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이 끝나고 우리 조정에 강화를 청하면서 데려온 피로인이 모두 몇 명입니까?"
유정은 거듭 말을 늦추었다.
"제가 스스로 조선을 데려간 것만 두 차례이고 모두 오백에 이르는 숫자입니다. 그 밖에 다른 사신이 갈 때도 수십 명씩 데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 피로인은 모두 대마도에 와 있던 피로인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조선과 강화하는 일은 대마도뿐 아니라 혼슈에 있는 관백의 뜻이라고 했지요?"
"예, 그렇지요."
"그런 관백이 스스로 끌고 간 피로인을 쇄환하는 일조차 솔선해 보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소 요시토시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겐소가 가만히 유정을 달랬다.
"큰스님, 저희 쓰시마로서는 감히 관백께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아닙니다. 다만 관백께서도 강화를 바라고 있고, 그 뜻을 저희 번주에 맡겨서 추진하고 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유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선을 침략한 쪽은 왜의 혼슈이고, 그 우두머리는 왜의 국왕과 관백입니다. 한데 강화는 어째서 대마번주에 일임을 하고 있다는 말이오?"
"옳으신 지적입니다. 하지만, 그때 조선 침략을 명령한 도요토시 히데요시는 이미 사망했고, 그 수하 쇼군들도 모두 몰락했습니다. 지금 관백은 조선 침략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조선을 침략해서 얻은 것은 다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조선 침략과는 상관이 없으니 그냥 강화를 하자는 말인가요? 그것도 관백이 손수 나서는 것이 아니고 대마번을 통해 강화를 추진하게 하고는 뒷짐만 지고 있겠다는 듯한데, 그것이 말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유정의 말은 점점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겐소가 그 말에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던 소 요시토시가 간신히 말꼬리를 꿰차고 들어섰다.
"대사님, 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쇼군 시절 고니시 유키나가 다이묘의 사위로, 일본 군사가 조선으로 출병할 때 맨 앞에 서서 길잡이를 한 사람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쇼군이 죽고 전쟁이 끝나자 많은 다이묘들이 그 쇼군의 지위를 두고 동군과 서군으로 갈라져 전투를 벌였는데, 그때 도쿠가와 다이묘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를 하고, 제 장인 고시니 유키나가가 가담한 서군은 패배했습니다. 제 장인은 결국 자결을 하고 말았지요. 저는 쓰시마를 살리기 위해 제 아내와 이혼하고 도쿠가와 쇼군께 충성을 맹세했고, 도쿠가와 쇼군은 제게 이 쓰시마를 그대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쓰시마를 평화롭게 살려 나가야 합니다. 그러자면 일본과 조선이 반드시 강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본을 위하는 길이고 조선을 위하는 길이며, 저희 쓰시마는 그런 중에 안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쓰시마는 더 이상 옛날과 같은 왜구의 소굴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당부드리옵니다. 대사님의 이번 도일에 저희 쓰시마의 운명을 걸고 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소 요시토시는 다른 수행원들이 보고 있는데도 눈물을 쏟아냈다. 그 울음에는 절실함과 절박함이 절로 묻어났다. 그러나 유정은 냉랭했다.
"번주는 제가 불가에 귀의한 몸이라 하여 저 깊은 마음의 샘에서 한없이 자비만을 건져올려 베풀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오? 제가 자비를 베풀어 대마도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하고 왜인들이 조선에 침략한 죄 갚음을 스스로 해야 하는 일하고는 서로 다른 일임을 아셔야 합니다."
소 요시토시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유정을 쳐다보았다. 유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뜻을 밝히겠습니다! 통사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그대로 통역을 해주세요. 왜인들이 조선을 쳐들어와 무고한 인민을 수없이 학살하고 조선의 강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음은 이 자리에 있는 대마도인들이 모두 다 아는 일일 것이오. 그런데도 왜국은 그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겨우 대마도에 와 있는 피로인들 수백 명 정도만을 내놓고 우선 강화부터 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가 그대들의 나라 수도에 가려는 것은 단순히 강화에 응하려는 게 아니오. 이제 그대의 바쿠후의 관백에게 반드시 전하도록 하시오! 이제라도 스스로 죗값을 치르지 않으려거든 강화라는 말은 입밖에 꺼내지조차 말지어다!"
유정은 당황해 하는 소 요시토시를 남겨 두고 숙소인 세이산지(西山寺)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사케에 취해 가던 녹사 손문욱과 통사 김효순이 벌떡 일어나 유정의 뒤를 따랐다. 그 뒤를 소 요시토시는 몇 걸음 뒤따라 가다가 말고 그대로 멈춰 섰다.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 이런 게 아닌가 싶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자결한 소식에 이어 이혼 통첩까지 받고 얼이 빠져 버린 아내의 새하얀 얼굴이 생각났다.
소 요시토시는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유정의 숙소까지 딸려보내고는 간신히 통사 박대근과 승려 해구의 소매를 붙들었다. 해구는 승나와 영식에게 유정의 숙소 주변을 점검하게 하고 준하와 강진석, 하명구을 대동하고 소 요시토시를 마주 대했다.
"대사께서 교토까지 다녀오시자면 길면 일년, 짧으면 반년은 걸립니다. 대사께서 처음부터 저리 화를 내시다가 정작 교토에 가셔서 기운이 빠지시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대사께서 노여움을 푸실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소 요시토시는 해구 일행에게 잔이 넘치도록 샤케를 따랐다.
"그야 번주와 관백에게 달린 문제지 저희 큰스님께 달린 문제가 아니지요."
해구가 술을 외면한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군사를 일으켜 조선으로 쳐들어간 일에 대해서는 골백번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해야 마땅한 일이지요. 한데, 그때 조선에 군사를 보낸 쇼군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고, 조선 침략에 나선 다른 부시[武士]들은 다이묘들끼리의 결전에 피 흘리며 싸우느라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다행히 도쿠가와 관백께서 조선과는 반드시 강화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 대마도 번주에게 명령을 내리셨으니 이번에 반드시 강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대사께 잘 말씀해 주시지요."
준하가 해구를 대신해 나섰다.
"강화를 하고 하지 않고는 큰스님께서 정하시고 행하실 것이온데, 저희가 듣기로 도무지 의심스러워서 묻지 않을 수 없어서 여쭙습니다. 번주의 말씀을 들으니, 강화만이 중요하고 그간에 저지른 일본의 만행은 더 거론할 까닭이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준하의 공손한 말투가 그래도 소 요시토시에게 그나마 변명할 틈을 내주었다.
"내 말을 오해하시는군요.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것은 천인공노할 죄이지만 일본은 지금 그 죄를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강화는 서로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죄를 묻고 죗값을 치르고 하는 일은 그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소 요시토시의 말에 해구는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유정보다 더 화를 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해구의 성미를 헤아려 다시 준하가 나섰다.
"좀전에 큰스님께서 그리도 화를 내신 까닭을 이제야 저희도 제대로 알 듯합니다. 번주께서도 저희와 처지를 바꿔 놓고 마음을 써보시지요. 가족이 나가서 사람을 죽이고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에서는 지금 사람 죽인 일은 다음에 논하고 친하게 지내기부터 하자고 한다면 그 누가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소 요시토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화는 조선을 향한 것도 아니었고 일본 혼슈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죄는 일본 혼슈가 짓고, 조선이 이제나마 그 죗값을 묻고 있는데, 그 답을 대마도 번주인 자신이 해내야 했다. 피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실은 스스로도 책임질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는 대답이기도 했다.
"해결하자고 하면 긴 시간과 많은 노역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힘든 일에 골몰해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기보다는 먼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놓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소 요시토시가 권하는 샤케를 마시는 동안 해구와 준하의 마음도 얼마간 누그러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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