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레가 코프(Lega Coop)였다. 볼로냐 협동조합 탐방을 준비하면서 공부했던 자료들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곳이며, 또 최종 탐방 대상으로 선택된 조합의 대부분이 레가 코프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레가 코프(Lega Coop), 흔히 '코프'하면 하나의 단일 조합을 떠올리기 쉽지만 레가 코프는 간단히 말하자면 '협동조합들의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을 위해 존재하듯이 레가 코프 역시 소속된 협동조합의 대표 기구로서 그들을 대변하며, 그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찾은 레가 코프 볼로냐(Lega Coop Bologna)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협동조합 연합체 중 가장 규모가 크다.
▲ 레가 코프 볼로냐. ⓒ한살림 |
이 긴장은 오늘 우리와 인터뷰를 진행할 홍보담당자 마티아 미아니(Mattia Miani) 씨를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회의실로 안내되어 개인별로 준비된 물을 보는 순간 긴장은 다 풀려버렸다. '그래 공짜 물 없다는 외국이라지만 여기는 안 그래, 좋은 사람들이야!' 성격인지 업무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까지 조금은 긴장해 있는 것 같은 팀원들에게 통역을 통해 먼저 질문도 하고 편하게 대하는 미아니 씨를 보며 이제 다른 것들은 걱정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첫 촬영이다! 잘 찍자!', 뭐든지 다 이야기해줄 거라는 믿음이 자꾸 생긴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바로 시작이다. 어차피 서로 바쁜데 빨리 할 것 하고 가자는 생각보다는 그만큼 궁금한 것이 많기에 그렇다.
이탈리아 협동조합과 레가 코프의 역사 등에 대한 질문에 이은 "레가 코프에는 어떤 종류의 협동조합이 있는가?"하는 질문에 미아니 씨가 인터뷰어에게는 가장 기분 좋은 대답으로 말문을 연다.
"가장 흥미로운 질문인 것 같다."
이거 제대로 가고 있다는 기분에 신이 나기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이탈리아는 유일하게 모든 경제 부문에서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나라로 레가 코프에 소속된 협동조합 역시 그러하다고 한다. 분류를 하면 다음과 같다.
⑴ 소비자들에 의해 결성되어 소비자들에게 좋은 가격과 고품질로 물자를 공급하는 소비자 협동조합.
⑵ 상품 생산을 통해 조합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생산 협동조합.
⑶ 직접 경작에 종사하거나 구매·유통·물류 등 각종 농축산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농업 협동조합.
⑷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구입 또는 임대 목적의 주택을 제공하는 주택 건설 협동조합.
⑸ 여객 및 화물 운송과 관련된 사람들을 위한 운송 협동조합.
⑹ 자신이 선주이거나 협동조합 소유의 배를 이용하는 어업 종사자들의 수산업 협동조합.
⑺ 다양한 분야에서 같은 중요도를 가지고 사업을 추진하는 복합 협동조합으로 신용 분야가 해당되며, 보험·문화·여행·스포츠·여가 관리 등이 포함된다.
⑻ 1991년 11월 8일에 제정된 관련법 381호에 따라 공익기관으로 운영되는 사회적 협동조합. (A 타입의 경우 사회·보건·교육 서비스를 통해 시민들의 사회적 수준을 통합하고, 인권을 증진시키는 지역 공동체의 형성에 목적을 두고 있으며, B 타입은 장애인의 일자리 확보를 위해 농업이나 2차 산업 또는 서비스 분야에서 활동 영역을 구축)
레가 코프 볼로냐에만 300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가입되어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는 있었지만 실로 그 다양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이 건물의 규모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 시작한다. 과연 이 다양한 분야의 이해관계가 분명히 다른 협동조합들이 서로 조화롭게 한 연합체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한 조직 안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말이다. 마티아 미아니 씨는 비교적 쉽게 답변해 주었다.
"어떤 문제냐에 따라 다르지만 문제 해결은 대화를 통해 한다. (레가 코프의 역할이) 정치적으로 조정을 하는 것, 즉 조정을 통해서 각 분야에서 강점을 가진 코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문제에서 레가 코프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또 하나의 역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일자리'에 관한 생각이다. 마티아 미아니 씨는 확신에 찬 어조로 협동조합들의 문제 중 하나인 조합의 경영 위기 상황에서 배분과 나눔을 통해 무조건 일자리를 살려야 한다고 했다. 한 협동조합이 해산하는 상황에서 다른 협동조합이 일자리를 이어받게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 상황에 대한 질문과 맞물려 이탈리아 협동조합의 중요한 가치인 '사회적 책임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위기 상황에 준비된 특별한 비밀 병기는 없다. 하지만 이 순간에 특별히 나타나야하는 가치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가도록 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지 않고 정당하게 운영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사회적 책임이다. 이것이 협동조합의 원동력, 가슴이다."
참으로 쉽고 당연한 이야기인데 실로 대단한 이야기이다. 이걸 옮겨 쓰는 순간에도 가슴이 뛴다. 한편 이 말만으로도 대한민국 노동자 중 상당수는 아마 엄청난 상대적인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까. 한국 전쟁 이후 시작된 본격적인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저 반대의 상황이 더 많지 않았던가. 경영 실패와 부정부패의 책임을 과연 누가 지고 있는가. 가장 최근의 쌍용자동차 파업만 하더라도 결과는 어떠했는가. 한편으론 후련하면서도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 앞에선 답답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대안은 역시 협동조합에 있다!'하며 우리의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된 지금 이제 볼로냐 인근 유람이나 하다가 귀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질문은 이어진다. 실제로 의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협동조합이 일자리를 보존할 수 있는 배경엔 어떤 것이 있을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텐데 특히 수익을 내는 것이 전부가 아닌 협동조합에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마티아 미아니 씨는 또다시 쉽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코프 펀드가 진짜 도움이 된다. 법에 의해 (단위 협동조합) 수익의 3%가 전국적인 펀드로 자동으로 들어간다. 만약 협동조합이 망하거나 문들 닫아도 남은 돈은 코프 펀드로 간다. 이런 돈으로 다시 새로운 코프를 지원해 결성하거나 작은 코프의 성장을 돕는다.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한 도구다."
든든한 법 토대 위에서 그네들이 생각하는 가치를 그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개정 생협법이 통과된 우리 입장에서는 이 또한 무척이나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티아 미아니 씨에 의하면 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세제 혜택이 있다고 했다.
"이윤에 대한 세금을 감면받는다.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은 수익의 30%에서 27.5%를 납부하고 일반 기업은 수익의 100%에서 27.5%를 납부한다. (협동조합 수익의) 70%는 협동조합을 위해 쓰인다. (이런 혜택은) 헌법에서 보장이 되어있기 때문이고, (협동조합이)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협동조합이 생겨서 돈을 벌어 또 다시 새로운 협동조합에 재투자를 하면 다시 세금을 감면해 주는 법도 있다. 이 예는 더 장기적인 (협동조합의) 비전을 보여준다."
▲ 레가 코프 홍보 담당 마티아 미아니 씨. ⓒ한살림 |
현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집권한 이후 협동조합에 대한 세금이 조금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헌법에 보장된 기조가 협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뒷받침하는 부분은 참 부러운 부분이다. 아직 갈 길이 먼 한국의 생활협동조합 운동, 그 미래를 설계할 때 우리도 한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러한 대답들이 현실에서 통용되기엔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다. 일반 사기업과 다르기에 '사회적 책임'도 생각해야 하고, 또 법적인 장치들이 오히려 협동조합을 컨트롤하는 데 힘이 드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사기업보다 협동조합을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동조합을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주식회사 만드는 것이 더 쉽다. 행정 업무나 자기 자본과 조직을 컨트롤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쉬운 선택이 아니다. 자기 삶을 걸고 (진정한) 사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이 협동조합을 결성한다. 협동조합을 선택한 것은 경제적인 면을 본 것이 아니고, 개인이 생각했던 목표를 이루는 것과 함께 문화적·사회적·정치적인 면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을 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마티아 미아니 씨는 이렇게 말을 한다. 사업가 정신과 더불어 원하는 목표를 협동의 정신에 기반을 둔 열정으로 접근을 해야 한다는 말, 또 일반 기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협동조합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마티아 미아니 씨의 눈빛이 푸근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빛이 났다.
뭔지 모를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레가 코프 볼로냐 방문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첫 번째 인터뷰를 통해 이번 연수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아직 무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보다 더 대단한 이야기들을 실제 현장의 협동조합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아마 진짜 사람 냄새 나고 훨씬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지금부터 시작이리라!
레가 코프(Lega Coop)의 역사 레가 코프는 1886년에 설립되었으며, 1920~1940년대 파시즘 시절에 활동을 멈췄고, 1945년 8월28일 전쟁이 끝나자 재결성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협동조합 간부와 정치인 사이의 뇌물수수 문제가 불거지고 법적 소송이 일어나면서 이탈리아 협동조합이 혼란을 겪는다. 당시까지 레가 코프는 사회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연합체의 최고 임원을 정당에서 추천을 받아 결정하는 등 정당과 협동조합이 나뉠 수 없는 체제였다. 이는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1991년 사회적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지면서 협동조합의 상호부조 방식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고, 이 해 회장 선출이 정당추천이 아닌 산하 협동조합의 의지로 선출되어 정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1992년 협동조합법 개정으로 출자조합원제도(담보로서 이자를 목적으로 협동조합에 출자할 수 있는 제도)가 인정되었고, 협동조합 개발 기금(코프 펀드)이 창설되었다. 모든 협동조합은 그 잉여의 3%를 기금으로 내는 것을 의무로 하였다. 이 기금은 새로운 협동조합의 설립과 투자 조성 등 협동조합 발전에 사용되었다. 1994년에는 협동조합 개발 기금의 활동이 개시되어 242명의 고용이 실현되었고 1995년엔 사회적 협동조합에 대한 감세 조치가 실행되어 레가 코프 협동조합 개발 기금은 24개의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하고 1064명의 고용을 확보했다. 1995년에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 : 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31번째 총회에서 협동조합의 원칙을 정립한 것과 발맞추어 레가 코프 역시 협동조합 회원이 그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가치 헌장을 내놓았다. 협동조합의 사회적 가치는 ICA와 공동으로 UN에서도 결의되어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 1996년 레가 코프는 창립 110주년을 맞아 레가 코프를 정식 명칭으로 정했다. 레가 코프 가치 헌장(1995년) △ 조합원은 모든 종류의 상호 부조에서 근본적인 핵심 축이며, 협동조합 활동의 가장 우선적인 대표성을 지닌다. △ 협동조합은 조합원, 사회적 공동체, 미래 세대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 협동조합은 개별 조합원의 참여 과정에서 안전성과 편리를 제공하고 그 공로를 인정한다. △ 개별 조합원의 실질적 참여가 협동조합이 가진 가장 주요한 자원이다. △ 모든 협동조합은 전문성을 가지고 조합의 활동 가치를 강화·육성하고 창의적으로 발굴해야 하며,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동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 협동조합 내 핵심 인재들은 모든 구성원들에 대해 존경의 자세로 임한다. △ 개별 업무와 위치에서 모든 협동조합 일꾼들에게 정직·정의·책임감이 요구된다. △ 협동조합은 투명성, 정직성, 정당성을 스스로 개발해내어 그 가치의 수준에 따라 근본적 진가를 드러낸다. △ 협동조합은 다원적 공존을 자산으로서 인식한다. △ 협동조합은 다른 경제적 사회적 주체와 그들의 의견과 문화를 인정하면서, 고유의 독창성과 자립성을 가지고 효과적인 제안 활동을 추진한다. △ 협동조합의 존재와 차별적인 형태, 이것들을 규정하는 법률은 반드시 협동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 개별적 관계는 반드시 다른 관계에 기초를 두거나 경제적 주체 사이에 벌어지는 업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 협동 활동은 시장이라는 곳이 부의 생산, 건강과 환경에 대한 존경을 위한 곳이자 사회적 경제 발전을 수행한다는 관점을 지닌다. △ 시장에서 협동의 기능은 법률에 따를 뿐 아니라 조합원과 지역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 정당성의 원칙도 부합한다. △ 협동 활동은 협동조합의 육성을 목표로 하면서 사업체들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기존 사업체의 가치를 높이고 새로운 사업체의 개발을 위한 시장의 발전을 위해 역할 한다. △ 협동 활동은 민주적 원칙에 기반을 두고 내부 관계를 감시한다. △ 협동조합은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고유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러한 원칙은 경제적 성장과 적합한 운영 방침에 도움을 주는 협동조합 간의 관계를 촉진시킨다. △ ICA에 의해 규정된 협동조합의 상호 부조는 관계자들 사이에서 단순히 부의 생산과 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의 개념을 담고 있다. △ 협동 활동은 그것이 속해 있는 경제 체계의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스스로 시장에서 성장 방안을 모색하고,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물질적·도덕적·공익적 상태를 증진시키는 목적에 부합한다. 이탈리아의 협동조합 전국 조직 이탈리아에는 약 7만7000개의 협동조합이 있다(2003년). 약 70만 명의 직원이 활동하고, 이탈리아의 전 노동력의 약 2%, 민간 고용 노동의 약 4%를 차지한다. 이탈리아에는 협동조합 중앙회 조직이 존재하는데. 이탈리아 협동조합연맹인 레가 코프(Lega Coop), 협동조합연합(CCI, Confcooperative), 협동조합총연합(AGCI), 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UNCI)이 있다. 이탈리아 전체 협동조합의 약 50%가 이들에 소속되어 있다. 과거에는 각각 중앙회의 중심축으로서 정당이 존재하고, 그 정치적 경향도 두드러졌지만 현재는 거의 불식되어, 레가 코프와 CCI는 대정부 교섭 등 공동 보조를 강화하고 있다. △ 레가 코프(Lega Coop) : 1886년에 설립, 좌익계의 협동조합. △ 협동조합연합(CCI, Confcooperative) : 1919년 설립, 가톨릭계 정당의 지지를 받아 발전. 현재도 가톨릭교회와 관계가 강하다. △ 협동조합총연합(AGCI) : 1952년 레가 코프에서 독립. 사회민주당과 협화당, 자유당계의 연합회. 이상 3조직은 ICA가맹. △ 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UNCI) : 1975년에 인가된 가장 새로운 연합회로, 가톨릭 노동자 조직을 배경으로 조직되어, 남부·시칠리아·북동부를 기반으로 생산·농업·건축 등의 분야가 주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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