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즉시색, 공이 곧 색이고, 색이 곧 공이로다, 물이 곧 얼음이고 얼음이 곧 물이로다!"
유정이 떠나자 해구가 행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반야심경의 한 대목을 따와 한바탕 훈시부터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얼음으로 에워싸인 동굴 속에서도 단전에 기를 모으고 참선을 하고 보니 아침에 그 동굴에서 온천물이 흘러내렸다는 옛 선사 얘기를 할 때는 그럴싸하게 들렸다. 행자들도 듣고 배운 걸 흉내내 빙곡의 찬 기운이 감도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스스로 체열을 내 보았다.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이제 우리는 지금 도를 닦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왜국으로 왜인들을 만나러 간다는 걸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해구의 말을 듣고 있던 하명구가 슬몃 끼어들었다. 말꼬리를 잘린 해구가 못마땅해 하는 표정을 짓자 강진석이 웃으며 나섰다.
"큰스님을 수행하고 가는 우리들로서는 왜국에 가서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큰스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면 될 일이나,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차제에 왜국과 왜인들에 대해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을 성싶어서 드리는 말씀이지요. 실은 큰스님께서 틈이 날 때 행자들한테 아는 대로 얘기를 해주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강진석이 눈짓을 하자 하명구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시작했다.
"저희가 왜를 알게 된 것은 김충선 영감의 제자로 있은 덕입니다. 김충선 영감께서 저희에게 큰스님을 모시라 이르신 까닭은 저희가 조금 알게 된 거라도 알려 드려서 왜국에 가서 어떤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해 나가게 하기 위함일 것이지요."
"그렇지요, 그건."
해구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행자들도 제각기 이리저리 널부러진 채로 두 사람의 말을 듣게 되었다.
"왜란은 왜의 관백 풍신수길이란 놈이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으로 가서 제 손으로 천자를 임명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쳐들어온 전쟁입니다. 마땅히 조선은 자기네 부하가 다스리게 되는 걸로 생각했지요. 이 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하는 것은, 전쟁이 끝난 지금의 왜국의 처지를 보면 잘 압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풍신수길은 죽어 버렸고, 그 어린 자식이 풍신수길의 대를 이으려 하니까, 덕천가강이라는 자가 그걸 막고 스스로가 관백이 되어 버렸어요. 근데, 풍신수길의 명을 받고 조선 침략에 나선 바 있는 쇼군들이 이때 덕천가강 편과 그 반대편으로 나누어 죽자사자 싸우느라 한동안 국정이고 뭐고 없이 온나라가 피비린내 나는 전란에 휩싸였지요......"
"아, 이 사람 이제 보니 조금 아는 걸 가지고 되게 학자연하는구만, 이바구를 너무 길게늘어놓지 말고 그냥 풍신수길 얘기만 해."
하명구의 말을 강진석이 사투리를 섞어 슬쩍 눌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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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이 제 명에도 못 죽고 결국 제 아들까지 죽게 만들었는데, 사실 그런 결과야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든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은 자신을 위해서나 왜국을 위해서나 결코 옳지 않은 무모한 일이었다 이 말씀입니다."
"그리 무모한 일을 풍신수길이 무엇 때문에 저질러서 우리 조선을 이렇게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요?"
승나가 조바심을 내자, 하명구는 더 여유를 찾았다.
"예, 바로 그 말씀을 해 드리려고 우리가 나선 겁니다. 왜인들은 말이지요, 일단 무리가 뜻을 합한 일에 앞에서는 한 사람도 이를 어기지 못합니다. 만일 누군가 그 뜻을 어기면 그건 죽음을 각오하든가, 아니면 세를 키워서 자기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요. 무리의 뜻 앞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이걸 왜인들은 '화(和)'라 합니다. 화를 해치면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는 걸 역사를 통해서 경험해 온 자들이 바로 왜인들입니다. 풍신수길은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인 조선을 쳤습니다. 그게 과욕이라는 걸 다 알지만 일단 뜻이 그렇게 정해진 이상 싫어도 모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풍신수길이 조선으로 군사를 내보는데 가장 반대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면, 바로 우리 조선의 도성이며 저기 평양까지 쳐들어간 소서행장입니다. 그리고 그 사위였던 대마도주 종의지 역시 침략을 막으려 애를 썼지요. 그러나 일단 풍신수길 입에서 침략이 선포된 이상, 목숨을 건 반란이나 자결 같은 것이 아니면 무조건 따라야 했기 때문에 그 자들이 바로 침략의 선봉에 섰던 겁니다. 우리 스승 김충선 영감께서 어째서 조선에 오자마자 바로 항왜가 되었느냐 하면, '화'를 빌미로 모든 무사며 백성들이 모두, 다스리는 자의 뜻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왜국이 싫어서였지요. 왜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속마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전체의 화를 해치지 않기 위해 다른 뜻이 있어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게 습관이 된 사람들이 왜인들입니다."
"김충선이면 왜인 사야가가 아닌가."
한 행자가 모른 척하고 비꼬는 말을 했다. 해구가 도리어 진지해져서 물었다.
"듣고 보니 알 것도 같습니다. 내가 큰스님을 따라 왜인들을 대한 적이 있었는데, 왜인들은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대답을 할 때는 아주 신속하고 확연해서 마치 모든 문제가 어려움이 금세 다 풀릴 것 같구나 싶었지요. 한데, 나중에 보니 그것은 상대의 말을 다 들었다는 뜻이었지 그대로 따라 행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겉으로만 보면 모두 한마음처럼 말하고 움직여서 함께 잘 사는 듯한데, 실은 그렇지 않고 혼자 떨어져 살게 되거나 무시당할까봐 억지로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인들은 칼을 쓰는 무사가 가장 높은 계급입니다. 칼을 쓰는 무사 앞에서는 일단 말하는 걸 다 듣고나서 행동해야지 그렇지 않고 쉽게 행동하다 당장 칼부림부터 나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 대답할 때도 뜻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대답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이상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의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또 칼부림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인들은 우선 겉으로는 상대를 받아들이고 또 자기 뜻도 분명하게 밝힙니다. 일본 사람들이 말을 아끼고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지키려는 습성이 붙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무사들은 신의를 중시해 스스로 신의를 어겼다 싶으면 서슴없이 자결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무사도 정신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유지하는 큰 축입니다."
"칼을 들고 남을 베는 일이 다반사인데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는지 알 수가 없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야."
준하가 중얼거렸고, 승나가 역시 못마땅해서 물었다.
"풍신수길의 침략 전쟁이 분명 조선한테 엄청난 죄를 범한 것은 물론이고 왜국 스스로한테도 무모한 국력 소모였는데, 어째서 왜국은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거지요?"
"풍신수길이 하늘의 벌을 받아 전쟁 중에 죽었고, 그 후유증으로 큰 혼란이 왔지만, 그 전쟁은 '화'라는 대의명분 아래 치러진 국가 대사였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면 나라 전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설사 많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속으로 품어도 결코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본 마음은 진짜 서로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아니면 섣불리 털어놓지 않지요. 이 점 왜인들을 상대할 때 반드시 알고 계셔야 합니다."
하명구도 실은 잘 알 수 없었다. 강진석과 자신에게 왜국과 왜인에 대해 알리고 가르쳐서 마침내 왜국으로 들여보내는 스승 김충선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조선에 와서 그 누구보다 대단한 충정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받들었고,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고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 놀라운 집념이 어쩌면 왜인들의 한 모습이 아닌가 싶어 두려움마저 일었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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