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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과 교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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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과 교린(3)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21>

형조좌랑 강항은 1597년 중 휴가로 고향인 영광으로 내려가 있던 중에 정유재란을 당해 분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 임무를 맡아 보았다.

임진왜란 시작 때 북진을 서둘렀던 왜군은 재란 때는 주로는 삼남 지방을 장악하려는 전략을 폈는데, 그 주 공략 대상지가 전주였다.

물밀 듯 쳐들어오는 왜군에게 남원이 함락되자 강항은 영광에서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인을 모았으나 역부족,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려다 왜병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가족, 친지들을 하나둘 잃으며 일본으로 압송된 강항은 처음에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었다. 그때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으면서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냈다.

1598년에는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醒窩), 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했다. 강항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일본 탈출에 성공한다. 1597년 5월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 1600년 5월에 귀국하기까지 꼬박 3년을 일본 땅에서 지낸 셈이다.

강항은 일본 억류 중에 《적중견문록 賊中見聞錄》을 써서 몰래 인편으로 선조에게 바치기도 했고,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발문까지 썼다.

《곡례전경 曲禮全經》·《소학》·《근사록 近思錄》·《근사속록》·《근사별록》·《통서 通書》·《정몽 正蒙》 등 16종을 수록 정리한 《강항휘초 姜沆彙抄》도 남겼다. 그 책은 지금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또〈문장달덕록 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역대명의전략 歷代名醫傳略》의 서문도 썼다.

귀국한 강항은 대구교수(大丘敎授), 순천교수(順天敎授) 등으로 임명되었지만 스스로 죄인이라 하면서 사직하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면서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한다.

이후 말년까지 《운제록 雲堤錄》·《강감회요 綱鑑會要》·《좌씨정화 左氏精華》·《간양록 看羊錄》·《문선찬주 文選纂註》·《수은집》 등의 책을 내었다.

타계(1618년, 광해군 10년)하고 오랜 뒤인 1882년(고종 19)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으로 추증되었다. 고향인 영광의 용계사(龍溪祠)와 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성주 아카마쓰(赤松廣通)기념비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항이 오늘날 전해주고 있는 책 중에 가장 인상 깊고도 중요한 책이 바로 <간양록看羊錄>이다.

이 책은 나중에, 강항이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있을 때 쓴 여러 가지 글들을 모은 것으로 처음에는 저자 스스로 '건거록(巾車錄)'이라 이름을 붙인다. 이는 강항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1656년(효종 7) 가을 이 책이 간행될 때, 그의 제자들이 강항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높이 기려 흉노 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한나라 소무(蘇武)의 충절을 떠올리며 <간양록看羊錄>이라 붙이고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유계(兪棨)의 서문과 제자 윤순거(尹舜擧)의 발문이 실려 있다.

간양록에 실린 글은, 앞에서 말한 <적중견문록>을 비롯해, 적국에서 임금에게 올린 글(敵中奉疏),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告俘人檄), 승정원에 나아가 임금에게 올린 글(詣承政院啓辭), 환란 생활의 기록(涉亂事迹) 등 5편이다. 이 중에서 <환란 생활의 기록(涉亂事迹)>에 나오는 한 대목을 보자.

어린 놈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의 죽음은 너무도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 하고 부르던 소리가 아직도 귓결에 암암하다.

그 소리마저 시들해졌을 때 산 아비가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 내 나이 서른두 살에 만득으로 얻은 용이다.

이 해를 뱄을 때다. 어린 용이 물 속에서 떠오르는 그런 꿈을 꾸었다. 그래서 이름을 용이라 지었더니

"엄마야, 엄마야!"를 부르며 물 속에 빠져 죽을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인생 만사가 모두 다 미리 작정되지 않음이 없건만, 우리가 그를 모르고 지날 뿐이 아닌가 한다.

처음에 배를 타고 가려다 왜군에 잡히게 되자 자살을 결심하고 물에 빠져들자 식구들도 다투어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걸 왜군들이 건져 올려서 모두 살아나는데 그 중에서 두 아이만이 물속으로 잠겨드는 장면이다.

이후로 아흐레를 굶으며 끌려가는 중에 가족, 친지들이 굶어죽고 병든 아이들을 왜군들이 수장시켜 죽임을 당하는 끔직한 일을 겪는다. 그 이듬해 초까지 강항의 형제가 낳은 소생 여섯 중 셋이 물에 빠져 죽고, 둘이 왜놈 땅에서 죽고, 겨우 하나만 살아남는다. 강항의 기록은 이처럼 애절하면서도 세세하다.

강항이 일본에 가서 만난 사람 중에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중이 있다. 이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아는 명석한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온 유학자 강항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일본의 조선 재침설 등을 전해 준다. 강항은 이 말을 듣고 일본의 정세를 부지런히 살펴본다.

강항이 나중에 귀국해 임금에게 보고한 <승정원에 나아가 임금에게 올린 글(詣承政院啓辭)>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왜놈 풍습에 놈들은 어떠한 재주, 어떠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천하제일을 내세웁니다. 천하제일이라는 명수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이면 제 아무리 추악하고 하찮은 물건이라도 천금을 아끼지 않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교묘한 물건이라도 명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면 물건 수에 넣지도 않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왜 조선 도공을 잡아다 도예를 발전시켰는지, 일본에 어째서 마니아문화가 발달했는지 그 유래 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강항은 그 밖에도 당시 일본의 제도, 풍습, 개인 사생활 등을 눈앞에서 보는 듯이 그려 보이고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에게 조선의 과거절차와 춘추석전(春秋釋奠)·경연조저(經筵朝著)·공자묘(孔子廟) 등을 강항에게 물으면서 상례·제례·복제 등 유교의 예법을 배웠다. 그는 한탄하기를

"왜 나 같은 사람은 중국이나 조선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일본에 태어났을까" 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으로부터 주자학의 진수를 배워 나중에 일본 유학의 개조로 불릴 정도가 된다.

<간양록>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모두 불태워 버려서 하마터면 이 땅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없을 뻔했다. 그러나 요행히 남은 몇 권이 있어 그것이 지금 규장각과 고려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때 이 간양록의 내용은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어 강항이라는 이름과 함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고, 가수 조용필이 부른 그 드라마 주제가 또한 사람들 마음을 애닯게 했다.

(작품 속에 인용되거나 설명되는 '간양록' 해석은 이을호 선생이 번역한 서해문집 2005년 판의 것을 거의 그대로 썼음을 밝힌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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