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사공이 어떤 집 종이 주는 엽전 한 냥을 챙기고 배타는 순서를 슬쩍 앞당겨 주려다가 먼저 서 있던 사내한테 들켜서 한 바탕이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어떤 당상 집 종놈들 몇이 큰사공한테 눈을 부라렸으나 큰사공은 귀가 닫힌 사람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오전 나절에 벌써 서너 차례씩 한강을 왕복한 두 사공은 오시가 채 되기도 전에 기진맥진이었다. 그나마 오시를 넘기면서부터는 나들이객이 줄어들어 막걸리 두 사발씩 마시고 둘이 번갈아가며 나루터 한 귀퉁이에서 낮잠을 잘 수도 있었다.
경강 북쪽의 뚝섬에서 경강을 건너가 선릉 묘역이 바라보이는 나루에 내려 오른쪽 비탈을 오르다 보면 그윽한 정취를 자랑하는 가람이 하나 있었다. 그 절이 바로, 지금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속해 있는 봉은사였다. 원래는 통일신라기인 794년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절이었다. 고려를 거쳐 조선에 들어서면서 크게 쇠락했는데, 조선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수호 사찰로 지정되면서 중창에 나섰고, 특히 보우대사가 왕실과 가까워지면서 도첩제와 승과 제도를 부활시키고 이 가람을 과거장으로 선정하면서 일약 조선 선종의 수찰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가람의 규모가 한때 삼존을 봉안한 대웅보전을 비롯해 진여문, 천왕문, 해탈문, 명부전, 응향각(향로전), 나한전, 심검당, 운하당, 강선전, 매화당, 청심당, 향적전, 동별당 서행랑, 대남루, 열반당 등을 거느린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이런 봉은사였지만 보우대사가 궁지에 몰려 죽고 불교 배척이 다시 심해지자 이전의 광영을 잃고 다시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서산대사 휴정이 가끔 다녀가고 유정이 자주 와서 거하게 되면서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갈 수 있었는데 왜란을 겪으면서 또 한 차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역시 명찰은 명찰이었다. 무엇보다 도성에서 가까운 데 있어 겉으로는 숭유억불이라 하나 마음에 든 불심은 끄지 못하는 도성의 아낙들이 틈틈이 찾아들곤 했다. 왜란 이후에 다시 사명대사 유정이 이곳에 머물게 되는 날이 잦아지면서 옛 명성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갑진년(1604, 선조 37년) 6월 봉은사 선불당에서 열린 송법회(送法會)는 모처럼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정면 여덟 칸, 측면 세 칸의 승당 안은 반가의 아낙들 차지였고 중정에는 반상과 남녀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어수선하던 경내는 예불과 헌공이 끝나면서 일순 정적을 맞는 듯했다. 선불당 불상을 뒤로 두고 의자에 앉은 유정은 허리가 꼿꼿하고 수염이 길게 늘여 있어 그 형상이 더욱 뚜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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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하신 여러 선사들께서, 왜란이 끝났음에도 절로 돌아가지 않는 나를 두고 안타깝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무릇 중이란, 깊은 산중에 들어 종적을 끊고, 명아주를 찧어먹고 개울물을 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반야가 모는 인자한 배에 올라 보리를 얻을 수 있을 테지요. 마땅한 말씀이시지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한데 내가, 왜란을 당해 왜적을 쳐부수는 일에 앞장선 세월도 이미 있는데다 이번에 또 왜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인지, 이 나이 들도록 속가의 인연을 끊지 못해서 이러는 것인지......"
유정은 조용히 좌중을 둘러보았다가 잠시 눈을 깊이 감았다. 수백은 족히 되어 보일 사람들이 뿜어내는 더운 숨결이 느껴졌지만, 유정은 그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향목(香木) 내음을 천천히 마음을 흘려 보냈다.
"왜란 때 7년이나 의승군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고 다녔고, 이제 절로 돌아가려다 다시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 왜적을 상대로 변설로 맞싸워야 합니다. 내게 무슨 욕심이 남아서일까, 욕심을 버렸다고 하고서는 그저 아상(我想)에 사로잡혀 제 멋에 겨운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직 모자람이 많아서 속인들이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일에 가타부타 나서서 참견하는 걸로 부처를 모욕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날마다 명상에 들어 생각해 봤습니다. 지난겨울에는 임금님께 청해 동안거를 하러 오대산으로 가면서 이제 다시 속가로 나오지 않으리라 마음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산하에 왜란이 몰고온 참상은 여태 다 아물지 않았습니다. 아직 봄 제비가 와서 집짓고 살 수 있는 집이 없어요. 아직도 많은 어리석은 수령들이 왜란에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있어요. 그런 세상에 또 왜군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유정의 법문은 처음에는 나직하고 느슨해서 마음을 놓을 뻔하다가도 어느 결엔가 말끝마다 힘이 느껴지기 시작해서, 귀가 트이고 뭔가 가슴 한가운데로 말길 같은 것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아주 쉬워서 그냥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갑자기 머리를 쿵 치는 법어가 하나 던져지고, 끝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우주만물의 구석구석을 찌르고 훑고 지나다 어느새 맺힌 응어리가 확 풀리듯 가슴이 시원해지게 하는 유정의 법문 속으로 사람들은 오래오래 젖어들었다.
"아하, 내가 아직 산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구나. 중생들이 도탄에 빠지는데 나 혼자 도를 얻어 깨친들 무엇하겠느냐. 나는 비로소 결심했습니다. 싸워도 위태롭고 싸우지 않아도 위태롭다면, 싸우지 않아 위태롭기보다는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움을 하여 성패를 정하리라!"
유정의 음성이 선불당 밖 중정까지 또렷이 뻗어 나왔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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