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토시로서는 조선 침략전 때부터 일본을 대표해 대조선 외교를 전담해온 겐소의 판단이 중요했다. 겐소는 오치[大內] 다이묘 가의 가신 집안 출신으로 하카다[博多]의 세이후쿠사[聖福寺] 주지가 되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일본 국왕사로 조선을 드나들면서 대마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후 대마도 번주 소씨가에 속해 있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집권 하에 조선과의 외교 문서를 전담해 왔다. 이테이안은 겐소가 대마도에 지은 절 이름이자 그 절 주지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조선 국왕이 다른 문관이 아닌 고승을 사신으로 보내는 것은 사명당을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조정 눈치를 보지 말고 거리낌 없이 살피고 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명당은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서산당 휴정의 직계 제자로서 이미 전쟁 때 조선 전역에서 의승장으로 활약했는데, 특히 가토 장군의 성안으로 드나들면서 일본 군영을 여러 차례 살핀 바 있어서 비록 바다 건너오는 일이라 해도 일본 사람의 동태를 탐색하는 데 익숙할 것입니다. 사신을 맞는 격식과 절차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그저 공손하게 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다 숨기거나 감추지 못할 바에는 뭐든 다 드러내 놓고 협상함이 옳을 것입니다."
"다 숨기거나 감추지 못할 바에는 뭐든 다 드러내 놓고 협상을 하라......"
"사명당이 사절단의 정사되었으니 필시 사명당을 따르는 승려들이 다수 동행할 것입니다. 조선에서 승려는 왕조 개국 때부터 홀대 받아 천민 취급을 당해왔다 하나, 때묻은 속세를 버리고 오직 도를 위해 살아온 그들은 세상 이치를 단숨에 예사로이 꿰뚫어보곤 합니다. 섣불리 우리 이득만 찾으려다가는 오히려 크게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겐소 자신도 고민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전쟁 전 황윤길이 이끄는 통신사 행렬을 교토를 인도할 때부터, 한창 전쟁이 진행되던 중에 명나라의 심유경, 조선의 이덕형 등과 강화를 논의하고, 전후에 손문욱 일행을 대마도로 맞아들일 때까지 참으로 많은 외교 문서를 전달하고 양국 외교관들을 통역해 왔지만, 이번은 달랐다. 다른 무엇보다 상대는 자신과 같은 동연배의 승려인 데다, 그 중에서도 학문에도 문학에도 또한 무예에도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조선 최고의 고승이었다.
"이테이안의 말씀을 듣고 보니 여러 사정을 감안하셔서 대책을 다시 강구해야겠습니다."
소 요시토시를 도와 번의 행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야나가와 시게노부도 겐소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하다면,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께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다시 제대로 알리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고......"
세이이다이쇼군란 원래 일본에서 옛 아이누 족을 치기 위해 조정에서 임시로 파견하는 군대의 총사령관을 뜻하는 말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장악한 도코가와 이에야스가 스스로 이 직명을 쓰게 되면서 나중에는 바쿠후[幕府]의 수장을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
조선과 외교 개통이 한시라도 급한 소 요시토시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세이이다이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진정을 해서 대조선 외교 권한을 위임 받은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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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의 말을 야나가와 시게노부가 바로 받았다.
"그렇습니다. 쇼군께서 우리가 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나라로서 다시금 조선과 평화롭게 화친하겠다고 먼저 청을 하는 처지임을 고려하시고 하명을 하시게 하고, 그 뜻이 교토의 다이묘들부터 이 쓰시마에서 배를 그는 격군들에 이르기까지 고루 전해지게 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소 요시토시는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대를 이어 부교에 오른 아들 야나가와 가게나오에게 그동안 쇼군에게 올린 문서를 모두 펼쳐 두고 새로운 문서를 작성하게 했다.
"다음은......"
소 요시토시는 관리들이 모두 분명하게 알아들으란 뜻으로 말을 끊었다.
"그 동안 조선을 침략해서 가져온 것들을 모두 고하게 해서 그 중 어떤 것은 조선에 돌려보내고 어떤 것은 부중에 남기고 있는데, 보아 하니 일부 관원들 중에 귀한 것을 뺏길 것을 염려해 집에 감추어 두고 고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이번에 조선에서 사명당이 오면 이 섬에 몇 달을 머물게 될지도 모르는데, 행여 섬 이곳저곳을 탐색하다 조선에서 노략질해서 숨긴 것을 보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차제에 집에 있는 조선의 것들은 모두 고해서 그 중에 마땅히 돌려줄 만한 것이라 정해지면 어김없이 내놓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 해야 집에 두고 있는 것들도 근심을 잊고 제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7년 동안의 조선 침략전쟁은 일본에도 엄청난 손실을 안겨 주었지만, 어쨌거나 조선에서 노략질해온 것들은 고스란히 일본의 재산이 되고 있었다. 수많은 문화재, 보석, 서책, 무기, 농기구, 가재도구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그보다 더 소중한 재산은 바로 사람이었다. 유식한 사람은 지식을, 재주가 있는 사람은 재주를,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몸 전체를 일본에 주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다른 무엇보다 전쟁 때 잡아온 피로인들을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야나가와 가게나오가 나섰다.
"그 동안 내가 열세 차례나 피로인을 돌려보냈고 그 숫자가 천여 명에 이르질 않은가."
"그렇습니다. 쓰시마에 와 있는 피로인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만하면 조선도 우리 쓰시마의 한슈께서 피로인들을 송환하기 위해 애쓰신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부교 마에다 게이치로가 소 요시토시를 두둔하고 나섰다.
"물론 그동안 조선에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피로인들을 보내온 덕에 조선 조정의 마음을 열어 이제 곧 사신을 맞게 된 것이지만, 사명당이 와서 쓰시마에 남아 있는 많은 피로인들을 보게 되면 그동안의 우리 쓰시마의 정성이 한낱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어서 각 고을에 남은 피로인을 조사하게 해서, 이번에 송환할 피로인 수를 할당해 주고, 남게 되는 피로인은 되도록 사신 행렬에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은 그동안 송환된 피로인들을 환대하지 않고 죄인 취급하는 일을 잦아 말이 많다고 하는데 쓰시마에 와서 잘 살고 있는 피로인을 굳이 색출하듯 밝혀서 송환하는 일은 그리 아름다운 일이 아닐 듯싶습니다."
마에다 게이치로의 말에 야나가와 가게나오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한슈님, 제가 듣자 하니, 우리 부중 관원 중에 조선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첩이나 하녀나 노예로 부려먹는 숫자가 아주 많다고 합니다.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장정들도 대개 노예로 부리던 피로인들을 내놓았는데 부중 관원들은 그러지 않고 자기 욕심만 챙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차제에 이들부터 색출해서 송환에 솔선케 함이 옳을 줄 압니다."
마에다 게이치로도 얼굴이 빨개졌다.
"그게 나를 두고 이르는 말이오? 나는 집에 조선에서 온 피로인을 두고 있었으나 이미 대다수는 송환하는 데 내보내 조선으로 갔고, 조금 남은 사람들은 모두 송환에 응하지 않아서 그냥 데리고 있으면서 도리어 내 양식을 축내고 있어요."
"그 피로인들이 진짜 송환을 원치 않는지 어떤지 우리야 알 리가 없지요."
또 한 사람의 부교까지 나서게 되자, 좌중에 모인 관원들은 크게 두 패로 나뉘어져 설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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