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요 신문에는 부동산 관련 기사가 빠질 날이 없다. 심지어 지하철역에서 나눠주는 무가지에도 아파트 시세표가 나온다. 온 국민이 부동산을 '재테크'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마디로 부동산 광풍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침체기를 맞으며 한국 부동산 시장도 영향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집값이 내려갈까 걱정이다.
돈이 많아서 자산 증식 수단으로 집을 사둔 사람이야 돈을 잃는데 그치겠지만, 정확한 의도를 알기 어려운 정부의 주택 공급 정책에 장단을 맞춰서 은행 대출을 잔뜩 끼고 무리해서 아파트를 장만한 중산층 이하 서민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다. 만약 부동산 버블이 꺼져서 이 계층이 은행 대출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정확히 재현되는 것이다. 국가적인 재앙이다.
건설사들은 이미 공급 과잉 상태가 됐음에도 계속해서 아파트를 만들어낸다. 필요 이상의 고급 마감재를 사용하고 막대한 광고 비용을 들여서 소비자들을 현혹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모두 아파트 가격에 붙여서 고스란히 주택 수요자들에게 부담을 지운다. 부동산 시장은 냉각의 조짐을 보이는데 건설사는 자기 주머니 채우기에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수요자를 위한 거품을 뺀 주택 공급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볼로냐는 주택 공급도 수요자들이 직접 협동조합을 조직해 실제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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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약 통장 대신에 50유로?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되는 주택·건설·시행 협동조합 무리(Murri). 1963년에 세워져 조합원으로 가입한 주택 수요자에게 주택을 제공한다.
망치, 삽, 곡괭이 등 각종 공구들을 이용해 만든 조형물이 입구에서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2층 건물은 크지 않지만 무척 단정한 느낌을 준다. 무리에는 27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무리는 주택을 지을 땅을 구입하고 설계를 하며, 건축 자재나 인테리어를 결정한다.
이탈리아의 도기나 타일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급 자재인 만큼 건축 자재는 이탈리아산을 우선으로 사용한다. 시공은 하청을 통해 이루어진다. 시공사 선정 기준은 시공 능력인데, 이 역시 협동조합인 경우가 많다.
집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50유로(약 7만 원)를 출자금으로 내면 누구나 조합원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현재 약 2만3000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다. 조합원은 주로 개인이며, 신혼부부들의 수요가 많다.
무리의 조합원이 되면 무리에서 제공하는 주택을 골라 예약할 수 있고 조합원의 자격이 계속 유지되는 한 또 다른 주택을 구입하거나 사후 관리를 받을 수 있다. 만일, 한 집을 여러 조합원이 동시에 신청하면, 조합에 가입한 지 오래된 조합원에게 우선권을 준다.
주택을 공급받은 조합원에게는 일종의 주택 매뉴얼이 제공된다. 말 그대로 집에 대한 설명서인데, 집안 구석구석에 사용된 자재, 설비 기기들의 사용법 등에 대해서 꽤 자세히 나와 있는 제법 두툼한 책자다. 스스로 만든 집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 조합원은 3개월에 한 번 발간되는 잡지를 통해 어떤 집이 있는지, 조합원을 대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지, 조합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무리의 조합원들은 무리를 통해서 주택 구입 외에도 은행처럼 돈을 맡길 수도 있다. 적립한 돈에 대해 은행보다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주택 구입 시 자금이 부족하면 10년간 임대한 후에 매매가 가능하다. 재미있는 점은 10년간의 임대료를 집값에 포함시켜준다는 것이다.
▲ 무리는 전 세계에서 최고급으로 인정을 받는 건축 자재를 사용한다. 건물 한쪽에 마련된 건축 자재 전시장. ⓒ한살림 |
제대로 짓고 공정한 가격을 받는다
경제적 약자를 위한 임대주택 건설을 생각했다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무리가 짓는 집은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무리가 공급하는 주택은 일반 주택 시세에 비해 5~10% 정도 더 비싸다. 제대로 된 자재로 제대로 짓는다. 하지만 건축에 사용한 자재를 비교해보면 15~20% 저렴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점이 협동조합 운영의 묘미다.
협동조합으로서 무리는 1년에 1회 총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재정·계획 등에 관해 결정한다. 총회에 참여하는 조합원은 전체 약 2만3000명 중 3~400명 정도다. 보통 때는 소수 그룹의 대의원회의가 운영되는데 조합원의 의사를 조합의 운영에 반영하는 중요한 기구다. 주로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활동비를 지급하기도 한다.
무리는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이익금은 모아 두었다가 다음 세대 조합원의 자본금으로 사용되어 재정 면에서 안정적이다. 일반 사기업과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무리가 값싼 땅을 구입해 설계와 인테리어, 건축 자재 선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컨설팅을 직접 하기 때문에 조합원에게 15~20% 싼 가격의 주택을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리가 주택 가격에 붙이는 마진율은 5~10% 정도라고 당당히 공개하고 있다.
무리의 연간 주택 공급 액수는 약 300만 유로에 달한다. 경제 불황으로 최근에 조금 줄긴 했지만 큰 타격은 없다. 기본 자본금이 약 200만 유로가 적립되어 있다. 이 적립금은 세대로 이어져 협동조합 기금으로 계속 적립되므로 재정 면에서 안정적이다.
무리는 3~4층 규모의 다세대 주택을 주로 짓는다. 한국의 수도권과 마찬가지로 볼로냐 지역도 집값이 비싸다. 모아둔 돈이 적은 젊은 층은 작은 집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 무리는 신혼부부의 작은 아파트부터 옥상 테라스를 갖춘 복층 아파트까지 다양한 주택을 공급하여 다양한 층의 조합원들의 요구를 맞추어 나가고 있다.
친환경 주택은 무리의 화두
무리에서 짓는 주택의 특징은 환경과 건강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선 친환경 페인트 같은 독성이 적은 재료를 사용한다. 인체에 해로운 석면, 폴리에스테르, 전자파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또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고 창문이 태양을 바라보게 설계를 한다.
단열성 높은 창호를 사용하며, 내부 환기 시스템을 설치하여 내부 에너지를 뺏기지 않으면서 통풍을 가능하게 한다. 옥상에는 식물을 심어 여름에 태양의 열기를 식힌다. 무리는 친환경 주택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연구를 위해 볼로냐 대학과도 연계하여, 연구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최근에 무리가 볼로냐 외곽에 건설한 복층형 아파트. 신혼부부가 찾는 작은 면적부터 복층형의 넓은 면적까지 여러 가지 형태가 한 단지 안에 포함돼 있다. ⓒ한살림 |
▲ 무리가 볼로냐 외곽에 건설한 복층형 아파트의 내부. ⓒ한살림 |
조합원들의 만족, 무리의 기쁨
무리 관계자들을 따라서 볼로냐 교외에 있는 최근 준공한 아파트에 갔다. 아직 입주가 완료되지 않아 인적이 드물었다. 한 뭉치의 열쇠 꾸러미를 들고 아파트를 안내하는 관리인은 꼼꼼해보였다. 아파트는 불과 2, 3개 동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다. 아파트라고 해봐야 4, 5층이 고작이다. 하지만 실용적인 작은 형태부터 복층 구조의 대형 아파트까지 여러 가지 형태가 들어가 있었다.
집안 옷차림이어서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싫다는 입주민 한 명에게 끈질기게 말을 붙이자, 무리에 대해서 말해준다.
"좋은 집을 짓는다는 걸 알고 무리에 가입했다. 그 동안 계속 살펴보다가 이번에 이 집을 선택했는데, 집도 마음에 들고 주위에 코프(협동조합 슈퍼마켓)도 가깝고 시내가 멀지 않아 좋다. 가장 좋은 건, 집에 문제가 생기면 항상 무리에서 관리를 해주니까 안심이 된다."
협동조합이라고 해서 수요자들의 요구에 적당히 대응하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제대로 된 집을 원하는 조합원들의 만족이 바로 무리의 존재 이유다. 제대로 된 주택과 제대로 된 서비스로 무리는 조합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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