널뛰듯이 노는 손놀림이 있었다. 파르르 떨 듯하는 저고리 앞섶이며 슬쩍슬쩍 까딱거려지는 고갯짓도 보였다. 가야금 소리에 손바닥이 무릎장단을 치고 콧노래가 흘러 절로 흥얼거리고 있는데도 이달은 소리에 취해 있지 않았다. 이달은 그 자태만 보았다.

"저한테 탄주를 하라 하시고는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는지요?"

탄주를 끝낸 춘섬이 무릎에서 가야금을 내려놓았다. 이달의 낯은 춘섬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눈길은 어디에 닿고 있는지 딱히 알 수 없었다. 워낙 사팔뜨기 같은 눈인데다 줄곧 속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허균이 나타난 것은 이달이 춘섬이 치는 두 번째 술잔을 막 비우고 난 뒤였다.

"산곡 선생이 먼저 와 계시다구!"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허균의 목소리에 이달은 비로소 자신이 춘섬을 두고 줄곧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고는 허균이 들어서서 채 앉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맑고 넓은 가을 호수, 옥빛 푸른 물. 연꽃 가득 피어 있는 깊숙한 곳, 매어둔 한 척 목련나무 배.연밥 따서 물 건너 님한테 던져주고, 행여 누가 봤을까 한나절 부끄러웠네."

환하게 웃으며 들어온 허균은 이달이 낭창하게 외치는 시 구절에 안색이 굳어졌다.

"선생님, 벌써 취하셨습니까?"

"아니. 하지만 이제부터 좀 취해보세, 교산!"

이달은 허균을 좌정하게 하고는 벌주삼아 당장 술잔을 비우게 했다. 허균은 하는 수 없이 응했지만, 잔을 다 비우고는 가시 돋친 말을 한 마디 내뱉었다.

"언제 선생님이 취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허허허, 그렇지. 안 취하고서야 살 수가 없으니."

이달이 과장되게 웃으며 춘섬한테 눈을 찡긋 했다.

"왜들 이러시는지 저는 알 길이 없네요."

춘섬이 자신을 두고 모르는 얘기를 하는 걸 눈치 채고 서운하다는 기색을 내보였다.

"춘섬이라고 했지?"

"그러하옵니다."

"방금 내가 읽은 시가 어떠냐?"

"한번 읽으신 시를 듣고 제가 어떻게 그 뜻을 알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다시 들어보겠느냐? 네가 가야금을 타면 내가 그 가락에 얹어져 그 시를 노래로 들려주마."

허균이 손을 저어 만류하는 걸 이달은 모른 체했다. 춘섬이 다시 가야금을 들고 앉아서 진양조 가락으로 가볍게 음을 잡았다.

"자, 이 시는 제목이 채련곡(采蓮曲), 즉 연밥을 따는 여인의 노래라는 뜻이란다."

술상을 손으로 탁, 내리친 이달은 앉은 채로 허리를 곧게 세우면서 목을 틔우고는 일곱자가 한 구절을 이루는 한시부터 천천히 읊어갔다.

秋淨長湖碧玉流
蓮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或被人知半日羞

맑고 넓은 가을 호수, 옥빛 푸른 물.
연꽃 가득 피어 있는 깊숙한 곳, 매어둔 한 척 목련나무 배.
연밥 따서 물 건너 님한테 던져주고
행여 누가 봤을까 한나절 부끄러웠네.

"자, 어떠냐?"

이달이 춘섬이 가까이 와 앉기를 기다렸다고 물었다. 그 눈길이 춘섬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연밥 따는 여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남정네한테 살짝 속내를 드러내 놓고 와서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거지요? 우리 같은 여자 마음을 어쩌면 그리 잘 그려냈을까? 아마, 그 시는 여자가 지었을 것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오호! 말을 알아듣는 꽃이 있다더니 과연 네가 해어화(解語花)로구나!"

"나으리, 어떤 여자분이 지은 시인지요?"

춘섬이 허균 쪽으로 몸을 기대왔다. 허균은 잠깐 춘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허, 하고 웃고 말았다.

과연 그랬다. 춘섬이 정말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이달이 신통하게 그걸 알아보고 시를 읊었다. 호수, 물, 깊은 곳, 한 척 배로 이어지는 절묘한 흐름으로 한 남정네한테 연정을 품고 그 감정을 살짝 드러내고 있는 모양으로 그려낸 그 시의 작자는 바로 허균의 죽은 누이 난설헌이었다. 여러 차례 춘섬과 놀았지만 춘섬이 누이를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달이 먼저 그걸 알고 꼭 짚어내고 보니, 허균은 허를 찔렸다는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오셨군요."

허균이 든 걸 그제야 알았는지 밖에서 행수의 발걸음소리가 났다. 이달이 들어설 때는 이달로서는 처음 보는 춘섬을 들여 맡겨 놓더니 허균이 들자 행수 도원에서부터 부행수 원길에 옥정, 홍주, 수빈까지 들어왔다.

"역시 귀빈은 따로 있구만!"

이달이 짐짓 비아냥거렸다.

"작은나으리께서 오신다는 기별을 듣고 며칠 전부터 우리 집 아이들이 모두들 몸치장에 꽃단장이 대단했거든요."

허봉이 드나들던 집이라 행수나 부행수는 허균을 작은나으리라 불렀고, 허균도 여태 젊은 서방 같은 느낌으로 육례원에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허균은 이번만은 행수 도원이 자신을 기다려온 다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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