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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불 (1)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28>

"무얼 그리 골똘히 보고 계시온지요?"

이달의 목소리가 가만히 유정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허균도 유정이 아까부터 미동도 하지 않고 쳐다보고 있는 관우(關羽) 소상(塑像)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에 세 번째 와 보는데, 그때마다 관운장 모습이 더 생생한 듯합니다."

"그렇지요?"

유정은 여전히 소상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남묘(南廟)의 정전(正殿)이었다. 이달과 허균이 여러 날 전부터 송별연을 베풀어주려고 기별을 보냈지만 그때마다 행방조차 알기 어렵던 유정이 굳이 남묘를 지정해 둘을 불러냈다. 유정은 보름째 예조와 복사골 오동수의 집을 넘나들며 왜국으로 가는 배에 싣고 갈 짐을 챙겨온 차였다.

남묘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關王廟)의 하나였다. 관왕묘는 당연히 중국에 있는 것인데, 왜란 때 조선에 와 있는 명나라 군사들을 위해 조선 땅에도 여러 곳에 세워졌다. 명군은 그때 경상도 성주와 안동 등 여러 곳에 이런 사당을 지었고, 왜란이 끝나고도 퇴진하지 않은 명군을 위해 도성 가까운 남대문과 동대문 밖에 하나씩 지었다.

남대문 밖에 있는 관왕묘는 남묘, 동대문 밖에 있는 것은 동묘라 불렀다. 동묘를 지을 땐 중국 황제도 금을 4천냥이나 보내와 관우 상을 금동상으로 빚었는데 그때 조선 국왕도 대신들을 보내 이를 돕도록 했다. 숭례문 밖 도동(挑洞)에 자리한 남묘는 동묘에 비해 규모도 작고 금동상에 비하지 못할 소상을 세웠지만, 그래도 도성에서 한강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들르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이태 전부터는 나라에서도 매년 봄 가을 경칩일과 상강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 아닌가 하네. 중국 삼국시대의 촉한은 유비 현덕의 나라가 아닌가. 명나라가 한의 후예가 다스리는 나라인즉, 마땅히 유비 현덕을 높이 받들어야 할 듯한데 명나라 사람들은 어째서 관운장을 더 크게 모시고 복을 빌게 되었는지 알 수 없구만."

"삼국지연의라는 패설을 읽으면 참으로 매력 있는 장수들이 많이 나옵니다. 지략에 출중한 제갈량도 그렇고, 조자룡 또한 그 사내다움이 으뜸이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관운장의 용감함과 의리를 따를 수는 없지요."

"교산이 이즈음 어째 바깥출입이 뜸하다 싶더니 무슨 패설이라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긴 패설이라도 삼국지연의라면 일합을 겨루어 볼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명나라 사람은 그렇다 쳐도, 우리나라 백성들은 무엇 연유로 관운장 모시기를 이리 좋아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렇지요. 명군이 물러난 게 몇 해인데, 도리어 이 관왕묘는 마치 매일 쓸고 닦은 듯이 반들거리지 않습니까?"

유정은 끝내 두 사람이 하는 수작에 끼어들지 않았다. 두 사람도 정작 하고 싶은 말을 감추고 유정의 등 뒤 쪽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와 있었다.

유정은 한참 만에 돌아서서 정전 밖으로 걸어나왔다.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대 더욱 타는 듯한 날씨였다.

"이런 사당이란 것이 당나라 시절 널리 퍼진 도교의 한 풍습이라 우리 부처의 뜻과는 다르지요. 한데, 기댈 데 없는 백성들은 이 사당으로 와서 복을 빌고 힘을 얻고 가고 있어요. 우리 가엾은 백성들이 아무 것도 주는 것 없는 조각상 하나 앞에서도 이리 위안을 얻고 산다는 게지요. 제가 비록 부처의 말과 법을 빌려 때 묻은 속세의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줄 수 있을까 생각해왔지만, 실은 천년도 더 전에 살다 죽은 중국의 한 장수가 전하는 위안에도 이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큰스님이 그리 말씀하시면, 글 읽는 선비라는 핑계로 무위도식하면서 초연한 척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벼슬자리에 연연해 조정의 명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저 같은 서생은 도무지 무슨 개벽을 바라고 사는지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벼슬을 내놓은 지 벌써 일년여, 허균의 마음에 깊이 그늘이 져 있었다.

"큰스님이 멀리 떠나시게 되니 교산이 의지할 데가 없어서 이리 우울한가 봅니다. 기실은 제 마음도 교산과 다르지 않습니다."

"허허, 이 늙은 중을 위해 두 분이 늘 짬을 내어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오늘은 우리 백성들이 의지하는 관운장의 기운을 받으면서 예서 다과라도 나누었으면 하고 모셨습니다."

해구 일행이 세 사람을 위해 관묘의 배례청 뒤 버드나무 그늘에 평상을 차비해 두었고, 서늘한 데 잘 갈무리해 둔 유과와 전에 못 보던 곡차를 내왔다. 유정은 그 옆으로 글씨가 씌어진 종이 여러 장을 펼쳐 놓았다.

"이 어리석은 중이 국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바다 건너가게 된 것으로 이미 광영된 일인데, 여러 명문 대가들께서 저를 위해 전별시를 써서 보내 오셨습니다. 두 분 문장가와 더불어 이 시문을 보면서 작별의 아쉬움을 달랠까 합니다만......"

승려 신분으로 유정처럼 선비들과 자주 교유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선비들과 어울릴 때 유정은 나이도 당파도 개념치 않았고, 심지어 자신이 승려라는 사실도 잊었다. 유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대신들에게 불씨의 가르침은 불태워 없애야 할 궤변이요 미망이었지만, 그 가르침의 제자인 유정만큼은 언제나 허심탄회한 벗이었고, 나아가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따르지 못하는 진리의 수행자였다. 승려가 다른 많은 중신들을 두고 국서를 받들고 외교에 나서게 된 일은 지극한 수치였지만, 그 일을 수행하게 된 유정은 참으로 고맙고 존경스러우며 동시에 그들을 부끄럽게 했다.

이제 곧 왜국으로 떠나게 된 유정은 거리낌 없이 이덕형에게 전별시를 당부했고, 이덕형은 기꺼이 한 편의 율시를 썼다. 누가 알렸는지 이 일은 주변으로 퍼져 나갔고, 유정을 잘 아는 공신들로부터 이름만 아는 어린 선비들까지 다투듯 시를 써서 보내왔다. 이달과 허균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큰스님께서 이와 기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분이시니, 이분들의 시들이 모두 뜻과 형식이 조화롭습니다."

이달이 찬찬히 종이를 펼쳐 가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허균은 시문을 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짚어 보였다.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이정구, 이수광, 이안눌, 이시발, 이우..... 그야말로 나이나 계층이나 당파를 넘은 교유였다.

성세에 이름난 장수도 많았지만
기이한 공적은 오직 늙은 큰스님의 것이로다.
배는 현해탄을 건너고
혀는 변설의 묘미를 살릴 것이라,
변덕스런 오랑캐가 하는 짓은 한이 없으니
강화로 화친하는 일이 위태로울까 두렵네.
나의 허리춤에 찬 한 자루 긴 칼은
오늘날에 남아 된 것을 부끄럽게 하네.

이달이 이수광이 쓴 시를 천천히 읽고나서 율과 뜻을 한참 따지고 나자, 허균이 다른 시문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아, 여기 이렇듯 멋진 말이 있었네요!"

이달이 허균이 짚은 곳을 소리를 내어 읽었다.

"공자 말씀에 시 삼백편을 외워 암송한들,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외교를 잘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문인 이시발의 공자 말씀을 옮겨 쓴 표현이었다.

"오, 과연! 일찍이 공자께서 외교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우리 큰스님을 두고 미리 해놓으신 말씀이로군요."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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