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다. 시청과 마조레 광장이 위치한 도심에서 반경 5km 정도에 웬만한 시설들이 모두 모여 있다. 웬만한 곳은 다 걸어 다녀도 큰 무리가 없다. 단, 날이 덥거나 몸이 피곤하지 않다면.
어린이 연극 협동조합 바라카를 만나러 가는 길. 한 낮의 뜨거운 햇살은 한 풀 꺾였다지만 덥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나가는 배경들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멋진 그림들이 나올 때마다 호기심과 이방인으로 느끼는 특유의 설렘들이 흥분되게 한다.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냄새가 나는 건물들과 공원, 학교, 골목들을 때론 통과하고 때론 지나치며 우리는 걷고 또 걷는다.
제법 현대적인 고층 건물들 틈에서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보았을 법한 낮은 키의 오래된 적색 건물이 우리를 맞는다. 바로 이곳이 우리가 만날 바라카가 둥지를 틀고 있는 극장 '테스토니 라가치'. 조금 일찍 도착한 덕에 외경을 촬영하며 조금 시간을 보낸다.
▲ 바라카가 공연을 하는 극장 '테스토니 라가치'. ⓒ한살림 |
어느새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극장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공연이 없는 날이라 극장 문도 닫혀 있는데다가 로비에 인기척도 없다. 잠시 후 정말 외국 영화에서 막 걸어 나왔을 법한 외모의 남자가 우리를 맞이한다. 역시 명품의 나라답게 패션도 감각이 남다르다.
바라카의 대표인 루치오 다멜리오 씨. 정말 요즘 표현으로 꽃 중년이다. 무리에서 만났던 또 한 분의 꽃 중년이 깔끔하고 세련된 매력남이었다면 이 사람은 조금 투박한 듯하지만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진다. 역시 배우 출신이라서 그런가?
▲ 바라카의 대표인 루치오 다멜리오 씨. ⓒ한살림 |
어린이 전용 화장실. 대변기와 소변기, 세면대와 삼면을 둘러싸고 걸려있는 옷걸이가 모두 어린이들에 맞춰 작게 제작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어린이 전용 극장이기에 당연한 것인데도 참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소극장으로 들어서니 예술감독 발레리아 프라베티 씨와 극단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외양부터 예술가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동남아나 인도 어딘가에서 구했을 법한 편한 바지에 티셔츠, 뭔가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편안하게 멋스럽다. 인사를 간단하게 나누고 약간의 담소를 진행할 무렵 난 카메라를 세팅하기 시작한다.
무대가 있다 보니 조명도 괜찮고, 지금까지 인터뷰 중에서 가장 멋지게 화면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내 안의 예술적인 감각도 드디어 깨어나는 것인가? 제발 그런 게 내 안에 있다면 좀 그래주길…….
이곳 바라카는 연수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가장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예술과 문화적인 일들도 협동조합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환경이 뒷받침 되지 못해 지치고 힘들어하는 예들을 많이 접했기에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무언가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예술적인 기운이 넘치는 사람들이 만드는 협동조합은 어떤 곳인지 호기심도 무척 컸다.
사실 바라카는 처음부터 협동조합은 아니었다. 1976년에 기업으로 출발했다가 1979년에 협동조합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럼 왜 바라카는 연극을 협동조합의 틀 안에서 하게 된 것일까?
"연극을 공연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 것인데, 협동조합은 여러 사람이 협동을 하는 것이므로 운영 방식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중요한 것은 협동조합은 이익이 이 안에 남아 있어야 하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또 협동조합은 외부인이 조합을 살 수 없다. 어떻게든 이게 남는 것이다. 굶지는 않지만 힘든 직업임엔 한국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합이 된 것이다."
역시 꿈과 열정으로 사는 예술가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 것은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또 이들이 굳이 어린이 연극만을 전문적으로 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내가 태어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극단들에서) 다른 공연은 잘 만들지만 아이들을 위한 것은 없다.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공연을 하면 돈도 많이 벌고 얼굴도 알릴 수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공연을 하고 싶다."
다멜리오 대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또 다시 가슴이 뛴다.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받은 적이 언제였던가? 이러한 사람이 하는 일에 강한 책임감과 열정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리라. 하지만 대표는 대표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에 또 그럴 수 있는 법! 이번엔 대표가 앉아있던 의자도 치우고 무대 바닥에 같이 앉아 카메라를 펼치고 눈높이에서 협동조합이라 좋은 점을 다시 한 번 예술감독 프라베티 씨에게 물었다.
"보통 극단이라는 것은 배우는 연기만, 감독은 감독만 하는데, 협동조합에서는 모든 것을 같이할 수 있다. 물론 역할이 정해져 있지만, 같이 해야만 한다. 극본이 나오면, 감독이 역할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같이 작업을 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역할이 자주 섞인다. 내가 물론 감독이지만, 혼자서 결정하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협동 작업이 우리 스토리의 일부이다."
멋지다. 흔히 공동 작업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감독은 내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자기의 위치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그걸 넘어 서 버린 것이다. 협동조합을 통해 '공동 작업', 즉 '협동 작업'의 진정한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말 이들의 작업을 구경해 보고픈 호기심이 솟구쳐 오른다.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고집을 강하게 부리는 예가 많다. 자신의 고뇌의 산물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함께한다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있지 않을까? 이 우문에 다멜리오 대표는 이렇게 대답한다.
"여러 가지 단계가 있는데, 마지막 경우에는 젊은 사람들을 위해 비켜줄 생각도 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또 목표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는데 무슨 시시한 질문이냐는 식의 일갈이다. 그래 부족하고 모자란 소인배들이나 그런 것에 목을 매는 것이었다.
바라카가 둥지를 틀고 있는 라가치 극장은 볼로냐 시의 소유다. 3년씩 프로젝트를 공모해서 허가가 되면 공간을 허락해주고 지원도 해준다. 여기서 우린 또 하나의 우문을 던지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시나 정부의 지원이 있으면 내용에 간섭이 있지 않겠냐는 지극히 우리 식의 질문을 하고 만 것이다.
"없다. 그렇게 되면 퀄리티가 안 나오기 때문에 없다. 자유롭다. 신용의 관계이다."
단호하다. 바라카에 위험한 질문이라서 반어법을 쓴 것은 아닐 것이리라.
이탈리아에서 어린이를 위한 연극의 선구자답게 바라카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공모하는 '스몰 사이즈(Small Size)'라는 프로젝트에도 세 번이나 선정되어 아주 어린 아이들을 위한 공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아이들의 감성을 느끼기 위해 연구소를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연구하고 있기도 하다.
2010년에는 0~3세를 위한 공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그에 맞는 나이의 자녀가 있는 나로서도 무척이나 기대되는 공연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준 것일까? 공연 연습 장면을 좀 촬영해도 되겠냐는 말에 흔쾌히 일어선다. 예술감독 프라베티 씨는 공연에서 배우의 역할도 함께 맡고 있었다. 역시, 그냥 '감독님'의 기운이 아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답게 잠깐 볼 수 있었던 공연은 소리와 몸짓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약간은 몽환적인 음악에 부드럽지만 힘이 실린 프라베티 씨와 단원들의 공연에 우리는 브라보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연출된 상황임에도 땀을 흘려가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 공연의 한 부분을 재연해 주는 바라카 단원들. ⓒ한살림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