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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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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3)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15>

왜란 이후 조선과 왜의 외교가 단절되자 당장 힘겨워진 곳이 대마도였다.
  
  조선은 경자년(1419, 세종 1년)에 해안에서 말썽을 일삼는 왜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이종무를 보내 정벌한 바 있었다. 그 뒤로 두 나라간의 왕래가 중단되었지만,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여러 차례 간청해 와서 계해년(1443, 세종 25년)에 부산을 비롯해 내이포(진해 부근), 염포(울산 부근) 등 세 항구를 열어 무역과 어획을 허락해 주면서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때의 조약을 계해약조라 한다.
  
  이때부터 대마도는 한동안 조선 정부의 배려 아래 매년 쌀과 콩 200석을 무상으로 받는 등 상당한 실익을 챙겨갈 수 있었다. 이런 은전에도 경오년(1510,중종 5년)에 삼포를 드나들던 왜인들이 너무 많은 제한을 받는다는 이유로 이른바 세 항구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를 삼포왜란이라 하는데, 이 왜란 때문에 결국 부산포를 제외한 두 항구가 폐쇄되고 이전까지 200석 하사되는 쌀과 콩이 매년 100석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런 중에 왜가 임진년에 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면서 대마 번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5천명을 징발해 선봉에 설 것을 명했다. 인구가 적은 대마도에서 5천명은 16세부터 53세에 이르는 청장중년 남자들 거의 전부였다. 소 요시토시는 그들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현해탄을 건너가 전쟁을 치렀다. 전쟁 중에 대마도는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내내 식량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대마도가 왜군의 본진인 나고야[名古屋]와 조선 현지의 전진 기지인 부산항을 연결하는 중계기지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남은 군량이나 선박들이 모두 군수물자로 징발될 수밖에 없었다. 고기잡이를 해서 먹고살아야 할 터전인 어항들 역시 조선 침략군을 위한 해군기지로 징발되었다. 전쟁 중에 대마도 왜군은 천명 이상이 죽고 천명이 다치고 수백 명이 조선에 투항했다.
  
  조선이 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국가가 존립해 있다는 자체를 기적이라고 봐야 했다. 어떤 학자는 조선은 이때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단언할 정도다. 천운으로 살아남은 조선은 이후 자강(自彊)을 통한 자립(自立), 자존(自存)할 기회를 놓친 채 연이은 호란과 당쟁과 세도정치에 시달리다 결국 임진왜란의 재판 격인 정한책(征韓策)에 일본에 합방되고 만 거라고 진단하는 사람도 있다.
  
  동아시아 전체를 두고 보면, 이 전쟁으로 덕을 본 나라도 없었다. 모두가 패전국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총 15만 대군으로 남의 나라로 출정해 싸운 왜도 전사자 외에 피로와 추위와 기아와 병으로 죽은 자도 부지기수였고, 탈주자와 투항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 침략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본토도 그 후유증이 심각했다. 정유년 재란 때까지 조선 침략을 지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갑작스레 죽은 뒤로 대신끼리 처절한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고 그 중에서 조선 침략에 나서지 않고 힘을 비축해온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 쪽으로 정권이 이양되는 내전기의 살육과 혼란이 오래 지속되었다. 명나라도 조선을 지원한 일로 국방에 빈틈이 생겨나 결국은 반 세기도 못 가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당하게 된다.
  
  조선과 왜 사이에 자리한 작은 섬 대마도는 자기 땅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을 뿐 마치 황무지처럼 헐벗고 굶주린 땅이 되었다. 왜 본토에서는 대마도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조선은 왜란 후 문호를 닫아 버렸다. 먼 왜 본토에 기대기보다 가까운 땅 조선에 기대 먹고살고 있던 대마도로서는 당장 찾아든 식량난부터 견딜 수 없었다.
  "왜 왕이 전쟁을 일으킨 것에 용서를 구하고 문호를 열어줄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소 요시토시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대마도에 가둬 두고 있는 조선인 피로인 300여명을 생환시키면서 왜 본토에서 사과하는 뜻으로 보내는 거라 속이기도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몇 년 동안의 각축 끝에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요청한다는 뜻의 서한을 꾸며 써 오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소 요시토시의 그러한 청을 무작정 억눌러 버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왜국은 조선에게, 수백년 동안의 왜구 침략의 역사에다 이제는 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침략전의 경험까지 쌓게 만들고도 지독하게 짐작하기 어려운 이웃이며 적으로 살아 있었다. 강화하고 문호를 개방해 놓지 않으면 침략을 준비하고 있을 나라였고, 왜란의 수치를 무릅쓰고 바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그나마 그 동향을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는 나라가 왜였다.
  
  처음에는 명나라에서 조선과 왜의 강화를 원치 않았다. 왜란 종결 이후 일부 조선에 주둔해 있던 명군이 대마도에서 보낸 사신을 억류해 버리는 일도 있어서 조선은 독자적으로 강화를 추진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일시적으로 전계신, 손문욱 두 무관을 대마도에 보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탐색 내용은 미미했고 조정에서는 그나마도 그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고 논의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명군이 철군을 한 뒤 비로소 조선 조정은 왜와의 강화 문제를 더욱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비변사가 그 논의의 핵심 기관이었다. 비변사는 국가의 위기 때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 조직된 특별기관이었다. 3정승이 도제조를 맡고 6판서가 제조를 맡았으며 병사에 능한 3품 당상관 중에서 부제조를 뽑아 썼다. 가히 의정청과 6조의 권한을 총집결한 기구라 할 만했다. 비변사의 이들 당상들이 모두 강화를 위한 탐색사로 왜국에 갈 사람을 정하고 그 임무와 조직, 경로에 대해 논의해서 결정했고, 그 뜻을 국왕에게 전했다. 그렇게 정한 탐색사가 승려 유정이었고, 임금도 다른 방도를 전혀 찾지 못했다. 임금은 미루고 미루다 유정을 불러 충성을 확인했고, 특별한 관직도 내리고 않고 왜국의 수장에게 보낼 친서도 없이 도왜(渡倭)를 하명했다.
  
  비변사의 우두머리인 영의정 이덕형은 유정을 인도해 덕수궁 밖으로 나섰다. 교자에 오르지 않은 채 봄 햇살을 맨 얼굴로 맞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선 유정도 고개를 들어 멀리 목멱산을 바라보았다. 이덕형이 다시 몸을 덕수궁 쪽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난리가 나던 이듬해 도성에 돌아와 보니 곳곳이 폐허가 되어 있었지요. 당장 전하를 뫼셔야 했는데 초가 한 채라도 제대로 남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 행궁 앞 솔숲도 다 불에 타고 담장이 무너졌는데 용케 집채가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었지요. 이곳 행궁에 머무신 전하를 처음 배알하고 나오는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이덕형은 그때의 감회가 살아나는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그럴 만도 했을 터였다. 불타고 뿌리 뽑히고 죽어간 조선의 도읍에 봄이 온 것이 벌써 여러 해이지만, 유정이 바라보는 목멱산은 여태도 예전 같은 파릇파릇한 기운을 뿜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유정은 잠시, 의승군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왔다가 거리거리에 즐비한 시신들을 싣고 광희문 밖으로 나가 뚝섬 근처에서 화장하던 계사년(1593년) 여름을 떠올렸다. 죽은 시신들 위로, 그 시신을 서로 파먹다 결국은 자신도 죽어 시신이 된 채 쌓인 그런 시신 더미의 아수장을 더 보지 못하고 미쳐 버린 어린 승병 하나도 떠올랐다. 배가 갈리고 가슴이 찢긴 시신을 외면하면, 피비린내와 썩은내를 견뎌내려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의승군들의 표정을 보는 괴로움을 이겨야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덕형은 몸을 다시 돌려 남쪽켠을 가리켰다. 그나마 난리 중에 가장 피해가 적었던 숭례문 인근으로 이제 노점도 몇 보이고 술청도 보였다. 듬성등성 인가도 있었다. 한 무리의 등짐장수들이 숭례문 쪽에서 걸어들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그때 용케 저 숭례문이 허물어지지 않았고, 숭례문에서 오른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크게 허물어져 있었지요. 그런데, 그 무너진 담장 너머 한강 쪽에서 자욱한 기운이 몰려드는 게 보이더단 말이에요. 바로 이쯤 되는 시각이었는데요, 처음에는 때아니게 중국 큰땅에서 황사라도 밀려오는가 했지요. 그러고 잠깐 동안은 우리 기마병이 떼를 지어 기세좋게 먼지를 내며 몰려들어오나 착각도 했지요. 아득하고 자욱하고 멀리서부터 무슨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는 듯한 그런 기운....... 아무튼 그런 기운이었는데, 저는 그걸 보면서, 아 그래도 우리 조선에 저런 기운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를 회상하는 듯 이덕형의 물기 어린 눈이 반들거렸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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