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이곳도 서애 상공 덕분에 생겨난 곳입니다."
유정은 별영창(別營倉)을 지나면서 말했다.
"훈련도감을 세운 일을 두고 이르는 말씀이시지요?"
대꾸한 사람은 이달이었다. 바로 뒤를 따르던 허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원과 홍주도 몇 걸음 뒤를 따르면서 쓰게치마 속에서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임진년 왜란을 당해 기존 오위제의 군사 체계가 거의 와해되자, 류성룡은 새로운 훈련 체제로 병사를 길러내 전장에 투입시킬 것을 건의했다. 왜란 중에 그렇게 생겨난 것이 훈련도감이었고 그 초대 제조가 바로 류성룡이었다.
처음 병사가 된 이들은 훈련도감에서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 등으로 전문 훈련을 받아 각 지방으로 내려 보내졌다. 별영창은 바로 훈련도감에 속한 그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급료와 마료(馬料)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서애 상공께서 훈련도감을 설치한 뜻을 아시는지요?"
"그야 병사를 훈련시켜 왜적에 맞서게 하려는 것이지요."
허균이 대답했다. 아주 당연한 답이었다. 유정은 대꾸를 하지 않고 묵묵히 앞서 걷기만 했다. 도성 수복 때까지 관군 지리멸렬한 상태였고, 기댈 데는 명나라 군사나 의승군, 의병 들밖에 없었다.
그 이후의 전투에서 그나마 관군이 전에 없는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이 훈련도감 출신 병사들의 활약 덕분이라 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서애 상공께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신 다른 깊은 뜻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이달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왜란 때 우리 조선은 왜적한테만 유린당한 게 아닙니다."
"그럼......"
하던 이달은 유정이 하려는 말을 금세 이해했다.
"흔히 왜란을 7년 난리라 하지만, 실제 전투는 임진년부터 처음 1년하고 정유년 재침 때 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나머지 동안 우리는 한쪽에서 왜를 경계하면서 국지전을 벌여야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패악무도한 또 다른 적과 싸움을 벌여야 했어요."
"왜란 때 왜적 아닌 또 다른 패악무도한 적이라면?"
허균 역시 뒤늦게 알아챘다.
왜의 침입을 당한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 나라의 패망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원군으로 온 명군은 이 땅에 들어와서 도무지 전쟁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실제로 명군이 주도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처음에 평양성을 탈환할 때뿐이었다. 그것도 첫 전투에 멋모르게 달려들다 대패한 일이 있고나서였다.
이후 여러 차례 전투에도 무모하게 덤벼들거나 아니면 우리 조선의 청으로 마지못해 임했다가 패전하거나 도망가기 바빴다. 우리 군사나 백성들은 전쟁도 치르지 않고 우리 땅에 주둔해 있는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굶어죽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온갖 수모를 다 겪어야 했다.
"모든 게 군사가 없어서입니다. 어서 군사를 길러내 자강(自彊)해야 했는데, 그 방도가 없으니 명군이 아무리 군량을 축내고 조선 군사와 백성을 금수 취급하며 패고 죽이고 욕보여도 이를 막을 길이 없었지요. 이런 명군에 서애 상공은 훈련도감에서 군사를 조련하는 일을 맡겼지요."
"명군이 이땅에 주둔해 있을 명분도 주고, 우리도 그만큼 배워서 자강한다는 계책이란 말씀이시군요."
허균은 품에서 류성룡에게 받은 서신을 만지작거리면 말했다.
유정은 별영창 뒤로 난 언덕길을 올라갔다. 왜란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간 뒤였지만 그래도 이곳은 별영창을 지으면서 인마가 다니게 되고 인가가 듬성듬성 새로 생겨난 길이라 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쇠뜨기나 제비꽃 같은 꽃들도 싱싱하게 피어나 있었고, 나무들도 제법 초록빛을 뿜었다.
"큰스님 덕분에 모처럼 봄나들이하는구만!"
도원이 홍주 귀에 대고 말하는 시늉만 하고 유정이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말해 보았다.
유정의 발길이 머문 곳은 가파른 고갯길 끝, 서너 칸은 족히 되어 보이는 집이 있었겠거니 싶은 집터였다. 미리 와 있던 해구, 준하, 영식이 집터를 깨끗이 쓸어 놓은 채였다. 빈 터 한쪽으로 진달래가 붉은 기운을 뽐내듯이 마구 핀 숲 아래로 집채를 받들던 나무기둥 두 개가 반쯤 부러진 채 서 있었고, 그 열 보 앞쪽으로 주춧돌들이 나란한 칸을 이루며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앞으로는 바로 벼랑이었다. 벼랑 쪽 공중이 탁 트이는구나 싶었더니 저 아래로 왼편으로 노량에서 마포나루 서쪽으로 용산강 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자, 여기는 원래 안평대군이 살던 담담정이라는 별장 자리입니다. 이 담담정은 나중에 보한재(신숙주의 호)의 별장이 되었지요. 임금께서 성종대왕 때 보한재가 지으신 해동제국기를 내게 주시면서 읽으라 하시기에 문득 이 정자가 떠올랐습니다."
유정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일행을 앉히고 물었다.
"자, 교산이 서애 상공의 서찰을 받았다고요?"
유정은 허균이 복사골(오늘날의 마포구 도화동) 오동수 집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찾은 까닭을 그때서야 물었다.
류성룡이 파직된 것은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이었다. 그의 아낌없는 후원 아래 우리 바다를 지킨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이순신은 류성룡이 논핵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탄식을 거듭한다. 그리고, 그날 영웅의 죽음을 후세 사람들은 선조로부터 처형될 것으로 미리 알고 스스로 전사를 자초한 것이라 평한다.
모든 관작을 삭탈당한 류성룡은 이듬해 향리 안동으로 내려간다. 그 이듬해 직첩을 되돌려받고 국왕이 여러 차례 불러 올렸지만, 결코 다시는 서울로 오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곳에서 후대에 경계하게 위해 왜란의 전말을 소상히 밝힌 저 유명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는 중이었다.
"제가 얼마 전 서애 상공께 서신을 보냈는데 그 답신이 왔습니다."
"하곡(허봉)의 시집 서문을 서애 상공께 받으시겠다고 하셨지요?"
"예, 답신에 흔쾌히 그러마 하셔서 서둘러 시집을 엮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데, 또 한 가지 제가 서애 상공께 여쭌 게 있사온데....."
"허허허, 바로 그 일 때문에 나를 찾으셨다는 게지요?"
"왜국으로 가는 탐색사로 발탁되는 큰스님 일로 서애 상공이 계신 곳으로 내려가 여쭙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데 서애 상공 말씀이 누가 찾아오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어서 견디지 못하는 병에 걸리셨다고 하시면서......"
허균은 말을 잇는 대신 자신이 받은 류성룡의 답신을 유정에게 내밀었다. 도원이 침을 꿀꺽 삼켰고, 홍주는 세운 무릎에 놓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허어!"
모처럼 류성룡의 가늘고도 힘찬 친필을 보자 유정은 가슴이 마구 뛰었다. 류성룡이 모진 조건 속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수백번 넘기며 임금을 지키고 명군을 붙들고 충성된 신하들의 목숨을 구하던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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