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수의 마포 집은 담담정 터에서부터 별영창을 지나 복사골 쪽으로 한 마장 거리에 있었다.
마포 집은 원래는 왜란 때 국왕을 호종하다 순직한 오경수 별감이 별장으로 쓰던 집으로, 오 별감의 동생 오동수가 관리하고 있었다. 오 별감은 도원과는 각별한 사이로 육례원의 뒤를 봐주고 있었고, 유정도 도성 가까이 머물 때면 오 별감의 별장에서 머물러 왔다. 난리 때 형을 따라 피난을 가서 혼자 살아 복사골로 돌아온 오동수는 살 길이 막막했다. 그때 마침 류성룡이 소금 생산을 장려하는 계책을 내면서, 오동수는 황해도의 염호에서 소금을 가져다 별양창까지 날라주는 일을 맡게 되었고 점차 소금장사에 문리가 트였다.
황해도의 소금 생산자들에게 부역을 없애주어서 생산량을 늘리고, 그 소금을 호남과 호서 지방의 곡물들과 바꾸어 백성들도 배불리 먹게 하고 그 중간 이익으로 군량을 대는 계책을 낸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었다.
오동수는 여러 관청의 일을 받아 소금과 곡물을 바꿔 실어 나르는 일을 맡아 수익을 늘려 나가고 있었다. 장사가 날로 번창하게 되자 오동수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유정은 의승군 출신 준하, 승나, 영식 등 일행을 그 집에서 일하게 했다.
"말을 달리며 말 위에 서는 것을 주마입마(走馬立馬)라 하고, 말등을 왼쪽 오른쪽으로 타넘어 옆에 숨어 달리는 걸 좌초마, 우초마라 하고, 말목의 왼편에 의지해 거꾸로 서는 것을 마상도립(馬上倒立)이라 하고, 말 위에서 죽은 체 가로누워 있는 걸 횡와양사(橫臥佯死)라 하며......"
마재인 철배는 철철 넘치는 술잔을 두 잔 거푸 들이켠 뒤로는 차분하게 마상재 얘기를 펼쳐 나갔다.
"그런 재능이면 군문에 들어 수많은 병사를 훈련시키고도 남을 게 아니오? 어째서 그런 재능을 지금껏 숨겨 오셨는지요?"
오동수도 궁금한 건 잘 참지 않는 성미였다.
"저 같은 광대가 무슨 군문이겠습니까? 이제는 나이가 들어 광대 짓도 더 못하고 그저 가끔씩 불려 다니며 재주를 보여주고 양식을 얻어가고 있습지요."
대답은 그랬으나 철배의 눈빛은 알지 못할 결기가 같은 게 뿜어져 나왔다. 그 동안 철배를 수배해 오늘의 마상재를 구경할 수 있게 한 해구가 점잖게 나섰다.
"숨길 일이 뭐 있겠어요, 왜란에 참전해 적을 많이도 놀래켰다고 들었는데요?"
"관아에서 말 여물 먹이고 말똥 치우던 일을 하던 부친 덕에 말을 데리고 같이 노는 일이 많다보니 일찍 마상재 흉내를 낼 수 있었고, 또 집안이 가난해서 광대패하고 어울려 다니며 재주를 부리다 보니 남 보기에 우스운 꼴은 면하게 된 데 불과하지요. 마침 왜란을 만나 간혹 말 타고 재주 부린 적이 있지만, 장수들이 쓰는 말을 제가 어찌 함부로 가지고 놀아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청주성을 되찾을 때하고, 이후에 두 번째 진주성 싸움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만."
해구는 철배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 애썼다.
"왜란 때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세를 잊고 공연히 평지를 찾아 기마를 자칫 잘못 운용했다가 군사를 몰살시킨 예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찮은 병졸에 불과한 제가 나서서 할 일이 없었지요. 게다가 제가 하는 건 천박한 기예일 뿐이라, 잠시 구경꺼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군사 일에 쓰일 건 없을 법합니다."
말투는 투박했지만 사리가 분명했고 실은 한 마디 놓칠 것이 없었다. 그걸 알아차린 오동수가 서둘렀다.
"큰스님! 저는 제 가형이 살아 계실 때나 돌아가시고 나서도 지금까지 큰스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모두 이행하고자 했습니다. 한데 이즈음 큰스님이 나라의 부르심을 받으시면서 하시는 일은 도무지 제가 헤아려 모시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 큰스님께서 여기 계신 의승군들을 거두어라 하시기에 일손이 부족하던 차에 기꺼이 들여서 함께 일하고 있사온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마재인의 재주를 보게 하십니다. 한데, 이 마재인께서는 스스로 하찮은 광대패의 기예라 하시지만 제 눈에는 그리 보이지가 않습니다. 큰스님께서 여기 의승군 출신 장정들에게 모두 마상재를 가르쳐 왜국으로 데려가서 왜놈들 혼을 빼놓으려는 것이나 아닌지요? 어서 가르쳐 주셔야 제가 나설 일, 뒤에서 바쳐 드릴 일을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다."
한동안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큰스님한테 대드는 듯한 어조 같아서 놀랍기도 했지만, 하나하나 새겨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의심인 듯도 했고, 그러면서도 큰스님에 대한 존경의 뜻은 더 깊어 보였다.
"허허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이 집 행수를 잘 보아두세요. 이 행수가 말이에요, 장차 이 나라 조선의 큰 상인이 될 사람입니다. 무릇 장사치는 돈 버는 일이 우선일진대, 왜놈들 혼을 빼놓는 일을 돕겠다는 말부터 하고 있질 않습니까."
유정이 그쯤으로 덮어 두려 하자 이번에는 허균이 나섰다.
"기왕 말이 큰스님께서 왜국 가시는 일에까지 이르렀으니, 큰스님께서 결단을 내리고 말씀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저는, 서애 상공께서 큰스님께 하신 말씀을 보시고 큰스님이 과연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이달이 덧붙였다.
"허험!"
유정은 다시금 길게 헛기침을 해보였다.
"아시다시피, 나는 국왕의 명으로 이번 여름에 왜국을 탐색하러 떠나게 되었어요. 한데, 그동안 나를 아껴온 분들이 적지 않은 내 나이를 두고 염려해서 여태 붙들고 만류하고 있습니다. 손곡 선생은 틈틈이 짬을 내어 나를 찾아주시고 내 안위를 걱정해 주시고 계시고요. 교산께서는 내가 공경해 마지 않는 서애 상공께 서신을 보내 내가 왜국 탐색사로 가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까지 하셨고요. 이제 서애 상공께서 나를 두고 답신을 보내시어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서애 상공이 이르기를 비록 스스로는 '도(道)를 배울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것이 한이라' 하시면서도 내게는 '지팡이 들어 가리키는 그 길이 도가 아니겠느냐' 하셨습니다."
법문을 듣는 듯 좌중은 고요해졌다.
"도가 눈앞에 있는데 더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이제 더 말리지 마세요. 국왕께서 미천한 내게 모든 것을 맡기셨으니 이제 왜국으로 건너가 왜인들과 한편으로 마음을 열어 교류하고 한편으로 기세를 올려 제압하고 한편으로 가만히 뒤를 살피야 합니다. 담력과 용기를 가진 사람도 있어야 하고, 지략과 계책을 가진 사람도 있어야 하며, 의복과 약재도 있어야 합니다. 마상재와 같은 재주를 가진 이는 그 재주로 내 수하를 가르쳐 주어야 하고, 재물이 있는 이는 가는 날까지 내 수하를 배불리 먹여 주어야 하고, 의술이 있거나 숨은 무술이 있는 자 중에서 심지가 굳은 자는 나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눈 앞에 바다가 있고, 그 바다 건너에 내가 뒤지고 살피고 꿰뚫어 봐야 할 왜인들의 나라가 있습니다. 나는 거기에 이르러 내 길을 가야 합니다. 이제 이것만이 나의 도입니다."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원과 홍주를 앞세워 유정이 묵고 있는 복사골까지 온 이달과 허균도, 불려와 마상재를 보인 철배도, 철배로부터 마상재를 배울 준하 무리들도, 그들에게 적당히 일거리를 주고 배불리 먹여 주어야 할 오동수도 유정의 말에 가슴 밑바닥을 쳐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함께 느꼈다.
다만 도원과 홍주만이, 찬방 문에 기대서서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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