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에 대한 핵의 장기적인 영향을 감안하면, 아직까지 동북 대지진의 피해와 그 범위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점은 이제 자연재해가 그 자체로서 위협이자, 그런 위협이 인간의 기술적 발전의 성과와 결합되어 '도호쿠'(東北)뿐만 아니라 일본, 나아가 전세계적으로 '메가(mega) 위험'을 양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진 전부터 상처입은 도호쿠
▲ 기름을 받으러 나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노인 ⓒ프레시안(최형락) |
지명으로서의 '도호쿠'는 혼슈(本州)의 북쪽 지방을 가리키는 명칭일 뿐이지만, 일본의 근대화와 사회·경제적 발전 과정에서 이 지역은 가장 소외된 지역 중의 하나이고, 이런 의미에서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 이전에 이미 '상처'를 받은 지역이었다.
이런 저발전은 이 지역 출신 젊은이들의 대도시 이주 증가와 농어촌 사회의 급격한 노령화, 부족한 의료 및 법률 서비스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최근에 이 지역에서 발전한 '원거리 진료' 시스템이나 변호사들의 자발적인 법률 서비스 제공은 역설적지만 이 지역의 저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저발전은 대지진 이후에 도호쿠 지역을 재건하는데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요인이 될 전망이다. <뉴욕타임스>가 20일 기사("Reeling From Crises, Japan Approaches Familiar Crossroads")에서 지적했듯 특히 젊은이들의 부재는 현재 일본의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및 쇠퇴하는 경제력과 더불어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 '도호쿠'를 재건하는데 중요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도호쿠' 지역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대지진과 쓰나미는 기존의 '상처'에 대한 커다란 '덧내기'로 이해할 수 있다.
외국인들은 어디로?
또 다른 단상 혹은 우려는 '도호쿠'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우려는 한국인들에게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1923년 관동 대지진 직후, 우물에 독을 탔다거나 일본 정부를 전복시키려한다는 등의 헛소문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된 자경단이 조선인 이주자 6000여명을 학살했던 사건은 이런 우려에 대한 극단적인 역사적 사례를 제공한다. 대지진이라는 상처는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지만, 그 상처 속에서 외국인들은 종종 '덧내기'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사실은 1995년 발생했던 한신 대지진의 경우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관동 대지진에서 학살된 조선인 이주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한신 대지진에서도 지진 이후에 외국인은 약탈자라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뉴욕타임스> 도쿄지국장이었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는 대지진의 핵심 피해 지역이었던 고베에서의 이런 '덧내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세 명의 젊은 남성들이 먹을 것을 들고 도망친 가게의 주인과 마주쳤다. 나는 그 가게 주인에게 동료 일본인들이 그처럼 비열한 짓을 한 것에 그가 놀라지는 않았는지 질문했다." 크리스토프는 그 세 명의 남성들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니오. 당신이 오해했습니다. 세 명의 약탈자들은 일본인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외국인들이었습니다."(3월 20일 기사 "The Japanese Could Teach Us a Thing or Two")
▲ 미야기현청 대피소 ⓒ프레시안(최형락) |
특히 원자력 발전소의 문제를 염두에 둔다면 사회적 서비스나 원조, 배상의 분배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덧내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1995년 고베보다 더 클 수 있을 것이다.
1995년 고베와 비교해 2011년 도호쿠가 좀 더 우려스러운 점은 지진 이후에 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조직과 NGO의 결성 및 활동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베의 경우 지진 발생 직후부터 '다문화 공생 센터'와 같은 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사회 조직들과 NGO들이 결성되었고, 외국인이 포함된 이런 조직과 NGO들은 외국인을 위한 핫라인을 개설하고 중앙 및 지방 정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외국인의 안전을 확인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아가 복구의 과정에서 외국인들 역시 일본인과 동일한 '주민'이라는 모토 하에 외국인에 대한 보상금 및 위로금 지급을 위해 투쟁했고, 독자적인 재정적 원조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모든 프로그램은 15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고베 학생 청소년 센터의 경우에는 대지진에 의해 피해를 본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 각 개인에게 3만 엔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런 활동을 통해 발전한 다문화 FM 라디오 방송국(10개 언어로 방송)과 그것을 중심으로 한 지역 공동체의 구성은 현대 일본의 '다문화 공생'의 대표적인 기원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시험대 오른 도호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호쿠는 여전히 복구의 과정에서 '상처에 덧내기'와 '다문화 공생'이 공존하는 시험대에 올라 있다. 한편으로 '상처에 덧내는' 담론들이 스멀스멀 나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고베 수준은 아닐지라도) 외국인들을 원조하기 위한 사회 조직들과 NGO들의 활동 역시 전개되어 왔다.
아마도 이런 시험대의 가장 큰 위협은 원자력 발전소의 위기와 핵 확산에 있을 것이다. 핵 위기의 심화와 확산은 (외국인을 포함한) 도호쿠 주민들의 삶의 터전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아갈 것이고, 따라서 시험대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은 여전히 교훈으로 남는다. 위기의 순간에 '상처에 덧내기'와는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공생'의 관점에서 협력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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