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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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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 (1)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25>

조선에서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전갈을 받은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모처럼 환한 표정을 지었다. 손수 소주창으로 내려가 전통소주 야마네코를 큰 술병에 담아 와서 술판을 벌였다.

"씨가 말랐던 쓰시마의 야마네코들도 이제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육포 냄새를 맡고 모습을 드러낼 테지, 하하하."

야마네코는 산고양이라는 뜻으로 대마도에 많이 서식했다.

소 요시토시까지 19대째 내려오는 소씨 가문에서 즐겨 빚어 마시는 전통주에 이 이름을 붙을 만큼 대마도를 상징하는 동물이었지만, 조선 침략전쟁 때 섬 전체가 식량이 동이 나서 먹을 게 없어진 이들 고양이마저도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워낙 귀하기도 했지만 일본 술 중에는 아주 독한 기운 탓에도 마구 마시는 술이 아닌 야마네코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켠 소 요시토시가 가로(家老)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에게도 한 잔 듬뿍 따러 주었다.

"지난 칠년 동안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우리 쓰시마 백성들이 불평 하나 없었던 것은 모두 도주님이 보살펴 주신 덕입니다."

논이나 밭이 될 만한 땅도 별로 없고 구황이 될 만한 열매와 풀나무도 흔치 않은 터라 대마도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와 해초로 음식을 해먹고 살아야 했다. 이 무렵 대마도에서 가장 흔한 나무인 삼나무 잎을 뜯어 물에 넣고 끓이는 탕 요리가 유행하기까지 했다.

"그간, 조선 조정의 환심을 사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없는 섬 살림에 참으로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 아니었소."

"이제 조선 쌀로 밥을 해먹게 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봉행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여섯 사람과 재판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네 사람의 신하가 지켜보고 있다가 도주가 내리는 술을 한 잔씩 받아 마시고 모두들 얼굴이 불콰해졌다. 그 중에 재판 한 사람이 술 취해 기분이 좋아진 김에 말한다는 듯히 한 마디 했다.
▲ 대마도 소 요시토시[宗義智] 묘탑

"조선에선 예로부터 우리 쓰시마를 왜구 소굴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한데 이번에 몇 년 굶고 보니까 우리 쓰시마 선조들이 어째서 왜구로 살아야 했는지 알겠습니다."

"뭣이라고? 왜구라고 했느냐?"

소 요시토시의 반문에 재판이 그제서야 움찔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식량이 넉넉지 않아서 왜구로 살아야 했던 쓰시마 인들의 조상......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대마도는 결코 왜구 소굴이 아니었고, 따라서 대마도인 그 누구도 왜구가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양식이 있을 때까지만이었다.

언제라도 그들은 조선이나 중국 해안으로 가 대마도에서 나는 물고기와 해초를 주고 필요한 물건을 받아와야 하는데, 이 무역이 여의치 않으면 밀무역을 해야 했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결국은 왜구로 돌변해 마구잡이로 뺏어 와야 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 침략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쓰시마는 대륙 진출의 요새로 전에 없이 부각되었고, 그래서 그만큼 힘들어진 것도 많았지만 한편으로 도주 소씨를 중심으로 섬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통치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소씨는 일본 내의 당당한 일개 번(藩)의 번주(藩主)였다.

번주 소씨가 일본 쇼군의 후원을 받아 통치하는 쓰시마는 옛날의 쓰시마가 아니었다. 일부 어선들이 여전히 중국과 조선의 해안에서 밀무역을 하면서 때로 해적 짓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예전 왜국 소굴이 아니었다.

"잘들 들어두어라!"

소 요시토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모두들 벌벌 떠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소 요시토시의 어조는 예상 외로 차분했다.

"쓰시마는 일본에서 가장 대륙과 가까운 곳이다. 쓰시마가 없다면 일본은 바다 한 가운데서 불교도 유교도 한자도 책도 모르는 섬나라로 지내야 한다. 일본이 고립된 섬나라가 되면 우리 쓰시마마저 고립될 수밖에 없고, 그리 되면 우리는 예전처럼 다시 왜구의 섬으로 돌아가야만 살아갈 수 있다. 이제 와서 그 누가 그리 되길 원할 것이냐. 일본이 고립되지 않아야 우리가 사는 것이다.

일본이 고립되지 않으려면 대륙으로 길을 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조선과 강화하는 일이 우선이다. 대륙의 문물과 조선의 인삼이며 종이며 쌀이며 콩이 일본으로 들어오고 일본의 해산물과 은화와 쇼군이 지닌 각종 보화를 조선으로 가야 한다. 한데, 조선은 일본이 재침할 걸 두려워하며 일본을 믿지 못하고 있고, 일본은 내전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과신해 조선을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쓰시마가 살 길은 이 둘 사이에 교량이 되는 일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왜구가 아니라 일본과 조선이 오고가는 다리로서 그 사람과 물상이 교류하는 천혜의 요충이다."

말을 하는 동안 소 요시토시의 음성이 서서히 높아지고 눈알이 앞으로 튀어나올 듯한다 싶더니 갑자기 그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좌중의 신하들은 더욱 몸둘 바를 몰랐다.

임진왜란 때 참전한 대마도 장정이 5천명이었다. 피해갈 수 없는 동원령에 대마도 장정 거의 전원이 참전해야 했던 셈이다. 6년 뒤 정유재란 때 참전한 장정 수는 2천에 이르지 못했으니, 그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했다. 전쟁이 종결된 뒤 대마도 사람들은 황무지를 새로 개간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소 요시토시 가문에 더욱 혹독한 시련이 덮쳐왔다.

소 요시토시는 조선 침략 전쟁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 참전해 조선을 누비고 다닌 장수였다. 침략 전쟁이 끝난 뒤 일어난 일본 내전 때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고니시 유키나가 편에 서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뒤인 1600년 10월 역사적인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아들 야나가와 가게나오[柳川景直]를 이시다 미쓰나리의 군진으로 밀어 보내고는 자신은 슬쩍 몸을 빼버렸다. 그 전투에서 승자가 되고 결국 일본 천하를 한손으로 장악하게 된 사람은 다름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소 요시토시는 서둘러 아내인 고니시 유키나와의 딸을 내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충성을 맹세했다.

소 요시토시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로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조선과 교린하는 권한을 얻어낸 소 요시토시는 지난 7년 간 조선의 문호를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왔다. 우선 대마도에 억류중이던 조선인 피로인 천여명을 10여 차례에 걸쳐 송환했다.

그때마다 조선의 문호를 열어줄 것을 청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의 무관 전계신, 손문욱 등이 대마도에 들어와 정세를 살피고 가기도 했다. 이제 드디어 조선의 왕명을 받은 사신이 바다를 건너와 강화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소 요시토시의 눈물은 그 자신의 한뿐 아니라 오래고 오랜 쓰시마의 한을 씻어 내리는 눈물이었다.

"쓰시마의 사활이 일본과 조선이 강화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달려 있다는 말씀,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때문에 이번에 오는 조선 사절단을 극진히 모셔서 뜻을 관철하도록 해야 합니다. 섬 곳곳, 사신이 오는 길목마다 사신을 맞을 차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주 소 요시토시와 대마도를 위해 아들 야나가와 가게나오를 이시다 미쓰나리 군에 편입시키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결국 그 아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데도 성공시킨 바 있는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냉정을 잃지 않고 소 요시토시를 진정시켰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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