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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종자 (1)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10>

글은 왜 읽는가?

유정은 어릴 때 한동안 이런 물음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 임종원(任宗元)으로부터 글을 배워 천자문에 이어 동몽선습을 떼고 명심보감에 한창 매달려 있을 때였다.

글을 배워서 지식을 쌓고 조금씩 깨달음을 얻고 있는데도 살아가는 동안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글을 아무리 읽는다 해도 자주 병을 앓는 부모님을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집안에 재물이 더 많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글공부를 해서 과거 급제를 하면 벼슬살이를 할 수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공부를 해서 과거 급제를 하고 벼슬살이를 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글공부를 했다는 사람들 중에는 도리어 글줄을 읊어 대면서 글 모르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천시하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일을 거의 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다고 글공부를 하지 않으려니 가슴속이 타는 듯이 목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은 뭔가 불공평했고, 세상이 왜 불공평한지에 대한 해답이 글 속에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읽고 외어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책을 읽다가 수시로 막막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임종원은 한때 지방 수령으로 있으면서 수시로 어린 임응규(任應奎, 사명대사 유정의 속가 이름)를 가르쳤다. 임지에 있다가 향리로 내려갈 때마다 가히 일취월장하는 응규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언젠가부터 응규가 글을 앞에 두고 고심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임종원은 조용히 응규를 타일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옛 성현들이 지금도 숭상을 받고 있는 것은 모두 그 학문의 경지가 높아서란다. 학문을 제대로 하면 그 높은 데까지 이를 수 있지. 학문은 그처럼 사람을 귀하게 만드는 것이야."

할아버지의 말을 응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귀한 사람은 적고 세상은 어지럽잖아요?"

"그럴수록 학문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지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수 있을 게 아니냐. 그러니 부지런히 책을 읽어서 학문을 쌓아야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학문하는 사람이 많은데 세상이 혼탁한 것은 학문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미 타락해 있어서인 거예요. 학문을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잖아요."

"그래? 학문하는 사람이 많은데 세상이 이리 혼탁한 것은 학문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미 타락해 있어서라고?"

할아버지는 응규가 생각하고 있는 경지에 매우 놀랐다. 응규는 거침없이 말했다.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고 학문을 하는 건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를 따려는 것과 같아요."

"옳거니! 그렇지. 마음이 깨끗해야 제대로 된 학문을 하는 거지."

"그러하다면 마음을 닦는 것이 먼저요 학문하는 일은 그 다음이 아닌지요?"

할아버지는 한참 뜸을 들이고 난 뒤에 말했다.

"네 말이 옳구나. 글 속에 아무리 고귀한 말씀이 있어도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그때의 학문은 헛되기만 할 뿐이지. 하나, 마음을 닦는다는 것도 글을 읽지 않고는 행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야. 그런 고로, 글을 읽는 일은 마음을 닦는 일과 항상 더불어 행할 일이니라. 글을 읽고 외운다고 학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글을 읽으며 그것이 끝없이 마음에서 비쳐 나오게 마음 닦기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라 할 수 있느니라."

할아버지는 응규가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응규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후 응규는 한동안 글을 읽으면서 늘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다지는 데 주력하곤 했다. 한 문장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글 읽기가 점점 더뎌졌다.

반면에 전에는 잘 이해되지 않던 성현의 말들이 뒤늦게 한꺼번에 깨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의문이 여전히 지펴져 오르기도 했다.

응규가 태어나 자란 곳은 경상도 밀양에 있는 괴나루(지금의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라는 시골 마을이었다. 응규는 글공부를 하다 틈이 나면 병든 부모를 위해 재약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곤 했다.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대신 모처럼 할아버지를 대한다든지 해서 말문이 열리면 그간 품은 의문을 한꺼번에 풀어보고자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집에 두고 가르치기에는 이 아이는 너무 큰 그릇이구나!"

임종원은 점차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응규가 통감절요와 소학을 차례로 배워나가던 열세 살 무렵, 임종원은 응규 아버지(임수성,任守成)와 상의를 해서 마침내 응규를 데리고 김천의 황악산 아래 와 지내고 있던 황여헌을 찾아갔다. 황여헌은 한때 벼슬이 참의에까지 오른 바 있는 선비였다.

응규는 황여헌 문하에서 3년을 지냈다. 모든 걸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할아버지에 비해 황여헌은 집중적으로 읽게 하고 질문으로 시험을 해서 통과하지 못하는 대목을 강론하는 방법으로 가르쳤다. 지난 세월 동안 배운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을 다시 복습하는 동안에는 그런 방법이 주효했다. 열심히 읽고 외우기만 했던 여러 문장 구절의 깊은 뜻이 황여헌의 강론으로 선명하게 잡혔다.

응규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 이듬해 어머니(달성 서씨, 達城 徐氏)를 여읜다. 그 충격 속에서도 책에 몰두했다. 논어를 읽기 시작했고, 맹자를 읽어 나갔다. 그러나 아쉬웠다. 유교의 경전들은 재물과 권력을 따르는 세속의 이치를 경계하면서도 그 세속이 가져다주는 편리가 아니라면 결코 추구될 수 없는 이치를 추구한다는 생각이 자꾸 일었다.

유학을 하는 사람은 안빈과 청렴을 당연하게 여겨야 하지만, 그 식구들이나 친척들이 그 사람이 안빈과 청렴을 유지하면서 잘 살 수 있게 재물을 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일었다. 응규는 세속의 가치도 경전의 가르침도 이르지 못하는 절대 경지를 알고 싶었다.

"조금도 빈틈이 없는 그런 학문을 찾아 가겠습니다."

응규는 황여헌에게 하직을 고하고 스스로 황악산 직지사로 들어가 신묵화상을 찾아뵙고 머리를 깎았다.

우리가 아는 법명(法名)이 유정(惟政)이요, 법호(法號)가 송운(松雲)이요, 자(字)가 이환(離幻)이요, 자호(自號)가 사명(四溟)이요, 시호(諡號)가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인 사명대사는 이렇게 탄생하고 있었다.

유정은 십대 중후반까지 유학을 배우다가 세속의 이치가 넘보지 못하는 본성의 세계를 찾아 불제자가 된 사람이었다. 열여덟 살 때 봉은사에서 열린 선과에 급제를 하면서 그 이름이 문인들에게도 알려져 유가 사람들과 폭넓고도 깊이 교유하게 되었지만, 더욱 맹렬히 불제자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다시 세속의 세계로 불러낸 큰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에 있던 유정은 일천 의승군을 이끌고 휴정의 기치 아래로 들어가 평양 탈환에 힘을 보탬으로써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낸다. 그리고 그 뒤로도 이어진 전투에 참전해 크고작은 공을 세우고, 난이 소강 상태에 들 때 의승군을 훈련시키거나 성을 쌓았으며, 왜장 가등청정의 진영으로 들어가 강화를 추진하면서 적정을 살펴 국왕에게 보고하기도 한다.

왜란이 끝나고도 6년, 유정은 도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수시로 국왕의 부름을 받아 세속사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제, 국왕의 명을 받아 탐색사로 왜국으로 건너가야 할 사람이었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불제자의 태도요 행동이랄 수 있을까?유교의 경전을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승려가 된 몸이 어째서 돌아와 세속의 운명에 관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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