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명이 유정 스님에게 닿기 전에 내가 가서 만류를 하려던 것이었는데 결국 만나질 못했네."
허균이 오대산에 닿았을 때는 서산대사의 부음을 접한 유정이 이미 조상하러 길을 떠난 뒤였다.
"큰스님께서 서산대사의 부음을 접하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어명을 받들고 먼저 도성으로 드신 걸로 아는데, 입궐하셨다는 말은 아직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디 계신지 도무지 종적을 모르겠습니다."
"아니, 봉은사에도 들르지 않으셨다는 겐가?"
"큰스님의 행자들이 먼저 봉은사에 닿았다는데, 정작 큰스님은 아직 미도착이라 했습니다. 왕명 받아 오시면서 저한테 미리 기별할 리도 없으니, 어떻게 먼저 찾아야 할는지요?"
"이리저리 어지럽게 수소문하고 다니기도 난처하고……"
유정이 도성에 들 때는 통상 봉은사에 먼저 들러 승정원에 통기를 해 임금이나 조정의 부름을 기다리게 된다. 특별히 도성에 와서 머물 때는 친한 문인의 사랑이나 육례원의 행수 같은 불자들이 특별히 마련해 주는 거처에서 지낸다. 어쩌다가는 다른 불자들이 북악산이나 목멱산 같은 데 지어 놓은 암자에서 머물 때도 있다.
"큰스님께서 입궐하지 않으셨으니, 아직은 큰스님이 왜국으로 가시는 걸 막을 수도 있는 셈입니다."
도원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허균을 쳐다보았다. 그때껏 듣고 있던 이달이 나서고 있었다.
"천치들도 때로 귀인을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더니 꼭 그 꼴이지 않나. 뒤늦게라도 유정 스님 같은 이를 찾았다는 게 놀라운 일이지. 제 멋대로 쳐들어와서 나라를 도륙한 도적이 다시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성환데,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단호하게 내치지도 못하고 있다가 용케 유정 스님을 생각해 냈어."
허균도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유정 스님의 탁월함에는 그 누구도 비하지 못하겠지만, 젊은 사람도 힘든 원행을 어째서 늙으신 스님에게 맡겨야 하는지 참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조정에 사람이 남아 있길 하나. 구국한 사람들을 죽게 만들거나 탄핵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들이 이 나라 대신이요 유림들 아닌가. 서애 대감이 실각한 뒤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같은 대신들이 남아 있다 하나 역부족이지. 실익이 하나도 없이 번드르르한 말만 잘 만들어내는 대신들이 나서서 될 일이 뭐가 있겠어. 바보 천치들한테 외교를 맡겨서는 안 되지."
마침 밖에서 술꾼들의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들려와 허균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선생님, 말씀을 아끼세요. 여기는 비변사와 육조 관청의 벼슬아치들이 자주 드나드는 집입니다."
이달은 못 들은 척했다.
"왜국으로 가서 왜인들을 상대하는 일에 유정 스님만한 이가 어디 있겠어.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누구이며, 용기를 가졌다 한들 유정만한 경험과 통찰을 가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유정 스님은 일찍이 칼로써 왜를 쳐부순 공도 어떤 장수 이상이거니와 가등청정과 강화를 논할 때도 상대의 속셈을 꿰뚫어 꼼짝 달싹 못하게 한 분이야. 게다가 승려 아닌가. 왕명을 받들고 가는 거지만 나중에 명나라에서 뭐라 해도 왕명을 내린 게 아니라 불자로서 도를 행한 거라고 발뺌을 하기도 좋질 않은가. 조선의 고승이 어리석은 왜국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러 간 거로 치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누가 천거한 것인지 모르지만, 이건 탁견이지, 탁견이고 말고."
과연, 이라고 허균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균으로서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달처럼 단번에 몇 줄로 정리하기는 어려웠다. 입을 열면 당송의 시편들이 줄줄이 엮여 나오는 타고난 시인이, 벼슬자리 하나 변변히 맡은 적 없으면서 조정 일이며 바다 밖 일까지 안방 일처럼 몇 마디 말로 정리해 버린다.
"하지만, 유정 스님이 배포가 크고 혜안이 있으시다 해도 갑년을 넘긴 노인이 배를 타고 가셨다가 봉욕이나 치르게 되면 큰일이 아닙니까? 제 맏형도 왜란 나기 전에 일본에 다녀오실 때 너무 괴로워서 자진을 하고플 정도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하셨어요. 조정에 사람이 없다 해도 공신 중에 공신이시고 벌써 환갑 넘기신 노인을 그런 험한 곳에 보내는 건 주자의 예에도 크게 어긋나는 일이지요."
허균의 맏형 허성은 왜란 나기 두 해 전에 황윤길, 김성일을 각각 정사와 부사로 하는 사신 행렬에 서장관으로 동행했다. 허성뿐 아니라 많이 이들이 배멀미에다 배탈이나 몸살 같은 걸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
"나무 밑에서 자다가 깨어나 진흙탕에 들어 나라를 섬겼도다. 꾀를 내어 계략으로 천리 먼 밖에서 승전고를 울리나니, 어느새 내 이름이 이리 무성해졌구나! 이 또한 여여한 일일 터, 일천 조사들이여 우리도 살생을 한 몸이로다!"
"허, 선생님 기억력은 정말 알아드려야 합니다. 그건 유정 스님이 일천 조사들을 데리고 전란에 참전해 왜놈들과 대적할 때의 시가 아닙니까?"
"산중에 있을 중이 속세의 진흙탕에 뛰어들어 나라를 구했지. 한데, 이 나라가 지금이라고 진흙탕이 아니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왜의 일이라면 이 나라는 한숨도 자지 않고 경계하고 지켜야 마땅할 터. 이미 칼을 든 스님이시니 마땅히 더 진흙탕 속에서 싸워주셔야 해."
"그럼 제가 스님을 못 가시게 만류하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뜰 앞에 잣나무!"
"흡!"
허균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농으로 하는 말에 둔중함과 날카로움이 함께 살아 움직였다. 정색을 하고 대하면 어느새 한바탕 웃을 거리를 쏟아내 놓는다. 바름과 비뚤어짐을 함께 지니고도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혜안을 가진 이였다. 허균이 자라는 동안 여러 사람한테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런 사람 중에서 가장 흉금 없이 지낼 수 있는 분이었다. 여덟 살 나이차라 스승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렵지만, 언제나 허투로 대하게 만들어 놓고는 깜짝깜짝 놀랄 만한 천재성으로 압도해 오는, 도무지 흉내 낼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런 사람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천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대신 눈밝은 문사는 이런 사람을 이야기 속에 남겨 둔다. 나중에 허균은 이달의 빼어난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하고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이라는 한문소설을 써서 그 불우한 천재를 기린다. 더 나중에 쓰게 되는 저 유명한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영웅 홍길동도 또한 이 이달을 닮아 있다.
오늘은 유정이 화제에 오른 만큼 얘기를 주고받다 보면 온갖 게송이 다 쏟아져 나올 듯했다. 허균은 그때껏 말없이 앉아 있던 도원이 들으라고 말했다.
"누가 봐도 유정 스님밖에는 길이 없는 듯하니 이제는 어쩌겠는가?"
도원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이러는 거지요. 큰스님 또한 병이 나셨다거나 불자임을 핑계로 대거나 해서 왕명을 피할 분도 아니시고요. 하지만 저는 끝까지 붙잡아 보려고 합니다. 나으리께서 마지막까지 진언해 주시는 걸로도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달이 한 마디 했다.
"유정 스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이런 기방의 온 기녀들까지 스님 걱정에 잠을 설칠 지경 아닌가! 이거야 부러워서 원."
비아냥일 리 없었다. 이달은 허봉을 따르던 후학이었다, 그러다가 허봉의 인도로 유정과도 교류했다. 뭐든 묻고 듣기를 좋아하는 유정에게 겁 없이 두보의 시를 비롯한 당나라 시문학의 진경을 설파해 준 적이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자신이 한 차원 높은 경지에서 강론한다는 기분이었는데 차츰 생각해 보니 도리어 유정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정의 설법은 왜란 전부터 이처럼 문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났거니와 머무는 절마다 설법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진풍경이 나타나곤 했다. 왜란 후에는 더했다. 이전에는 변복을 해서 절에 가던 사대부가의 부녀자들도 유정이 있는 절에 갈 때는 별 숨기는 것도 없이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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