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은 이 늙은 것을 만나기만 하면 늘 기분 좋은 말씀만 하시는데, 아직 내가 철이 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미 늙어서 듣기 좋은 말만 좋아하게 돼서 그런 건지, 그런 말씀을 듣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 자꾸 웃음이 난답니다. 허허허......"
곡차 탓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시문을 펼쳐 읽으면서 해주는 덕담 덕에 유정의 얼굴이 실제로 환해졌다. 두 사람도 모처럼 기분 좋게 곡차를 마시며 유정의 장도(長途)를 뜻깊은 말로 위로하려 애썼다.
육례원 홍탁이 헐레벌떡 남묘에 찾아든 것은 해가 저물고 있을 때였다.
"큰스님이 예 계신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찾아다녔습니다."
"어쩐 일로 그러시는가?"
해구가 막아서듯 다그쳤다. 아무리 유정을 하늘처럼 받들고 있는 육례원에서 온 사람이라 해도 그곳은 기생집이었다.
"저희 집 행수가 큰스님을 뵙고자 수 일 전부터 찾았사온데......"
해구가 또 다른 말로 야단칠 듯하자 허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생집 행수가 큰스님을 찾는다고 하니 참으로 고얀 일이긴 한데...... 사정이 급한 것 같으니 사연은 들어봐야 할 듯합니다."
유정은 홍탁을 가까이 들이게 했다.
"큰스님, 큰 결례인 줄 알지만 아무래도 저희 집에 납셔 주셔야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요."
"글쎄, 무슨 일인지 말을 하라고 가까이 들이신 게 아닌가?"
"아무래도 저희 행수가 살 날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홍탁을 막던 해구가 먼저 놀랐다. 얼마 전까지 복사골 오동수 집과 봉은사를 드나들며 유정의 장도에 필요한 물건을 사들여 준비하던 도원이 곧 죽는다는 얘기였다. 모두 잠깐 넋을 잃고 말을 하지 못했다.
"저희 행수가 세상 뜨기 전에 큰스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 뵈올 수 없다며 낙담한 채 숨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기방 문을 닫은 지도 사흘입니다. 의원이 다녀갔지만 가망 없다는 건지 고개를 외로 꼽니다. 곁에서 지켜보기 민망해 소인이 누이들한테 큰스님을 찾아오겠다고 이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멀쩡하던 행수가 어인 까닭으로 세상을 뜬다는 건지 모르겠구만!"
허균이 내질렀다.
"벌써 세상을 뜬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나올 때 행수가 토한 피를 한 사발이나 봤습니다."
"각혈이라......"
유정은 절로 염주를 들었다. 잠깐 동안 도원을 처음 만나고부터 지금껏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홍주야, 내가 아무래도 큰스님을 못 뵙고 그냥 가야 하나 보다."
홍탁이 유정 앞에 가 닿고 있을 때 도원은 주위를 물리치고 오직 홍주만을 곁에 두고 있었다.
"큰스님이 너와 홍탁이를 데리고 나한테 오셨을 때 내가 잠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도원은 연신 숨이 가빠지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홍주는 도원의 손을 꼭 쥐었다.
"행수님도 참, 벌써 십년이 다 된 일을 새삼스레...... 말씀을 자꾸 하려고 하지 마시고, 천천히 그냥 천천히 편하게 말씀하세요. 숨을 길게 길게 쉬시고요."
"아니, 정말 내가 그때, 큰스님이 너를 데리고 왔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느냐니까!"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행수님?"
궁금해 할 틈이 없었다. 홍주는 도원의 손에 남은 온기를 붙들려 애썼다.
"너희 남매가 그때 난리 통에 제대로 먹지를 못하고 꼭 마른 장작 같아 보였느니라. 큰스님이 남쪽에서 올라오실 때 어디에선가 너희 남매를 구해 와서 나한테 데려오질 않았느냐."
"예, 그랬지요. 그때 행수님을 처음 뵙고 그저 큰이모시다, 하고 생각하고 오늘까지 행수님 곁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도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홍주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부모 없이 조부모 밑에서 자라던 홍주 남매는 난리 통에 조부모와 생이별을 했고, 경상도 김천 관아에 의탁해 관노비처럼 지내다가 왜군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걸 구한 사람이 의승장 유정이 이끌던 의승군이었다. 유정은 상경하던 길에 둘을 데리고 와, 피난 갔다가 환도해 간신히 육례원 집을 일으켜 세우고 있던 도원에게 맡겼다.
"홍주 네가 그때, 한 손으로는 홍탁이 손을 잡고 한편으로는 큰스님 뒤에 바짝 붙어서서 큰스님 몸에 의지하고 서 있었단다. 내가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는 모르지?"
핏기가 가신 도원의 얼굴이 야릇한 홍조를 띠었다.
"행수님, 너무 힘이 드시면 나중에 말씀하세요."
"내가 큰스님을 만난 게 스물둘이었단다. 이미 혼인도 한번 했고, 아이까지 낳은 몸이라 해도 그래도 그만하면 꽃다운 나이가 아니었겠느냐. 그때 큰스님 연세가 불혹을 막 넘기셨을 게다......"
도원은 처녓적에 아버지가 정혼해 둔 남정네가 그만 황달에 걸려 죽은 일이 있고부터 시름시름 앓으며 지냈다.
홀어미가 처녀귀신이나 면해라 하고 마을의 늙은 생원 첩으로 들여보냈는데, 애를 배자마자 늙은 서방이 아이가 누구 씨냐고 다그치면서 발길질을 해댔다. 어느 날 하도 두들겨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노인을 밀친 것이 그만 노인이 쓰러져 영영 못 일어나는 일로 번지고 말았다. 사람 죽인 죄로 관아에 끌려가 물볼기를 맞았고, 그 몸으로 낳은 아이를 백일도 못 넘기고 잃고 말았다.
"내 살던 곳이 큰스님 고향 마을이었단다. 그때 내가 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 자진하려 했는데, 우연히 천하를 만행하시다 고향 산을 오르시던 큰스님 눈에 띄었지 뭐냐."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행수님."
"그래, 아무한테도 얘길 하지 않았지. 그때 큰스님이 아무 말도 없이 내게 손을 내밀더구나."
도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기침을 했다. 물컥 하고 핏물이 뿜어졌다.
"나는 그냥 그 손을 잡았는데, 그 손이 마치 하늘에서 오신 하늘님의 손이 아닌가 싶게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할 수가 없었단다. 그 손을 붙들고 내가 꺼이꺼이 소리를 내어서 울었지. 한참 울고 나서 눈을 떴더니 내가 큰스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더구나. 이슬을 피해 들어간 동굴 속이었고. 하룻밤을 그렇게 꼬박, 큰스님은 꼼짝 않고 앉으신 채였고, 나는 잠만 질기게 잔 것이었단다."
"어쩌면......"
홍주도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홍주가 유정의 의승군에게 구해진 것도 왜놈들한테 더럽혀져 여러 번 자진을 결심하던 차였다.
"큰스님 몸에 내 몸을 가까이 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그 뒤로 큰스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설렜고, 오래 못 보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서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단다."
"예, 행수님. 그건 알아요. 저도 알아요."
홍주는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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