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환경과 생명』 2009년 가을호에 실린 글과 지난 9월 16일 한국미래발전연구원에서 있었던 시민사회단체 간담회 발제문을 대폭 수정한 것입니다. 필자
(하나) 기초부터 바꾸자
부정의 연합전선을 넘어선 긍정의 연합전선을 만들어내야 한다
2010 지방선거가 이제 8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10월 보궐선거도 곧 치러진다. 내년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와 풀뿌리 공동체운동 단체, 그리고 민주당과 진보정당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대응전략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선거 전략을 보면 이른바 이명박 정권 심판론, 반엠비 연합전선 이외에는 무슨 뚜렷한 대응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시장이나 부산시장, 경기도지사 등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로 이미지가 좋고 인지도도 높은 유명 인사 가운데 누구로 하는 게 승리의 가능성이 높은가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후보 전술도 이같은 반엠비 연합전선의 틀 안에 있음은 물론이다.
이같은 반엠비 연합전선론은 참으로 뿌리가 깊고 늘 나오는 약방의 감초같은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 대 반민주의 단순명쾌한 대동단결론은 '비판적 지지론'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결국 민주당 강화론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대응책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하고 파탄 상태인 민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덧붙이자면 민노당이 앞장서서 반엠비 연합전선을 주장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자해의 정책이다. 이른바 진보를 부르짖는 정당이 스스로 다른 정당을 강화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꼴이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시대에는 독재를 무너뜨리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당연히 민주세력 대동단결론은 너무나 호소력있는 당위의 지상명령이었다. 1987년 국민운동본부라는 폭넓은 반독재 민주연합 전선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경험은 이같은 대동단결의 위력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1987년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거의 확실하게 손에 들어왔던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만 것은 뭉치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는 쓰라린 교훈을 남겨주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광범위한 연합전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정권심판론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런 부정의 가치만 가지고는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반대의 연합전선으로는 무엇인가 무너뜨릴 수 있지만, 새로운 가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지 못한다. 이른바 민주정부라고 자칭했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이 생생하게 이를 입증해 주었다.
사실 솔직히 노무현의 죽음과 함께 어정쩡한 진보개혁 세력도 함께 죽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어설픈 좌파 신자유주의도 죽었다. 이른바 국민의정부-참여정부라고 자칭하던 민주화운동 세력의 10년에 걸친 국가 민주화 구상과 실천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런데 민주정부 10년의 공과를 계승하고 있는 민주당이 여전히 철지난 민주 대 반민주의 정권심판론을 주장하는 것은 초점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 있는 후안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금치산자가 나에게 돈을 맡기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킨 것은 다름아닌 민주정부 10년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동단결을 외치기에 앞서 민주정부 10년을 승계한 정치세력들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서 명확히 일반 시민들에게 그 구상과 실천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진보정당들도 마찬가지이며 시민사회단체들도 마찬가지이다. 낡은 반대와 심판을 읊조리는 추억의 레코드 판을 또다시 트는 것은 일반 시민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긍정의 가치,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감동의 시민정치운동을 벌여나가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런 가치는 분명히 존재한다. 기초공동체 민주주의 연합전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긍정과 생성의 기초 민주주의 의제가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전망을 밑에서부터 새롭게 다시 재구성해야만 하는 절박하고도 간절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민주정부 10년의 죽음
돌이켜보면 민주정부 10년은 배반의 시대였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분명 변화와 사회정의, 평등 세상을 바라는 수많은 민중들, 노동자와 농민, 집없는 도시 서민들의 희망을 투표로 연결해서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이런 장삼이사의 민초들, 나날이 더 변두리로 더 불안한 비정규의 삶으로 밀려나기에 지친 대다수 시민들의 기대를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쳐 버리고 말았다. 노동자는 더 많이 해고되고 더 많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더 많은 청년 실업자가 생기고, 그리고 더 많이 죽었다. 부동산 투기는 더 많이 극성을 부렸고 재벌들은 더 살쪘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거리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더 극심하게 벌어졌다.
물론 민주정부 10년의 공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와 민생의 관점에서 긍정할 수 있는 정책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안정한 민중들의 삶이 한 치도 안정된 삶으로 바뀐 점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명백히 반민중 성격으로 전락한 정부였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민주정부 10년은 명백히 실패이다. 강남의 부동산 투기꾼들이 제발 노무현 정부가 10년은 더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 그대로 이명박 정권을 들어서게 만든 일등 공신은 다름아닌 노무현 참여정부 그 자체이다.
사실 민주정부 10년에 대해서는 더욱 엄밀한 조사와 평가, 그리고 논쟁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 하나의 정답은 없다. 하나만의 대안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과는 다른 가치와 다른 사회를 꿈꾸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그러한 논쟁 가운데 새로운 미래 구상의 상상력이 현실의 과제로 그림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정부 10년은 대안을 추구하기에 앞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로 상징되는 바 자본주의의 성장과 개발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정권이었다. 1960년대부터 이어져오던 민주화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을 기반으로 출범한 정권이었음에도 그 기반의 사회경제 구상을 버리고 어찌 보면 박정희 이래 일관되게 추진되어 오던 근대 산업화, 경제성장과 개발 발전 모델을 그대로 이어받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독재를 했느냐 민주화운동을 했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 국가 운영의 기본 인식과 목표는 기득권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거의 동일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진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의 사회경제 정치 구상이 결국은 국가주의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대대로 이어져 온 뿌리깊은 친일, 친미 기득권 세력들이 전혀 좌파도 아닌 정권을 '좌파' 정권이라고 딱지 붙이고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를 내걸 동안 정작 일반 시민들은 '좌파'는 도무지 씨도 보이지 않는 유령 좌파 정권에 진저리를 쳐야만 했다. 못사는 사람들은 그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못살게 되고 이제는 가난마저 대물림되는 철저하게 소외되고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성장 강화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와 관료주의였다
흔히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민주주의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고 이제는 독재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얘기되곤 했다. 이명박 정부로의 정권교체는 그 자체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진전이며 이제는 정당정치의 활성화와 뿌리내리기가 과제라는 주장까지 횡행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사건과 함께 일상생활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일반 민주주의의 후퇴를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선거로 집권한 히틀러가 단 6개월만에 독일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나치 체제로 전환했다는 역사 사실을 뼈저리게 학습하고 있는 중이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간단히 휴지통에 버려지고 말았다. 거리에서는 수시로 공포정치의 대명사인 불심검문이 이루어지고 있고, 사이버 망명을 해야만 할 정도로 인터넷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는 경찰국가로의 전환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다.
엄밀히 말해서 지난 10년간 강화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와 관료주의였다. 민주주의를 성장시킨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와 관료주의를 성장시켰을 뿐이다. 민주주의를 진전시킨다고 하면서 포장만 그럴싸한 몇몇 제도와 법률만 풍선처럼 청와대 앞에 높이 내걸었을 뿐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무력화되는 국가인권위원회나 각종 위원회, 그리고 방송 제도를 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국가 권력의 행사를 관료들에게 의존했다. 그래서 더욱 관료주의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민주정부 10년 동안 세련되게 이른바 '전문가주의'라는 이름으로 기승을 부렸다. 말이 전문가이지 사실은 별로 전문일 것도 없는 '전문성'을 내세워 관료들 자신의 입맛대로 거의 모든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시민들은 배제되었다.
덩달아 시민사회단체들도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결국에는 시민들 위에 올라서서 시민들이 배제된 전문가 운동으로 변질되는 경향까지 있었다. 시민사회운동 단체들이 정부의 각종 위원회와 공청회의 주요 구성원들로 참여하게 되면서 시민참여는 거버넌스라는 이름 아래 시민사회운동 단체의 참여로 대체되었다.
집없는 서민들을 위한다는 주택정책에서도, 노동정책에서도, 의료정책에서도 교육정책에서도 정작 집 없고 또 그러면서도 권력의 주체인 시민들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남은 것은 주민 참여를 보장한다며 그저 형식만 남은 공청회같은 각종 가짜 제도였다. 그것은 주민 참여가 아니라 주민 참여를 막기 위한 제도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국민의 정부에 주권자인 '국민'은 어디에도 없었고, 참여 정부에 주권자인 '시민'의 참여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주택정책도 노동정책도 의료정책도 교육정책도 기타 모든 정책이 주권자인 시민들이 결정해야 한다. 대의제라고 해서, 주권자인 시민의 수가 너무 많다고 해서 시민들이 정책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위스의 예를 들지 않아도 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주민자치를 제도로서 실행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관료들이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무수한 이유를 들어 봉쇄하기 때문에 안되고 있을 따름이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운영한다고는 했지만 사실상 자신들의 고향인 주권자 위에 올라서서 주권자들과 괴리되고 말았고 그 사이를 관료들이 채웠다. 관료들은 늘 인민들의 위에 서서 기생충으로 전락하려는 속성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탐관오리들과의 전쟁을 벌인 역사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자신의 생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혈세로 먹고 살면서도 권력을 쥐고 있다는 그 존재 자체의 속성이 자칫 흡혈귀 수준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권자를 주체로 성장시키지 못한 정부를 진정한 민주정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민주정부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여기에 있다.
(둘) 기초에서부터 시작하자
국가주의, 관료주의를 끊을 수 있는 고리는 기초자치단체이다
민주주의의 성장이란 결국 주권자인 시민의 성장이다. 그리고 이는 기초공동체의 확립, 지방자치, 주민자치로 구체화된다. 주민들은 입법, 행정, 그리고 사법권까지 날이면 날마다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살아 있게 되고 죽지 않는다.
지방자치, 주민자치가 없는 민주주의는 가짜 민주주의이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지방자치, 주민자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확고부동한 근거지는 지역 공동체와 지방자치, 주민자치이다. 지역공동체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말짱 헛것이다.
우리는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국회의원-광역의원-기초의원을 마치 사단장-중대장-소대장처럼 위계 서열이 매겨진 것처럼 생각해왔다. 중앙정부-광역단체-기초단체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위계 서열화된 것으로 인식해 왔다. 실제로 기초의원은 이른바 '쫄다구' 대접을 받았다. 이는 또한 공천권이 정당의 국회의원에게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철저히 잘못된 생각이다.
지방자치단체의 권력도 중앙정부의 입법권과 행정권의 극히 일부분만이 이양돼 있을 뿐 주요한 입법, 행정 권력은 여전히 중앙정부가 쥐고 있다. 사법권은 치외법권으로 아예 지방자치 정부에는 눈꼽만큼도 이양돼 있지 않다. 중앙정부란, 그리고 국가란 지방자치 정부의 연합이나 연방이라는 사고는 전혀 없다. 미국이나 독일, 스위스 등 우리가 그렇게 추종해 왔던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연방(聯邦) 국가, 곧 지방의 연합으로서의 국가라는 사실 자체조차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나마 지방자치단체에 이양된 쥐꼬리만큼의 권력도 지역 주민들에게는 전혀 하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 지역주민들은 지방자치, 주민자치의 주역으로서 주권자의 권력을 행사해야 함에도 주민들의 권력행사는 오직 몇 년 만에 가뭄에 콩나듯이 돌아오는 선거 당일 하루만 보장될 뿐이었다. 일상의 권력 행사는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권력의 흐름이 막히고 고이면 썩는 악취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기초자치단체는 썩을 대로 썩은 지방 토호들의 부패와 비리 전시장이나 다름없다. 2006년 지방선거 직후 공천헌금 사범 하나만 해도 기초자치단체장 5명 가운데 1명이나 되는 47명(전국 230명)이나 되었다. 심지어는 기소된 서울시 의원만 30여 명(1백여명 가운데!)에 이른다.
남은 것은 중앙정치의 지역주의였다. 애향심과 지역정치는 당연히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중앙정치의 지역주의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철저하게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갈라놓았다. 전라도에서는 한나라당 기초의원 당선자가 하나도 없었다. 경상도에서는 부산의 158명 기초의원 가운데 19명이, 대구에서는 99명의 기초의원 가운데 2명이, 경북에서는 247명 가운데 5명이, 경남에서는 226명 가운데 13명이 열린우리당이었다. 부산 경남 정권이라고 칭해지는 노무현 정부 아래 치러진 2006년 지방선거 결과가 이렇다.
지역구 의원 정수가 96명인 서울시의회는 단 한 석도 남김 없이 한나라당 일색이다. 비례대표까지 합해도 106석 가운데 100석이나 된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서울 지역의 경우 25명 전원이 한나라당이다. 인천은 10명 중 9명이, 경기는 31명 중 27명이 한나라당이다. 655명의 전국 시 도의원 가운데 519명이 한나라당이다. 무려 80%이다. 비례까지 포함해서 전국 2,888명의 기초의원 가운데 1,621명이 한나라당, 열린우리당이 630명, 민주당이 276명, 민노당 81명, 국민중심당 89명, 무소속 272명이다. 참고로 2006년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51.6%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초자치단체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민주주의의 주춧돌은 성숙한 시민의식이나 활성화된 대의제 정당제도를 넘어서 무엇보다도 기초자치단체의 민주주의와 자치, 자립이다. 그리고 자치란 그야말로 주민들이 스스로 입법 사법 행정의 주인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스스로 통치하고 스스로 정치를 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매일매일 주민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때문에 기초자치단체의 입법, 행정부만이 아니라 경찰이나 사법부까지도 주민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하고 심판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경찰이 조폭보다도 못한 폭력배가 되어 주민들을 방패로 찍고 폭력을 휘두르고 집회를 막고 불심검문을 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전혀 아니다. 경찰 파시즘 사회일 뿐이다. 아직 내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다고 외면하는 사이 히틀러는 바로 눈 앞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자르고 국가주의를 강화해나간다.
민주주의의 근거지는 기초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방선거를 그야말로 '중앙'의 선거가 아닌 '지방'의 선거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역대 지방선거는 하나같이 중앙정치의 무대였다. 거의 대부분 중앙정부를 심판하거나 평가하는 대선, 총선의 징검다리와도 같은 '중간' 선거였다. 말 그대로 기초자치단체의 '지방정치'가 주요한 의제로 부각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제 이 고리를 끊고 한국을 다시 기초공동체 민주주의 사회로 새롭게 바꾸는 기초자치단체를 가장 주요한 의제로 부상시켜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주 정치를 다시 밑에서부터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역자치와 자립의 기초공동체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내일이 없다. 기초공동체가 없는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기초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대의제 정당정치는 뿌리없는 나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튼튼한 지역 자립과 자치의 민주주의가 없이는 자유인의 연합으로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공동체 경제는 불가능하다. 에너지-식량 위기의 '해운대 쓰나미'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시급히 살벌한 경쟁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상부상조의 따뜻한 우애의 협동조합 공동체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은 어쩌면 선택사항이 아니라 위기 극복의 유일한 길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세계화는 필연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 서구의 복지국가나 제3의 길 이외에 대안이 없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서구 중심의 경제, 자본주의 석유문명에 깊숙이 중독된 사고일 뿐이다. 물론 사회주의가 대안경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로 입증이 되었다.
그렇다고 대안 경제가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다. 값싼 화석 에너지에 기반한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석유경제는 화석연료의 고갈과 각종 천연자원의 고갈, 임계점을 넘어선 기후변화로 이제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우선 당장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도쿄의정서 체제조차 한국경제에 쓰나미같은 구조 변화를 강요하고 있는 중이다. 너무도 당연히 조만간 들이닥칠 에너지-식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와 식량의 자급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대안 경제의 근본이다. 1990년대 초 구소련으로부터 석유 공급이 끊기면서 겪은 북한과 쿠바의 경험은 바로 우리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내일의 한국경제 현실이다. 그러므로 상부상조의 협동조합 공동체 경제로 나아가는 것은 지금부터 우리가 준비하고 실천해나가야만 하는 대안경제 운동의 핵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스위스는 민주주의가 가장 높게 꽃피는 나라라고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다. 스위스 대통령 이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스위스의 몇몇 유명한 도시 이름은 일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그나마 우리에게 다양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는 선례는 스위스이다. 취리히, 베른, 제나바 등 도시국가의 연합, 연방으로서 스위스의 민주주의는 바로 지역자치, 주민자치의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개발 성장 국가의 극점이다. 그리고 국가주의와 관료주의의 극점이다. 돈벌이라면 용산의 그까짓 몇몇 사람들이 불타 죽는 희생 쯤은 불가피하다는 극단의 광기에 사로잡힌 우리 안의 경쟁, 우리 안의 승리주의, 우리 안의 괴물이 만들어낸 경찰국가이다.
우리는 이런 괴물을 허물어뜨리기 위해서도 상부상조하는 지역의 기초공동체 민주주의를 시급히 조직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듯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2008년 촛불 공동체와 2009년의 추모의 촛불공동체는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시민정치 운동이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강렬하게 소망하는 희망의 공동체이기도 했다. 이것은 강부자 고소영 이명박 정권에 대항하는 민생 민주 공동체였다.
분명 노무현의 죽음은 민주정부 10년의 실패의 결과였다. 그러나 동시에 노무현은 죽음으로써 다시 부활했다. 이것은 분명 역설이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이루어 놓았던 각종의 민주 제도와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허망한 신기루로 급속히 무너져 가던 민주주의의 황혼기에 노무현은 부엉이 바위에서 저 까마득한 밑바닥으로 투신하는 극단의 희생을 통해, 1970년 전태일의 죽음과도 같은 충격을 일반 시민들에게 던져 주었다. 2008년 타올랐던 촛불이 다시 켜졌다. 5백만에 이르는 추모공동체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성찰하고 다시 민주화 투쟁을 시작해야만 한다는 자각의 새벽을 열었다. 놀랍게도 노무현은 기존의 민주주의와는 근본에서부터 다른, 새로운 민주주의의 씨앗을 수많은 시민들과 온라인 코뮤니티를 비롯한 공동체에 심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노무현의 죽음을 놓고 이런저런 평가가 오간다. 노무현의 계승을 말하는 정치세력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어떤 평가와 계승을 말하기에 앞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진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개발과 성장의 시장경제에 대한 깊은 성찰과 대안의 모색이 선행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민생의 근거지는 무엇인가. 기초공동체이다. 이제 주권자인 인민들이 기초공동체를 재조직해야 한다. 그 길만이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고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깨어있는 촛불들의 시민정치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자치단체장도 장이지만 기초의원부터, 자신의 동네부터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주민운동이 필요하다.
노무현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림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했다. 죽어가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절벽을 불사하고 저 아래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러므로 노무현의 계승을 말하는 사람들은 우선 정말 초심으로 돌아가 시민들 앞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노무현처럼 모든 기득권을 다 버리고 저 낮은 곳으로, 시민의 바다로, 지역 주민의 바다로 뛰어내려야 한다.
지방선거에서 권력을 더 많이 갖고 있는 단체장 선거에 나가려는 생각 대신에 진정으로 노무현과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면 구의원, 시의원 등 기초 자치단체 의원으로 나서야 한다. 노무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의 온몸을 던져야 한다.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주권을 돌려주기 위해 주민자치의 기초공동체 재구성의 공동체 정치운동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2008-2009 촛불의 감동과 시민정치운동이 다시 2010 지방선거에서 불타오를 수 있다.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을 해왔던 단체들과 시민사회단체, 진보운동 단체들, 그리고 야당과 진보정당까지 포괄하는 기초공동체 연합전선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앞으로 진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참여정부에서 총리를 지냈고, 장관을 지냈고, 청와대 수석을 지냈던 사람들부터 누구보다 먼저 민주주의의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 이해찬 전총리나 문재인 전 수석이 진심으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기초의원으로서 거기서부터 한국의 민주주의 근거지를 다시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2010 지방선거의 투표율을 높이면서 새로운 시민정치운동의 싹을 키우고 한국 사회를 전환시킬 수 있는 정치혁명의 시작일 수 있다.
기초공동체의 복원과 주민자치의 실현이야말로 노무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민주주의 투쟁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2008년 촛불을 계승하는 시민정치운동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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