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이 도성으로 돌아온 것은 도성을 떠난 지 일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난 이듬해(1593) 10월이었다. 그보다 여섯 달 앞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왜군이 빠져나간 도성으로 들어가 완전히 도륙이 난 성안을 정비할 틈도 없이 군사를 독려하는 동안에도 임금은 환도를 두려워해 망설이고 있었던 셈이다. 웬만큼 회복되었거니 했지만 그러나 도성은 거리에 나뒹구는 시신들도 아직 다 치우지 못한 채였다. 경복궁도 창덕궁도 창경궁도 종묘까지도 모두 불타 버리고 없어 국왕이 머물러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이때 궁으로 쓰게 된 곳이 지금의 서울 정동에 있는 덕수궁이었다. 당시에는 한시적으로 머무는 궁이라 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렸다.
이 집은 원래 세조 때 세자인 도원군이 일찍 죽는 통에 세자빈 한씨가 출궁하게 되자 세조가 한씨와 손자들을 위해 지어준 집이었다. 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이 일찍 죽어 한씨의 둘째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 임금이 성종이었다. 성종의 어머니 한씨는 뒷날 성종의 아들 연산군에게 곤욕을 치르며 죽어간 인수대비이고, 그들이 살던 집에 남아 있게 된 사람은 인수대비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형으로 풍류를 좋아하고 아름다운 시문으로 중국까지 이름을 떨친 월산대군이었다.
그로부터 백여 년 뒤 그 집은 왜란을 당하고도 파괴되지 않고 있다가 도성을 비웠다 돌아온 국왕과 조정을 위해 바쳐졌다. 창덕궁이 중건되어 기능이 회복되는 때까지는 이로부터 50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경복궁은 그보다 이백년 넘는 세월이 지난 뒤에 중건된다. 그렇게 덕수궁에 머물게 된 국왕은 10년 뒤 그곳 정침에서 승하한다.
임금은 그 행궁의 편전에서 영의정 이덕형을 맞고 있었다.
"임진년에 몽진할 때......"
하던 임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몽진(蒙塵)......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인데, 주로는 난리를 당한 임금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걸 일컫는 말이었다. 왜란이 끝나고 6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임금은 시시때때, 궐과 도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나 의주에 머물러 있던 때가 떠올라 치를 떨곤 했다. 실제로는 겪지 않은 일인데도 얼어붙은 압록강을 미끄러지듯 건너 중국으로 도망가는 자신의 초라한 어가 행렬이 이따금씩 그려지곤 했다. 게다가 어떤 날의 꿈속에는 몽진 길에 오른 어가가 백성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맞아 우두두둑 하고 우박 듣는 소리를 냈다.
"휴정이 그때 참으로 빨리 산에서 내려와 주었지......"
임금은 또 말을 끊었다. 그때, 의주까지 피신을 간 임금은, 국경을 넘어가서 명나라에 나라의 운명을 의지하려고 했다. 당시 대사헌이던 이덕형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청원사로 발탁되어 요동에 가면서 임금의 망명 방도까지도 구해야 했다. 원군 출병은 약속을 받았지만 임금의 망명은 요동 쪽에 진주해 있던 진수 총병(鎭守摠兵) 양소훈(楊紹勳) 선에서 막히고 말았다. 겨우 받아 낸 대답이 '불행하게도 와야 한다면 아주 적은 군사들만 데리고 오라'였다. 그런데도 임금은 나라를 두고 중국으로 들어갈 꿈을 버리지 않았다. 왕이 떠난 나라를 누가 무슨 명분으로 지킬 것인가. 이덕형은 유성룡과 힘을 합쳐 끝내 임금의 중국행을 막아 냈다.
임금은 그런 기억을 애써 밀어내고 있었다.
"내가 그때 의주에서 휴정을 불러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 휴정이 말하기를, 늙고 병든 승려는 절에 남아 부처님께 나라를 구하기를 빌도록 하고, 나머지 모든 승려는 싸움터로 부르겠다고 했지. 휴정이 도총섭으로서 팔도에 의승군을 일으켜 명나라 군사가 올 때까지 왜군을 막아주었어."
"휴정을 알아보신 혜안이 있으셨습니다."
"한데, 지금 다시 그 제자를 불러 나라의 안위를 묻게 되었구나."
임금은 휴정과 의승군의 공적을 오래 떠올리고 있지 않았다. 부처와 승려에게 나라의 운명을 의지한 사실마저도 피해가려 하고 있었다. 이덕형은 얼른, 머뭇거리는 임금의 속내를 읽었다.
"휴정은 부처에게 의탁한 사람이지만, 불제자들을 싸움터로 보내 칼로써 적을 베게 했습니다. 이는 부처의 뜻과 구국의 뜻이 다르지 않음을 뜻합니다. 휴정의 제자 유정 또한 그러한 뜻으로 난중에는 말할 바도 없고, 난 후에도 오늘까지 도성 가까이 있으면서 명을 받들어온 사람입니다. 대임이 그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 여기심이 옳겠습니다. 서둘러 하명을 하시옵소서."
임금은 다시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이 없었다. 스스로 이미 정한 일을, 무엇 때문에 미루고 있는 것일까. 이덕형은 이제 불충스럽게도 임금의 의중을 너무 쉽게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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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자신보다 더 백성들이나 신하들에게 추앙받는 다른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백성이 따르는 뛰어난 신하들이 임금의 명으로 벼슬을 잃거나 심지어는 하옥되고 고문을 받고 죽어가는 일도 잦았다. 스스로는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내부(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음)하려 하면서도 만일을 대비해 서둘러 세자를 책봉하자는 신하들의 의견도 무시하려 했었다. 그뿐 아니었다. 도성을 버리고 파천하는 일로부터 평양성을 떠나는 일까지 반대한 대신들도 임금에게 미움을 받았다. 임금으로 가까이 모시며 힘겹게 난리에 맞서 왕조를 지키고 나라를 구한 류성룡 같은 이가 바로 그랬다. 류성룡은 왜란 중에 실각과 복직을 되풀이했고, 사지와 다름없는 곳에 배치되었다가 오히려 전공을 세우고 살아 돌아오기도 했다. 임금은 어쩔 수 없을 때는 류성룡을 중용하다가 조금이라도 빌미가 있으면 내쳤다. 종전 무렵 곧바로 파직된 류성룡은 낙향해서 다시는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세계사가 인정하는 해전의 영웅 이순신이 왜란 중에 붙잡혀 와서 사형 직전까지 몰렸다가 가까스로 백의종군을 하며 다시금 원대 복귀 과정을 겪어야 했던 것도 임금의 그런 성품 때문이라 봐야 옳다. 마지막 해전까지도 완벽한 승리로 이끈 23전 23승의 이순신이 전사한 것을 두고 지금껏,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 둥, 전사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은 사형을 면치 못했을 거라는 둥, 그때 전사한 게 아니라 죽은 것으로 해두고 한동안 어딘가에 은둔해서 살았다는 둥 여러 말이 나오는 까닭도 임금의 영웅 죽이기 습관에서 비롯된, 사실일 수도 있는 가설이었다.
나중에 '선조'라는 묘호(廟號)로 기록되는 조선의 14대 임금은 그런 사람이었다. 조선은, 조선을 침략한 왜군하고도 싸워야 했고,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사의 침략과 다름없는 지배에도 견뎌야 했으며, 탐관오리며 백관들의 사리사욕이며 당쟁의 폐해도 입어야 했으며, 게다가 그런 임금의 자기 안위부터 생각하는 습관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영웅 죽이기와 판단 착오와 우유부단과 결정 번복 등의 혼란을 헤치고 나가야 했다.
왜에 탐색사를 파견하는 일만 해도 그랬다. 당시 일을 기록한 실록에, '왜와 강화하는 일도 이미 수치인데 그걸 일개 승려의 힘을 빌려 이루려 하고 있다'고 개탄하는 사관의 말이 부기되어 있다. 그런 시각을 가진 많은 신하들도 결국은 한 목소리로 유정을 지목했다.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이 볼 때, 막중한 대사를 수행할 인물도 유정이었지만, 또한 늙은 몸으로 가서 설사 목숨을 잃는다 해도 뒷탈이 없을 인물이 유정이었다. 영웅에게 국가 중대사를 맡기고, 국가 중대사의 수행보다 영웅의 죽음을 더 기대하는 기묘한 심리가 임금에게 있었다. 그 기묘한 심리가 언제나 망설임을 낳고 신하들의 당쟁을 부추겼으며 결국은 무수한 오판을 낳았다.
바르게 결단한 일은 결단한 후에도 길게 망설이고, 그르게 결단한 일은 신속하고 단호하다......
이덕형은 언젠가 류성룡이 취중에 임금을 두고 한 말을 떠올렸다. 류성룡 스스로도 중얼거리듯 말하고 나서 추스르느라 혼이 빠진 낯빛이었고, 이덕형으로서도 다시 떠올려서는 안 될 불충의 요언이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기막히게 잘 들어맞는 말이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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