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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할 때는 부인 뒤에서 따라가라"

[후진타오 성공비결]<1> 공처가가 돼라

중국 사천(四川)대학교에서 티베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근형 씨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파헤친 글 5편을 보내왔다. 한국인의 시각으로는 최초로 시도된 후진타오 인물탐구는 근간 <후진타오가 성공한 10가지 비밀>에 상세히 실릴 예정이다. <편집자>

우리도 독재체제에서 살고 있다. 가정이 민주적인가? 학교가 민주적인가? 교장 선생님은 독재를 휘두르면서, 선생님도 자기 권력을 마음껏 누리면서, 폭언폭설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평등·박애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 웃음만 나온다.

회사는 말할 것도 없다. 독재체제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 이것이 회사생활이다. 심지어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도 독재체제로 돌아가는 실상을 확인하면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이상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좋든 싫든 독재체제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는 것이 분명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필자는 후진타오(胡錦濤)를 연구했다. 지금까지 중국인이 쓴 후진타오 이야기를 번역한 책은 많았지만 한국인이 한국인 관점으로 연구한 책이 없었다.

후진타오는 1942년 12월 21일 강소성(江蘇省) 태주(泰州)에서 차(茶)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동갑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후진타오는 머리가 좋았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인간관계가 좋은 성격이었다.

명문 청화대학(淸華大學)에서 수리학(水利學)을 공부했고, 우수한 학업성적과 각종 활동을 인정받아 공산당에도 입당할 수 있었지만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만나 감숙성(甘肅省)에서 노동하며 살아야 했고, 이곳에서 뜻하지 않았던 정치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북경(北京)에서 공산주의청년단 제2서기로 일했으며, 귀주성(貴州省)과 티베트에서 당위원회 제1서기로 지방간부 경험을 쌓았고, 등소평의 부름을 받아 북경에서 황태자로 10년 동안 살았다.

후진타오는 1992년부터 은인자중했다. 이렇게 10년 동안 한없이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면 국가주석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대만 총통 이등휘(李登輝)의 처신과 비슷했다. 이등휘 전 총통은 1980년대 행정원장 시절 전임 총통인 장경국(蔣經國)과 독대 시 언제나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친 채 '나는 전혀 야심 없는 당신의 충직한 신하'라는 믿음을 아예 몸으로 실천했다.

그래서 이등휘 전 총통의 처신을 굴신의 미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필자는 후진타오의 성공비결을 '겸손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등소평이 발동시킨 개혁개방도 30년이 지났고,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은 단순한 양적 발전이 아닌 질적 발전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물질 발전을 넘어 제도 개혁과 정신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후진타오는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평화발전(和平發展)·조화사회(和諧社會)를 주장하고 있다.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은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다.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알아야 하고, 후진타오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한다. 무조건적인 애정과 무조건적인 증오, 둘 다 극단이다. 극단은 위험하다. 우리는 냉정해야 하고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조화로운 승리는 이해에서 출발한다. 후진타오가 속세에서 성공한 비결과 특징이 과연 무엇일까? 필자가 검토한 결과 10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 후진타오와 그의 아내 유영청 ⓒ프레시안

"예쁜 마누라 두면 이혼한다"

후진타오는 공처가다. 공처가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후진타오는 여자관계가 깨끗하다. 나쁘게 말하면 목석(木石)같은 사람이라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공인은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쁨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1974년 후진타오가 감숙성 건설위원회에서 일하기 위해 난주(蘭州)로 왔을 때, 그 네 식구가 분배받은 집은 후진타오가 일하는 건물 지하였다. 편한 대도시에서 살았던 집이 습기 많고 햇빛 잘 안 들어오는 집이었다.

그래도 이 집안은 화목했다. 감숙성 건설위원회 사람들은 후진타오가 자기 식구 빨래를 열심히 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빨래는 모두 후진타오가 했고, 다른 육체노동도 후진타오가 다 했다. 심지어 집안 물건이 어디 어디에 있는지 아내 유영청(劉永淸)이 모르는데 후진타오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 아내만 떠받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후진타오는 남에게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을 참지 못했다. 후진타오가 감숙성 건설위원회 사무실 비서로 일할 때 유영청은 건설위원회 설계처 과원(科員)이었다.

후진타오가 설계처 부처장이 되자 일이 묘해졌다. 후진타오는 부부가 같은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른 사람 눈을 의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영청은 감숙성 건설위원회 도시건설처(城建處)로 자리를 옮겼다. 후진타오가 건설위원회 부주임이 된 뒤에는 유영청이 아예 건설위원회를 떠나 경제계획위원회로 이동했다. 언행을 조심하는 공처가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영청은 미인이 아니다. 평소 잘 웃지도 않는다. 퍼스트레이디를 이렇게 말하니 죄송하긴 하지만 사진을 보면 분명 미인이 아니다. 후진타오는 미남이다. 대학교 때 사진을 보면 남자가 봐도 귀엽다. 2002년 환갑에 국가주석으로 카메라 앞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도 분명 미남이었다. 게다가 똑똑하고 인간관계도 좋은 사람이다.

후진타오는 청화대학 무용단에서 열심히 춤을 췄고 무용단에 여학우도 많았다. 그런데 무용단 여학우가 아닌 같은 학과 동기 한 명과 연애했다. 지금 한국 젊은이 눈으로 평가하자면 박애정신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냥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1983년, 어렸을 때 벗 하도구(夏道球)가 북경에서 후진타오를 만났을 때 부인 유영청 근황을 묻자 후진타오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마누라가 나보다 한 살 더 많고 예쁘지도 않으니 네가 만날 필요 있냐? 하지만 이런 마누라가 좋은 거야. 젊고 예쁜 마누라들이 고생을 못 참아 문화대혁명 때 많이 이혼했잖아."

이것이 후진타오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인생배필이다. 못생긴 여자들이 이 발언을 읽고 기분 좋을 수도 있겠다.

공처가! 필자 나름대로 최대한 중국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동북, 즉 만주에 사는 한족 중에 가부장적인 남편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 중국남편, 특히 장강 이남 남편 중에 공처가가 많다.

필자가 중국 일반 가정을 방문했을 때 가장 깜짝 놀란 것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열심히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남편이었다. 외국생활을 하면 바로 이런 문화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눈을 안으로 돌린다.

'저 사람들 미쳤나? 가만!……부엌에 들어가지도 않고 마누라 위에서 군림만 하는 우리 아버지들이 비정상 아닐까?'

1960~70년대 태어난 한국인들은 안다. 밖에서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를 외친 우리 자랑스러운 아버지들이 집안에만 들어오면 세상에 둘도 없는 폭군이요 독재자였다는 것을. 중국은 독재국가인데 가정이 민주적이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인데 집안이 독재체재다.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 벗들이 술 마실 때 모두 인정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나는 아버지와 대화한 적이 없어!"

반대 의견을 제시할 한국인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태어난 사람들까지는 이 주장에 많이 동의할 것이다.

세상이 첨단사회로 발전하며 남성적인 강함이 단점으로 변하고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장점으로 변하고 있다. 여자의 힘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고, 사내들은 적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남자들에게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니까 미안하기도 한데, 이것이 현실인 것을 어찌하리오!

중국 백화운동의 선구자이며 민국시대를 풍미한 대학자 호적(胡適)이 중국에서도 유명한 공처가다. 호적이 이런 말을 했다.

"지아비(夫)는 부인(妻)에 대해 일곱 가지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출할 때 부인 뒤에 따라 간다. 화장할 때 천천히 기다린다. 물건을 살 때 돈을 낼 준비를 한다. 말할 때 '예, 예'하며 따른다. 부인이 실수한 일은 눈감아준다. 생일이 되면 축하한다. 트집을 잡아도 참는다."

여섯 가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 가지는 필자가 받아들이기 힘들다. 물건을 살 때 돈 낼 준비를 한다? 보통 부인이 직접 돈을 낸다. 경제권은 여자가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절세의 미인이 나를 좋아해도 도저히 참기 힘든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쇼핑이다. 남자에게 쇼핑은 고문이다. 연애할 때도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야! 이게 재미있냐? 다리 힘들어 못 걷겠다'라고 원망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쇼핑할 때만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건강하게 돌아다닐까? 눈빛도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나 어찌하리오. 아내를 존중해야 사랑받을 수 있고, 그래야 집안이 화목한 것을.

후진타오에 대해 이런 증언이 있다.

"감숙성에서 일할 때, 후진타오는 출장 가기 전에 부인에게 용돈을 타고, 귀가해서는 명세표를 주며 설명했다."

이 시점에서 『대학(大學)』에 나오는 그 유명한 문구를 생각해보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신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안히 하라. 그러나 수신과 제가와 치국은 같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家)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식구 개념이 아니라 가문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옛날 가부장제에서 잘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핵가족 개념도 넘어 개인주의로 변하고 있다. 개인주의도 나쁜 것은 아니다. 내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신제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사내들에게 미안하지만, 이제 별 수 없다. 우리는 후진타오처럼 공처가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별의별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겪는다. 그러나 자신을 매일 다스리는 사람. 최소한 매일 반성하며 사는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자신을 매일 고치며 살 수 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도 남편을 사랑하며, 부부와 자식이 서로 존중하는 가정. 이렇게 안정적인 가정에서 사는 사람이 큰일을 하거나 최소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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