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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례빙곡(枾禮氷谷)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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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례빙곡(枾禮氷谷) (3)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33>

유정은 양쪽으로 바위가 깎여 나간 협곡으로 한참 걸어올라갔다. 오랜 풍화로 갖가지 모양의 그림이 빚어진 절벽이 장관이었다. 조선 팔도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유정이지만 이 정도 절경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터였다.

"큰스님, 제가 왜국에 대해 아는 걸 많이 일러 드렸는데, 여담 같지만 하나만 더 보태겠습니다."

유정은 봉은사 뒷숲에서 한강의 절경을 함께 내려다보던 김충선이 하던 말을 얼핏 떠올렸다. 왜인들이 일구어온 칼의 역사가 싫어 예의 나라 조선을 흠모해 오다가 상륙하자마자 곧바로 투항을 해온 김충선이었다. 마땅히 칼을 든 왜인들의 풍습을 경계해 주는 데 말을 아끼지 않았고, 더구나 조선에 와서 수하에 두고 가르친 하명구와 강진석까지 유정을 따르게 해 행여 있을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해 주었다.

"아시다시피 왜국은 여러 개 큰 섬으로 나라를 이루었는데, 큰스님께서 배를 타고 그 섬들을 들르시게 되면, 그 풍광이 매우 기이하고 신비롭다는 것에 놀라실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왜란으로 원수 같은 왜적한테 전국토를 유린당한 조선 사람들로서는 극악무도한 오랑캐들이 그런 절경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어른이 되어 조선에 와 살면서 조선의 산하 또한 가히 금수강산이라 할 만한 곳을 알고 가서 보고 즐기기에 이르렀습니다만, 왜국의 풍광은 조선과 달리 산과 바다, 숲과 바람과 빛이 이루는 기묘함이 또한 신이 빚은 듯한 곳이 많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가까이 드나드는 절이나 신사 같은 곳이나 힘깨나 쓰는 무사들 집에는 기이한 돌이나 나무들로 새로이 꾸며 놓은 것이 마치 그림같이 오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절단의 동행인들이 미리 이를 알고 놀라지 않음이 옳을 것입니다."

유정은 한쪽 절벽을 타고 올랐다. 그 절벽의 반대편 아래쪽으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움푹 파인 절구 모양의 지세가 내리꽂히듯 하는 폭포를 받아 소를 이루었다. 유정은 굵은 폭포수가 마주 보이는 바위 위에 앉았다. 어쩌면 다시는 대하지 못할 고향 산천의 오묘한 경치였다.

왜국의 풍광이 과연 김충선의 말대로 신의 손으로 빚은 듯하다 해도 과연 이 정도일까 싶었다. 그러나 유정은 그런 생각마저도 버렸다. 왕명을 받은 신하로서의 식지 않은 뜨거움과 그 한쪽에서 이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함께 저 떨어지는 폭포수로 떠밀어 보냈다.

조선시대에 왕명을 받은 공식적인 사절단이 일본으로 간 일은 모두 스무 차례였다. 이 중에 '통신사'란 이름으로 간 것이 세종 때부터 시작해서 임진왜란 전까지 여덟 차례였고, 왜란이 종결된 이후 19세기까지는 '조선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열두 차례 행해졌다. 이 외에도 대마도주와 외교를 다지는 사절로 주로 역관(譯官)이 지휘하는 역관사 행렬이 대마도를 드나든 일이 수 십 차례였다. 모두가 국가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간 사절단이었다.

사명대사 유정이 이끄는 행렬은 그런 중에도 탐정을 하고 교린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임무를 띤 사절이었다. 명을 내린 국왕도 절차를 밟아준 비변사나 예조도 무엇을 어떻게 하고 오라는 정확한 지침을 내려주지 못했다. 모든 게 유정의 몫이었다. 유정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유정은 소를 내려다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유정은 한참 만에 일어나 소 가까이로 걸어 내려갔다. 물이 얼음 같았다.

유정은 아예 세수를 하려고 몸을 구부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있었다. 얼른 몸을 일으켜 주위를 경계했다. 물가를 따라 소리나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았다. 폭포가 내려꽂히는 절구 모양의 소 한가운데가 눈에 잡힐 듯 들어왔다.

"아니, 저 사람이?"

유정은, 소 한가운데 들어가 얼굴만 물 밖으로 내놓고 앉아서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포를 맞고 있는 한 사내를 보았다. 얼음처럼 찬 물 속에 몸을 담근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바위를 쪼갤 듯 쏟아지는 폭포를 이마로 받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 표충사전경.

"이것 봐요! 거기서 무얼 하고 있소!"

유정이 손짓을 하면 소리쳤지만, 물 속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유정은 물가의 바위를 징검돌 삼아 소 가운데 쪽으로 두어 걸음 몸을 옮겨 보았다. 그러다 한순간, 몸이 기우뚱해져서 하마터면 미끄러져 물속으로 쓸려 들어갈 뻔했다. 그때 정말 유정은 놀라운 것을 보고 말았다.

물 속에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키는데, 그 사람은 사내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지는 그 몸은 장성한 여자의 말몸이었다. 아니, 유정이 진짜 놀란 건 그 다음에 일어났다. 알몸으로 소 가운데서 폭포를 맞고 있던 그 여자는 바로 육례원 기생 홍주였다.

"아니, 이럴 수가!"

유정은 홍주에게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 바로 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뒤에서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실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유정의 뒤켠 나무 뒤에서 말소리를 낸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례원의 홍탁이었다. 홍탁은 벌거벗은 홍주 쪽으로는 눈을 두지 않고 유정 옆으로 비껴 섰다.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이냐?"

유정은 꾸짖듯 소리쳤다. 홍탁은 유정을 바위 위에 앉게 했다. 홍주는 소 안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여전히 쏟아지는 폭포를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죽은 행수가 저희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행수가 큰스님을 처음 뵌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시면서, 큰스님이 반드시 여길 들르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유정은 잠시 도원 생각에 눈을 감았다 떴다.

"오별감한테 도원 장례 때 얘기는 들었다. 영가(靈駕)는 봉은사 명부전에 잘 모셨느냐?"

"저희를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행수의 유언인지라 출상은 부행수에게 모두 맡기고 서둘러 달려왔사옵니다."

"언제 왜국에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너희 행수 천도재는 내가 반드시 치르고 싶구나."

"행수가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한데, 너희 행수가 너희들을 이곳으로 보내 나를 기다리게 한 연유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홍탁이 여전히 고개를 외로 꼬며 천천히 답했다.

"행수가 죽지 않았으면 아마도 몸소 여기로 왔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큰스님, 이제 저희를 거두어 주셔야 할 듯싶습니다."

홍탁이 유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유정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물속에 있던 홍주가 알몸인 채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소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홍주의 알몸이 현란하게 빛을 뿜어냈다. 이쪽에서 보고 있는 눈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홍주는 전혀 감추는 기색도 없이 물 밖으로 걸어나가 흰 천으로 물기를 닦고는 바위 위에 걸쳐 놓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잠시 뒤 유정은 홍주가 입은 그 옷이 승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홍탁이 큰소리로 말했다.

"큰스님, 저희는 이미 저 혼탁한 왜란 때부터 큰스님이 아니 계시면 살아 있는 뜻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큰스님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겠습니다만, 모든 것은 큰스님 곁에서만 죽고사는 일이 뜻이 있사옵니다. 저희가 큰스님을 따르겠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는 사이 매무새를 가다듬은 홍주가 유정 곁으로 다가왔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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