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구가 몸을 떨면서 두 손으로 자기 몸을 감싸는 시늉을 했다.
"아직 일러. 엄살떨지 말고 더 들어가 봐."
유정의 발걸음은 더딘 듯하면서도 언제나 남보다 앞섰다. 좀전까지 땀을 뻘뻘 흘리던 해구의 몸에서 스멀스멀 김이 솟고 있었다. 서늘한 기운은 계곡이 깊어질수록 더해갔다.
"이러다가 한가위도 되기 전에 얼어 죽었다는 얘길 듣겠습니다."
행자들 사이에서는 호랑이라 불리는 해구지만 유정 앞에서는 절로 어린 동자승이 되었다. 뒤를 따르던 준하가 입술로 삐죽 하면서 해구를 가리키자 다른 행자들이 킥 하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6월 22일 서울을 출발한 사절단이 양재, 송파, 충주, 문경, 김천, 청도를 거쳐서 밀양에 가 닿은 게 사흘 전이었다. 보름 동안 구름 한 점 없는 염천 속을 걸어오느라 모두들 몸이 늘어졌다. 밀양 부사가 내주는 배를 타고 밀양강을 건너가 까치원[鵲院]에 여장을 풀었다. 도원의 장례를 치러주고 오느라 이틀 늦게 출발한 오동수 일행이 도착해서 장도에 오를 비품과 장비를 다시금 정비하고 점검했다.
부산 감영에서 오는 파발을 기다리는 동안 유정은 혼자 나들이 채비를 하고 배를 대게 했다. 그걸 보고 해구가 몇 행자들을 다그쳤다.
"여기는 큰스님이 태어나신 고장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큰스님을 수행하고 왜국까지 가야 하는 승려들로서는 마땅히 따라 나서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하나라도 더 받아서 동행하는 것이 옳을 터!"
더위를 먹은 듯 비실거리던 행자들이 유정에게 하소연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웬일인지 유정도 해구 말을 좇았다.
"이만한 더위에 드러누워 버리면 바다는 건너가보지도 못하고 기진맥진할 게다. 날 따라 나서는 사람들은 이제 곧 정기가 넘쳐서 주체를 못할 경지가 될 게야. 허허허."
눈치 빠른 행자들은 유정의 웃음에서 뭔가 신기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준하와 승나가 따라 붙겠다고 나서니까 오동수를 도와 물품을 살펴보던 강진석와 하명구도 기웃거렸다.
![]() |
유정이 이들을 모두 배에 태우고 강 상류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갔다. 배에서 내리고도 마을을 두 곳이나 지났다. 오후 나절에야 당도한 곳이 밀양의 주산인 재약산에 자리한 영정사(靈井寺)였다. 영정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 바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었다.
"불가에 몸을 의탁한 중이라면 이런 명찰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암!"
영정사 일주문 앞에서 서서 해구가 행자들을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행자들이 느끼기에도 실로 그럴 만도 한 절이었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약초 향기에 취해 하루를 쉬어가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나니 몸이 아주 개운해 아예 그 산 기슭에 초가 한 채를 짓고 수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에 산 중턱의 대나무 숲에서 오색서운(五色瑞雲)이 서리는 것을 본 원효대사는 그 자리에 가람을 짓고 대나무 숲에서 이름을 따와 죽림사라 붙였다. 그 후 흥덕왕 때 인도에서 황면 스님이 부처의 진신사리 석 점을 가져와 이 죽림사에 석탑을 세우고 봉안할 때 그 이름이 영정사로 바뀌었다. 진성여왕(889) 때는 이 절에서 보우국사(普佑國師)가 승려 500명을 모아 공부를 시키면서 크게 선풍이 일어났고,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는 일연국사(一然國師)가 천여 명의 대중을 맞아 불법을 중흥해 동방의 선찰로 이름을 알렸다.
"바로 여기가 큰스님의 고향이라는 말이구나."
"아니야, 큰스님은 김천 직지사에서 출가를 하셨으니 큰스님 고향은 직지사라고 해야지."
"그래도 이런 명찰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셨으니 큰스님에게는 여기가 불심의 고향이라고 해야지."
"그렇지. 큰스님께서 왜란 때는 이 인근에다 의승군의 주둔지를 마련해 농사도 짓게 하고 총포술도 단련시키고 그랬으니까, 큰스님에게는 이곳이 고향 이상으로 뜻깊은 곳이라 할 수 있겠어."
영정사에서 예불을 드리고 그늘에서 쉬게 된 행자들이 저마다 자신이 따르는 대선사의 신화 같은 시절을 그려 보았다.
밀양의 고라리에서 태어난 유정은 어릴 때 몸이 아픈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재약산에서 약초를 캐면서 영정사에 드나들었다. 나중에 스승 황여촌의 본가가 있던 김천의 직지사에 출가를 하게 되지만, 유정의 불심의 시발지는 이 영정사라 해도 좋았다.
왜란 때 명군과 어울려 왜군을 남쪽으로 밀어내며 남하한 유정은 의승군을 이 영정사 일대에 주둔시키고 농사를 지어 군량미을 비축하게 하고 한편으로 재약산 사자봉의 드넓은 사자평에서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 덕분에 나중에 동남쪽으로는 경상도 울산과 서남쪽으로는 전라도 순천에서 왜군을 격파할 때 숙달된 의승군과 비축해 둔 군량을 활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뒷날의 일이지만, 사명대사의 고향 밀양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기허대사 영규 등 세 선사를 모신 표충사(表忠詞)가 세워진다. 현종 때(1839) 천유화상이 표충사(表忠祠)를 이곳 영정사로 이건(移建)하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바뀌게 된다.
표충사는 사(祠)도 있고 사(寺)도 있는, 바로 불교계의 명승이면서도 유교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교류하면서 충정으로 구국에 임한 사명대사의 삶과 정신이 함께 깃들어 있는 곳이다. 국보인 청동함은향완과, 표충서원이며 삼층석탑, 석등 등의 문화재도 이 절에 보관되어 있고, 사명대사가 입던 금란가사와 장삼도 여기에 있다.
영정사를 둘러보고 곧 하산해서 까치원으로 돌아갈 줄로 알았던 행자들은 유정의 이어지는 행보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란 때 이곳에 와서 유정을 받들었다는 해구조차 가본 적이 없는 산행이었다.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서는 동안 유정은 지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거슬러 계속 깊은 곳으로 올라갔다. 지쳐 주저앉을 듯한 더위는 잠시였다.
어딘가에서부터, 비오듯 흐르는 땀을 서늘한 기운이 빨리 식힌다 싶더니 이어 한기가 밀려오는 듯했다. 좀전까지 덜덜 떠는 듯한 해구를 보고 비웃은 행자들도 저마다 제 몸을 감싸야 했다.
"하하하, 추우냐?"
갑자기 유정이 파안대소하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지금 가을을 지나 한겨울 속으로 들어와 있다. 저길 보아라!"
유정이 계곡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행자들은 깜짝 놀랐다. 계곡물은 물이 아니라 투명한 얼음이 되어 있었다. 눈을 비비고 봐도 여름도 다 가지 않은 때에 언 계곡물이 분명했다. 잠깐 동안, 승려의 몸으로 왜적을 쳐부순 일을 두고 신통한 법력으로 도술을 부렸다는 소문이 떠돌던 게 사실이 아니었나 여겨질 정도였다.
"하하, 여기가 그 유명한 얼음골이로군요!"
그제서야 해구가 소리쳤다.
"얼음골?"
행자들이 웅성거렸다.
재약산 북쪽 중턱의 골짜기는 예로부터 시례빙곡(枾禮氷谷)으로 불리던 얼음골이었다. 초여름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해서 삼복더위가 지나도록 그 얼음이 다 녹지 않았다. 어린 시절 유정은 병든 아버지를 위해 한여름에 이곳에서 얼음을 캐다가 얼음찜질을 해드리기도 했다.
"그동안 무더위에 오래 시달렸으니, 이곳 얼음골에서 푹 쉬고 있으려무나."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 이 소설을 무단으로 다른 사이트로 옮겨 가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