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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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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 (2)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26>

"이번에 조선 국왕의 사절로 오는 사람이 바로 사명대사 유정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 이후 소 요시토시는 여러 차례 조선으로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한번도 사신을 도성으로 들이지 않았다. 전쟁 통에 이전에 일본 사신들이 도성에 오면 머물던 왜관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침략의 원수들이 조선 땅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 자체로 치욕이었다. 명나라에서도 조선이 왜와 스스로 강화를 논의할 수 없도록 간섭했다. 대마도 사신이 그나마 부산 객관에 머물면서 관아를 통해 조선 조정에 국서를 올릴 수 있게 된 것도 소 요시토시가 수 차례나 피로인들을 송환시키고 조선에 공물을 바친 덕분이었다.

부산을 드나들던 대마도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가 조선 조정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한다는 답을 접한 것은 선조 36년(1603) 가을이었다. 처음에 사절단의 정사로 거명된 이름은 서산대사 휴정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초 휴정이 입적했다는 소문이 들렸고, 이후로는 또 지지부진이었다. 다치바라 도모마사는 대마도로 돌아갔다가 외교 승 겐소[玄蘇]와 함께 피로인 쉰둘을 데리고 다시 부산에 상륙했다. 그제서야 조선 조정은 사신 파견을 약속했다.

사절의 정사로 휴정의 제자 사명대사 유정이 발탁하고 구체적인 일정을 논의하고 있다는 예조의 전갈이 온 것은 5월 들어서였다. 부산에서 대마도의 부중(府中) 이즈하라[嚴原]로 먼저 돌아온 겐소로부터 유정이 사절로 온다는 보고를 받은 소 요시토시는 흥분된 마음으로 조선 사절 맞을 차비에 들어가는 한편으로 불쑥불쑥 밀려드는 근심에 사로잡혔다. 조선 사절단 영접을 준비하는 해안 마을을 수시로 점검하러 다니면서 유정을 떠올려 보았다.

"너희들, 조선의 의승장 사명대사 유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사절로 우리 쓰시마에 오시게 되었으니, 사절을 맞이하는 데 한 치의 허점도 있어서는 안 된다. 알았느냐?"

처음에 소 요시토시와 함께 조선 침략 전쟁에 나섰던 대마도 장정은 오천. 그리고 다시 재침 때 나선 이는 채 이천이 되지 않았다. 7년에 걸친 침략전에 투입된 오천여 장정 중에서 반 이상이 전사했다. 그게 대마도의 운명이었다. 소 요시토시는 처음부터 고니시 유키나와 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지를 꺾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을 꺾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자칫 잘못 언동했다가는 곧바로 처형되는 상황이었다. 오직 복종만이 정도(正道)였다. 그게 또한 무사가 지배하는 일본의 길이었다. 장인과 아내를 따라 천주교 세례까지 받은 소 요시토시였지만, 결국은 침략의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마도 장정들과 함께 보좌하면서 종군해야 했다. 따라서 그 희생과 피해는 피할 길이 없었다.

다른 일본 병사에 비해 조선에 대해 잘 알았던 대마도 병사들은 전쟁에서 활약한 조선 장수 이름도 잘 알았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모르는 왜군이 없었으니 예외로 치더라도, 행주대첩의 권율, 진주성 싸움의 김시민, 홍의장군 곽재우, 청주성 싸움의 의병장 조헌과 의승장 영규 같은 이름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사명대사 유정은 특별했다.

부산에 제1진으로 상륙하고 불과 스무날 만에 한양을 접수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북진 행렬이 연전연승 끝에 처음 패배를 맛본 곳은 평양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과 연합군을 이루어 치른 첫 전투가 평양성에서였는데. 임진년 7월 요동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은 왜군의 유인책에 빠져 대패하고 말았다. 조승훈 부대는 그대로 안주까지 후퇴했다가 요동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명나라 원군이 다시 온 것은 그 해 겨울이었고, 본격적인 평양성 탈환이 이루어진 것은 이듬해 초였다. 명군의 수장은 이여송, 조선 관군의 수장은 이일과 김응서, 여기에 의승장 유정이 수 천의 의승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평양성 싸움에서 하마터면 내가 의승병들한테 붙잡혀 꼼짝없이 죽게 생겼었지. 그때, 성문이 깨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저세상으로 갔을 걸세. 의승장 유정을 그때 봤지. 투구도 쓰지 않은 채로 말을 타고 호령을 하는데, 대단하더라구."

일개 병사로서 조선에 와서 전쟁을 치르고 살아 돌아간 것만으로도 무용담일 터였다. 그 중에서도 소 요시토시를 따라 평양까지 진군했다가 일본에서 크게 존경받는 계급인 승려이면서 용감무쌍한 의승장으로 활약한 조선의 사명당 스님을 만나 본 사람은 할 말이 더 많았다. 그 밖에도 사명당을 순천 전투에서 본 병사도 있었고, 울산 전투 때 부딪쳤다는 병사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사명당의 이름이 일본에 널리 알려진 것은 사명당이 왜장 중의 왜장이라는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를 논의할 때의 사건 때문이었다. 왜란 발발 3년째, 가토 기요마사는 왜군과 명군 사이의 강화 논의가 자신과 경쟁 관계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 외교관 심유경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이 크던 차였다. 유정은 울산에 왜성을 세우고 버티고 있는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를 논의하게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기토 기요마사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큰소리로 물었다.

"대사는 승려로서 누구를 위해서 전장에 나와 계십니까? 혹시 조선에 우리가 모르는 무슨 보배가 있어서 그걸 지키려는 건지요?"

유정은 얼른 대답했다.

"조선의 보배, 암, 있지요. 있고 말고요."

"아, 조선에 어떤 보배가 있습니까?"

"보배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것일 테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보배라 하는 거지요."

"조선에 그런 보배가 있습니다. 암, 있고 말고요."

"대사께서도 참, 너무 뜸을 들이며 말씀하십니다. 대체 조선에서 그 보배가 무엇입니까?"

"바로, 가토 장군의 목이 우리 조선의 보배이지요. 조선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싶어하니까요."

"뭐라고요?"

가토 기요마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을 일으키면서 순간, 자기 목을 손으로 만지고 말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대표적인 무사로 이름이 전해 내려온다. 대마도 소씨 가문의 역사를 담은 '종씨가보(宗氏家譜)'라는 책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 머물 때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그건 당연히 거짓말일 것이고, 그런 가토 기요마사에 맞서 '당신 목이 조선의 보배'라 했다는 유정의 일화 또한 과장이 섞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단신으로 여러 차례나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으로 들어가 강화 문제를 당당히 논의하면서, 한편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관계를 적당히 이간질시키고 한편으로 왜군 진영의 동향과 왜성 내의 정세를 살펴 국왕께 보고한 유정의 행적은 남다른 바 있다.

그런 까닭에 사명당이라는 이름은 당시 전쟁터에 와 있던 적군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전후에도 가까운 대마도는 물론이고 일본 본토에까지 알져지게 되었다.

왜란 전에 일본 본토에 다녀가던 문관들과 달랐고, 주로 대마도에만 드나들던 역관사나 무관들과도 다르면서, 어떤 문무관보다 박식하고 강단이 있고 경륜이 있는 사절...... 무작정 고개 숙이고 예를 다한다 해서 이득이 클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배포 좋게 호기를 부리며 대한다 해서 대충 웃음으로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소 요시토시의 고민이 거기에 있었다.

*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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