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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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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불 (3)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30>

"그런데, 그날...... 큰스님이 너와 네 동생을 데리고 나를 찾아오셨을 때......"
  
  도원은 말을 멈추고 한동안 숨을 가다듬었다. 도원이 걷어찬 이불을 홍주가 가볍게 덮어주었다.
  
  "예, 행수님...... 무얼 말씀하시려는 건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처음에 제가 왜놈들한테 끌려가 있다가 큰스님 힘으로 풀려나올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저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어차피 더럽혀진 몸을 고향도 찾을 수 없었고, 동생을 거두어 먹이고 혼자 살아갈 힘도 없었으니까요. 그런 저를 큰스님께서 거두어 주시면서 세상에 하찮은 것들도 다 살아서 할 일이 있다는 걸 깨우쳐 주셨지요. 불과 며칠 동안의 일이었지만, 정말 이 세상에 모든 죽어가는 것에 생명이 들게 하는 빛 같은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저에게 큰스님은 그 빛과 같은 어른이었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그저 큰스님만 따라 다니고 싶었습니다. 제 목숨의 은인이 큰스님일 뿐 아리라, 제 목숨이 또한 큰스님이 계셔야 뜻이 있는 목숨이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큰스님이 저와 제 동생을 여기 육례원에 데리고 오시더군요. 저를 버리지 말라고, 큰스님만 따라 다니게 해 달라고 염치 불구하고 울며 떼를 쓰다 큰스님 손에 끌려오다시피 해서 도성으로 들어왔고, 그때 행수님을 처음 뵈온 거지요."
  
  도원이 아무 말이 없자, 홍주가 행수님, 하고 가볍게 불렀다.
  
  "호호......"
  잠든 듯싶던 도원은 가벼운 소리까지 내며 웃음을 흘리고 있다가 말을 받았다.
  
  "그날, 봄날이었다. 아직 난리 중이었고, 내가 기방을 다시 열기는 했으나 이 집 꼴도 아직은 겨우 산골 주막 같은 꼴만 면한 때였지. 큰스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맨발로 달려 나갔는데, 문 밖에 큰스님이 계셨고, 큰스님 뒤에 숨어 날 보는 얼굴이 있었는데, 그 얼굴이 정말 복숭아처럼 곱고 환하더구나. 정말이란다. 그때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던 네가 말이다. 내 눈에는 정말 그랬다. 그때 네 얼굴처럼 곱게 보인 얼굴은 다시 없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너는 참 고운 아이였지만, 그땐, 너 열여섯, 내가 굳이 댈 나이도 아닌데, 갑자기 투기가 날 듯 고와 보이더구나. 아니, 정말 내가 그때 널 얼마나 투기했는지 아니? 아, 큰스님이 너를 무척 아끼셨구나, 그리 생각했지. 네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었어. 저는 이 분의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행수님도 참......! 절 그리 생각하셨다니! 그리 생각하시고 저한테 일년 동안이나 허드렛일만 시키셨다는 거지요. 실은, 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대로 큰스님한테 섭섭한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일년 만에 스스로 기생이 되겠다고 나섰구요."
  
  "그래, 그래, 기생이면 어떻고, 기생이 아니면 어떠냐. 살아생전 부모보다 나랏님보다 낭군보다 더 크고 귀하신 분을 마음에 두고 가끔은 가까이 뫼실 수도 있었으니 죽어서 한이 될 게 무어 있겠느냐."
  
  "그러니 죽는단 말씀 마시고, 큰스님 왜국 다녀오시는 것도 보고 그러셔야지요, 행수님."
  
  "그래, 너하고 나하고, 큰스님이 왜국에 잘 다녀오시게 입으실 것, 잡수실 것, 즐기실 것 다 챙겨드리고, 무사히 다녀오시는 것 기원해 드리고, 다시 돌아오시는 걸 봐야 하는데......"
  
  도원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홍주는 도원의 손에서 맥을 짚었다. 아직 명을 이을 맥이었지만, 가끔 쏟아내는 피만은 막을 길이 없어 암담했다.
  
  "홍주야, 날 좀 일으켜다오."
  
  도원은 한참 만에 눈을 떠서 물을 청해 입술을 적시고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댄 채 한쪽 손을 들어 다락문을 가리켰다.
  
  "큰스님한테 전해 드릴 게 있다."
  
  홍주가 도원의 손길을 따라 다락문을 열었다. 육례원 사람 중에 그 다락 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홍주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거기 쌓인 비단과 종이를 내 오는 심부름을 여러 차례 하면서, 그곳에 도원이 숨겨온 패물이 꽤 있겠거니 짐작만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도원은 위에 낡은 서책 여러 권을 쌓아올린 허름한 문갑을 열게 했다.
  
  "거기 문갑 아래......"
  
  홍주는 도원이 시키는 대로 문갑 아래에서 쇳대를 찾아냈다. 문갑 가운데 서랍 속에 청동으로 된 패물 몇 개가 있었고, 그 안에 다시 작은 서랍 하나가 있었다. 그 속에 뭉툭하고 긴 벼루 같은 것이 한지에 쌓여 있었다.
  다락에서 내려오자마자 홍주는 다시 도원의 손목부터 짚었다.
  
  "큰스님을 뵙지 않고 죽는 게 더 낫다 싶구나."
  
  "행수님, 홍탁이가 큰스님을 찾으러 나갔으니 큰스님이 오실 것입니다. 마음 편히 하시고, 하실 말씀은 그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서 누우세요."
  
  "너는, 내가 죽는다는 말을 전해 들으셨다고 큰스님이 그 일로 예 오실 것 같으냐?"
  
  홍주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걸 펴 보아라."
  
  홍주는 문갑에서 꺼내온 물건을 풀었다. 뜻밖으로 먼지가 일지 않았고, 한지 사이로 가져나올 때 못 느끼던 광채가 비쳤다.
  
  "아, 이건!"
  
  홍주는 깜짝 놀랐다. 여러 겹 한지를 벗긴 안에서 뿜어진 광채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건, 이건!"
  
  홍주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도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그래...... 이 불상으로 큰스님을 내 곁에 두려고 했다...... 내가 죄인이지. 큰스님한테는 내가 죄인이지."
  
  도원은 불상에 손을 뻗다 말고 중얼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홍주의 손에서 누른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물건은 금동으로 된 불상이었다. 부처가 이층으로 된 연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했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법의를 입은 모습으로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했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린 촉지인(觸地印)이었다.
  
  홍주는 두 손으로 불상을 감싸 보았다. 손에 살풋 감싸질 만큼 작았다. 홍주가 처음 유정에게 구해져 가까이 모시게 된 며칠 동안, 유정이 아침마다 바랑에서 꺼내 손으로 닦아 모시고는 예불을 드리곤 했다. 그 뒤로 유정이 예불을 드리는 걸 자주 뵀지만 이 작은 불상을 꺼내는 걸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걸 행수 도원이 가지고 있었다니 참으로 믿기 어려웠다.
  
  "행수님, 행수님......"
  
  홍주는 비스듬히 쓰러진 도원을 자리에 곱게 눕혔다. 도원이 손을 저어 홍주가 쥐고 있던 금동불상을 더듬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이걸, 홍주야...... 큰스님께 돌려......"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도원이 사명대사 유정의 바랑에서 훔쳐 가지고 있던 작은 불상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지니고 다니는 일종의 호신불이었다. 역사의 기록으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라마불교 양식으로 만들어진 높이 9.4m 크기의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으로 사명대사 유정이 마흔 살 무렵부터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 금동불상에는 사명대사 유정이 직접 쓴 원장(願狀)이 복장[腹藏]으로 들어 있었으니, 그 글에 부처께 귀의해 중생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불상은 사명대사 유정이 입적한 뒤로 금강산 건봉사 낙산암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1900년대에 어디론가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던 것이 100년도 더 지난 2007년에 포항 대성사에서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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