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육지 사이에 끼여 있는 좁고 긴 바다를 해협이라 하는데, 다른 말로는 수도, 목, 도, 샛바다라 했다. 특히 만이나 큰바다로 바로 연결되는 좁은 해협은 특히 조류가 빠르고 바람의 방향이나 속도가 표변하기 쉬하기 쉽고, 때에 따라 물이 크게 소용돌이치는 일명 와류(渦流)가 일어나기도 한다. 부산과 대마도 사이가 바로 그런 해협이었다. 전체 길이가 대체로 200Km인 이 해협의 가장 좁은 협부가 50Km, 그러니까 부산과 대마도의 최북단까지가 불과 50Km 거리라는 얘기였다. 이즈음은 쾌속정을 타고 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조선시대에도 도중에 거친 풍랑이나 폭우를 만나지 않으면 바람과 바닷물의 흐름을 타고 하루이틀 사이면 가 닿았다.
배를 타고 양 육지를 건너갈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후였다. 특히 오늘날에 비해 당시 돛을 달고 가는 항해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자연현상은 바로 바람이었다. 바람은 넘쳐도 곤란했지만, 그 반대로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조류를 타기도 하고 때로 거슬리기도 하면서 가야 할 뱃길에 절대적인 것이 또한 알맞은 바람이었다. 난파나 조난까지는 아니더라도 배가 뒤집힐 듯한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이 잦았고, 방향을 잘못 잡아 표류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조선 세종 때 우리 조정으로부터 대마도체찰사로 명받은 적이 있는 이예(李藝)의 무수한 대일 외교 공적은 사실 왜구에게 끌려간 어머니를 찾아나선 항해에서 표류해 우연히 이끼 섬에 가 닿은 데서 시작되었다. 또 뒷날의 일이 되지만, 숙종 29년(1703) 역관 한천석(韓天錫)이 이끄는 역관사 행렬 108인과 대마도 측 4인이 대마도의 와니우라[鰐浦]로 들어가던 중 조난을 당해 전원 실종되는 비극도 발생한다.
이처럼 위험한 여정이라 나라 일로 왜로 가는 선단일수록 출항일 선정에 고심했다. 유정의 이끄는 사절단도 부산에 와서 보름이나 지체하면서 하늘과 바다의 기운을 살폈다. 바람이 아주 없어서 수일 째 바람을 기원하는 기풍제(祈豊祭)를 올렸고, 조금씩 바람의 기운을 발견하고 드디어 배에 올라 항해를 시작한 때가 갑진년(1604, 선조37년) 8월 20일 새벽이었다.
의외로 순조롭게 항해하던 배는 대마도 북서쪽의 대륙붕에 들어서면서 심한 파도를 만나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행자들 몇이 사색이 되어 속엣것을 쏟아냈고, 핀잔을 주던 해구도 한참 뒤에 메슥거려오는 속을 달래지 못해 한참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배는 이내 순탄하게 먼 바다까지 불빛을 전하는 어두운 항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격군으로 참전한 바 있는 노동선과 문진수를 비롯해서 왜란 때 해전을 겪은 군인 출신들이 여럿 끼여 있은 것이 다행이었다. 두 사람의 노련한 지휘로 배는 안전하게 사스나우라[佐須浦]에 닿고 있었다. 세 척의 배에 나눠 탄 일행들 사이에서 연이어 탄성이 터져 나왔고, 그러자 온 바다, 그 안의 물고기들까지 잠에서 깨어나 돌아다니느라 현란한 불빛이 마구마구 뿜어졌다.
어둠 속에서 바다에 어린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보이던 산들이 끊어지는가 싶더니 그게 포구였다. 어딘가 북소리가 들렸고, 이어 피리소리까지 났다. 높이 세운 깃대와 등을 단 작은 배 열 척이 다가왔다. 조선 사절단을 맞는 왜선들이었다. 그 중 한 척의 배가 유정이 탄 상상관 배로 다가왔다.
"도주가 친히 오셔서 대사를 영접하십니다."
조선에서부터 유정을 인도한 야나가와 시게노부가 나섰다. 오래지 않아, 상단이 뾰족한 검은 모자와 승려들이 입는 옷 같은 검은 장삼을 입은 소 요시토시가 상상관 배로 올라와 유정에게 다가왔다. 외교승 겐소가 바로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대사께서 이런 누추한 섬까지 와 주시니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섬이 생긴 이래로 이처럼 훌륭하신 귀빈이 오신 일이 없었던 듯합니다."
"도주께서 예까지 나와서 맞으실 줄 몰랐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도주의 귀빈이었으면 합니다."
유정의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겐소가 사절단을 인도해온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표정을 살폈다.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얼른 유정에게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소 요시토시에게 귓속말을 했다. 소 요시토시는 그제서야 유정 일행의 얼굴이 자신을 복 크게 경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 요시토시는 왜란 때 왜군의 길잡이를 하며 조선을 침략한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사절단으로 온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는 튼튼한 사람이었으니 침략자 소 요시토시에게 직접 해를 입었을 리는 없지만, 그 중에는 왜란 때 가족이나 친지를 잃은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사절단의 일행으로 오면서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지만, 속에 쌓인 감정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소 요시토시는 그걸 의식해야 했던 것이다.
"다들 먼 곳에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우리 섬에 먹을 게 없고 입을 것도 없으나 풍광은 조선의 한려수도 못지않고, 또한 조선 사람들이 즐길 만한 해산물이 꽤 있습니다. 마음껏 드시고 구경하실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편하게 먹고 놀기 위해 이 먼 곳까지 목숨을 걸고 온 것이 아니니까, 접대하는 일에 너무 진력하지 마십시오."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밤이 이슥해서 접대를 하려 해도 방도가 없습니다. 우선은 우리가 준비한 간단한 밥으로 요기를 하시고 계시면, 편히 주무실 수 있는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절단의 배는 항구에 정박한 채로 왜인들이 조그만 붉은 소반에 얹어 온 밥과 말린 해태(海苔), 나물을 받아들었다. 양이 적고, 맛도 조선 것과 달리 밍밍했지만 그나마 말린 해태 에서 묻어나는 짠맛으로 깔끔하게 먹어치울 수 있었다. 반면에 아직 울렁이는 속을 풀지 못한 사람들은 빨리 땅에 발을 딛고 싶어서 발을 굴렀지만, 혼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서 자반뒤집기하듯 몸을 꼬고 있어야 했다.
실은 유정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출발하면서부터 가벼운 어지럼증에 시달려 수행하는 사람들의 애를 태우기까지 했다. 주위를 진정시키고 선실에 꼿꼿이 앉아 운기조식으로 몸을 조절해 조금씩 평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왜인들이 특별히 마련해온 밥을 입에 대기 어려워 나물에 얹어 겨우 한 술 정도만 입에 대고 말았다.
"다른 사람 모르게 해라."
"백전노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큰스님께서 이러시니 큰 걱정입니다. 어서 기운을 차리시되 무리하지 마시고, 대마도에만 계시다가 얼른 귀국을 하시는 것이 옳은 게 아닌가 합니다."
조용히 아뢰는 해구를 유정은 희미한 웃음으로 받아냈다.
"허허, 너도 세상 보는 눈을 더 키워야겠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내가 살면서 한 일도 없고 하지 않은 일도 없다. 이 몸도 또한 아픈 적도 없고 아프지 않은 적도 없다. 사람은 평정을 잃으면 누구나 잠시 기를 앗기는 법, 그럴 때는 마음이 들뜨지 않게 깊은 숨을 쉬면서 먹을 것 줄이고 말도 아껴야지."
"예......"
"내가 이만큼 말을 하게 되었으니 되었느니라."
유정은 사스나우라 항에 발을 내디디면서 다시금 원기를 되찾았다. 아직 열기가 여전한 가을 햇볕과 서늘한 바닷바람이 한데 어우러져서 조선의 섬과는 또다른 정취를 느끼게 했다.
"큰스님, 큰스님께서 크게 숨을 쉬시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한 행자가 뒤를 따르면서 살풋 말을 놓았다.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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