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달은 그 운치를 즐기고 있지 못했다. 이달의 귀는 선불당에서 들려오는 법문 소리를 향해 열려 있었지만,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에는 굵은 침이 꽂혀 있었다.
새벽에 집에서 서둘러 먹은 밥이 명치께에 맺혀 버린 듯했는데 배를 타고 건너오면서부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동행한 허균이 어제부터 봉은사에 와 있던 홍주를 인파 속에서 발견하고 불러냈다. 절간 일을 도우는 틈틈이 귀를 기울여 유정의 법문을 들으려 마음먹고 있던 홍주로서는 그러는 허균이 야속했다.
"오늘이 큰스님 송법회인데 법문을 듣지 않았다가는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법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만."
막 법회가 시작되고 있어서 이달이 언성을 낮추며 말했다.
"네 생각이 내 생각이로구나. 침도 맞고 큰스님 법문도 들을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
"그럼, 제가 나으리의 체증을 낫게 해 드리면 나으리도 제 청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홍주는 짐짓 뻗대어 보았다.
"그래, 네 침술이 보통이 아닌 걸 안다. 후한 상이 있을 것이니 어서 자리를 잡아보자."
허균이 나서서 둘을 매화당 앞으로 인도했다. 홍주는 익숙하게 이달의 손에 침을 놓고 선불당 쪽으로 내려갔다.
이달의 입에서 절로 끄윽하고 트림소리가 난 것은 유정의 법문이 끝날 때였다. 어느새 체증은 가셔 있었다.
"나으리, 체증이 가시었으니 제 청을 들어주셔야지요."
중당의 인파 뒤에 서서 유정의 법문을 듣고 빠져 나온 홍주가 이달의 손등에서 침을 뽑아냈다.
"허허, 네 청이 무언지 모르겠다만 내가 이제 네 청을 들어줄 만한 힘이 없구나."
이달이 꾀를 내자 홍주는 밉지 않게 이달을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이달이 제 가슴께를 쓰다듬으며 여러 번 트림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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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 침술을 큰스님의 제자한테 배웠더라는 말이지?"
"예, 그렇지요. 큰스님의 제자 중에 사암(舍岩)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분한테 심부름을 갔다가 침술을 조금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사암이라는 중은 지금 어디 있느냐?"
"왜란 끝나고 어디로 종적을 감추었다는데 그 뒤로는 소식을 모릅니다."
"그렇게 용한 분이라면 중생들을 위해 인술을 베푸는 일을 더 하지 않고 어디로 사라졌을꼬?"
"그러게 말입니다. 하온데, 나으리, 그렇게 딴 말씀만 마시고 제 청을 들어 주셔야지요."
홍주가 틈을 보이지 않고 다가서자 이달은 다시 큰기침을 하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대체 네 청이 무엇이더냐?"
"그야 저를 송운 큰스님 가시는 길에 따라갈 수 있게 해 주시는 거지요."
짐작한 일이었지만 이달로서는 또 한번 놀랐다.
"여자 몸으로 큰스님을 수행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 공연한 청을 했다고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 내 전부터 말하지 않았더냐. 설사 네가 배를 타고 간다고 해봐라. 왜인들이 큰스님을 어떻게 여길 것이냐? 자칫 잘못 하다가는 국가 대임을 그르칠 수 있어. 없던 말로 해라."
"나으리, 그게 아니오라......"
말을 하던 홍주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곧 홍주의 입에서 "거기 섰거라!"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홍주의 몸은 매화당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달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웬 낯선 사내 둘이 매화당 뒤켠에서 홍주한테 쫓기고 있었다. 사내들은 쫓기면서도 별안간 당한 일이라는 듯 어, 어, 소리만 내고는 다른 변명을 하지 못하다가 더는 그럴 수 없다는 듯이 이달이 있는 샘물가까지 내려와 걸음을 멈췄다.
"아니, 대체 이 여자가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유?"
한 사내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홍주가 치마말기를 끌어올리면서 씩씩거렸다.
"큰스님 송법회를 하는 동안에 법회에는 참례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아까부터 큰스님 기거하시는 염화실이며 요사채를 기웃거리고 있는 거죠?"
"허, 그건!"
한 사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답답해 했다.
"수상한 데가 있으니 조사를 해야겠어요, 나으리. 제가 이 자들을 지키고 있을 테니 나으리께서는 어서 가셔서 원주 스님을 모시고 오세요."
아낙네의 추궁에 마땅히 응대를 하지 못하는 사내들의 표정이 볼 만했다. 덩지가 만만찮은 사내들이었지만 행색을 보니 막 대할 서생들은 아닐 성싶었다. 이달이 두 사내 앞에 나섰다.
"보아하니 절집에 밥을 훔치러 온 도적들 같지는 않은데, 웬일로 수상하게 승방을 기웃거리셨는가?"
"저희는 송운 큰스님이 뵙고 싶다는 일념으로 경상도 달성에서 걸어서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제 이름은 하명구라고 하고요."
"저는 강진석이라 합니다."
두 사람이 공손히 이름을 밝히며 이달에게 목례를 하는데도 홍주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큰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면서 어째서 큰스님 법문하시는 법회에는 참례를 안 하고 도둑고양이처럼 빈 요사채를 기웃거리셨지요?"
그러자 강진석이라는 사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넉살좋게 말했다.
"푸하하하, 도둑고양이 같다고요? 실은, 팔공산 밑에서 책 읽고 농사만 짓다가 도성 가까이 와 보니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해서 자꾸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버릇이 붙어 버렸네요."
홍주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거짓말 마라! 거기 등에 지고 있는 보퉁이는 무엇이냐? 훔친 물건이 있거나 아니면 남의 집을 털 때 쓰는 창검이라도 들은 게 아니냐?"
이달이 보기에도 행색이나 말투가 도적 같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등에 매고 있는 보퉁이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나도 이 사찰을 아끼고 이 사찰의 스님을 존중하는 사람이라 자네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겠어. 자, 어서 앞장 서시게들! 자네들이 죄 지은 게 있는지 없는지 부처께서 말씀해 주시겠지."
홍주 때문에 꼼짝없이 도적으로 몰리게 된 두 사람이 뿌리치고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곧이곧대로 설명하기도 마뜩찮아 곤혹스러워 하고 있을 때, 법회 참례를 마친 사람들 수십 명이 절 구경을 하기 위해 매화당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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