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가장 직접적이고 진실하고 또 가장 겸손한 어떤 것을" 담아내는 데 르포 글쓰기가 매우 적합한 장르라는 생각을 비치고 있다. 저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번 책 역시 전작의 르포·산문집과 마찬가지로, '근대문학(소설)의 종언'이 운위되는 이 시대에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텍스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죄업으로 대신 죽는, 성자들의 가없는 대속(代贖)의 행렬을 지금 한국의 새만금 갯벌이 잇고 있는 것이다. (…) '사람 예수', 즉 '신의 인격화'라는 고루한 관념을 떨쳐내고 새만금 갯벌을 다시 보면, '새만금 갯벌에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없는 '새만금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나던 것이다. 새만금 갯벌이 인자한 표정을 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새만금 방조제의 완공으로 해수 유통이 완전히 차단된 지금 꺼내 읽어도 그때의 전율이 또다시 일어나는 탁월한 르포 '새만금 예수님을 죽이지 마라'(<발바닥, 내 발바닥>)의 한 대목이다. 그때의 강한 인상과 감동 때문일까. 나는 이번에 나온 <지하철을 탄 개미>에 실린 르포와 산문들을 '죄업'과 '대속', '수난'과 '부활'의 알레고리로 읽었다.
| ▲ <지하철을 탄 개미>(김곰치 지음, 산지니 펴냄). ⓒ산지니 |
2005년 5월 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마지막 생애 3년을 김형율 씨는 '원폭 피해자 2세'들의 참담한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바쳤다. 원자폭탄 피폭 1세대 중에도 질병이 발현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만 아니라, 2세들 역시 겉으로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이겠지만, 일본과 한국의 정부들은 원폭 피해의 '대물림 현상'을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세 환우들에 대한 보상과 지원조차 형편없는 상황이다 보니, 김형율 씨처럼 유전적인 질병을 안고 태어나 평생을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2세들에 대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신체적 고통에 덧붙여진 사회적 '불인정'의 어둠 속에서 한 왜소하고 힘없는 청년이 세상을 향해 "나는 아프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작고 마른 몸뚱이를 촛불 삼아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아프다!"라고 외치며 죽어간 김형율 씨의 절규에 귀 기울였던 저자의 귀는, 보도블록과 콘크리트에 덮여 숨 막히고 죽어가는 흙이 "나는 숨 쉬고 싶다!"('숨 쉬고 싶다')고 외치는 소리에조차 민감하게 반응한다.)
저자는 김형율 씨의 마지막 불꽃같았던 삶과 "비극적이고 또 의미심장했던" 죽음에 대한 '진상 보고서'이자 '추모의 글'로서 르포를 쓴다. 김형율 씨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을, 발품을 팔아 끈질기게 취재하면서 저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게 된다. 숨 가쁘고 격렬하게 몰아치는 의문의 연쇄(특히 81~82쪽) 끝에서 그는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않은 채 이렇게 적고 있다.
"그것이 서글픈 구걸이라고 한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한국 정부가 그들이 그렇게 구걸할 수밖에 없도록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이 글쓰기가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비판은 나 자신에게 먼저 향해야 한다. 나는 김형율의 존재를 최근까지 알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참회하기도 한다.
이 두 편의 르포뿐 아니라, 책에 실린 대부분의 르포와 산문들은 이처럼 우리의 무심과 무지, 방치와 망각이라는 '죄업'으로 인해 고통받고, 묻히고, 죽어가는 수많은 존재들(사람과 자연과 사물들)에 대한 연민과 참회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존재들이 단지 약자의 얼굴로 '대상화'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김곰치 르포의 탁월함이다. 그의 눈에 그런 고통받고, 묻히고, 죽어가는 수많은 존재들은 오히려 그들의 수난(受難)을 통해 우리의 죄업을 대속함으로써, 우리를 참회와 회심(回心)으로 이끄는 생명과 구원의 '빛'이기도 하다. 마치 죽어가는 새만금 갯벌이 '새만금 예수님'의 얼굴로 저자의 눈앞에 나타났듯이.
을숙도대교의 건설로 고요와 평화, 생존의 터전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새들의 슬프고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구라는 구슬을 소행성이라는 구슬로 맞혀 버리려다가 변함없이 날고 있는 죄 없는 새들이 눈에 밟혀 재앙의 하느님이 손가락을 몇 번이나 거두었다고 생각하기도"('을숙도에서') 하는 저자는, 그 새들처럼 힘없고 고통받는 존재들이 "평화롭게 깃을 칠 때, 을숙도에 와서 인간이 고요를 배울 때, 신은 인간을 언제나 용서한다"는 믿음을 고백한다. 새만금 갯벌에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단행된 2006년 4월 21일 발표한 에세이('새만금 갯벌은 죽지 않는다, 다시 산다')에서도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부 간척 사업의 진척보다 이 나라 국민의 환경 의식의 성숙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나는 낙관하고 싶다. 남은 일은 새만금 갯벌 생태계 복원 공사. 그때 토목공학자 집단 일부에서나마 회심이 일어나겠지. 청계천 복원은 서울 사람들만의 축제였지만, 새만금 갯벌 복원 사업은 온 국민의 축제가 될 것이다. (…) 새만금 갯벌은 죽지 않는다. 다시 산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복음(福音) 기록자들의 '현장으로 달려감'과 목격, 그리고 기억과 기록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현장에의 참여와 목격, 믿음과 증언이야말로 부활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한 '기억을 향한 투쟁'(<발바닥, 내 발바닥>)의 완성이었을 것이다.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라면, 하다못해 그리스도의 상처에 손가락이라도 넣어 보아야 했다!) 소설가 김곰치의 끈기 있는 르포 작업은 바로 이러한 수난과 부활의 역사라는, 오늘도 우리 눈앞에서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는 역사적·사회적 현실에 관계하고 참여하려는 문학적 노력으로 기억할 만하다.
부산의료원 병상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환자들과 그들의 영혼을 돕고 있는 호스피스들을 취재한 르포 '아름다운 이별 도우미, 호스피스'에서 그가 말한 대로 "누군가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더없이 큰 "위로의 힘"이 되기도 하고, 희망의 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달력으로 다음 주인 3월 9일은 '재의 수요일'이고,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四旬) 시기가 시작된다. 4대강 물줄기와 300만 마리가 넘는 동물들의 생명을 틀어막고 땅 속에 생매장시키고 있는 이 고통과 죽음의 땅 위에 사는 우리 모두의 죄업을 참회하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 죄 없이 죽어가며 "나는 아프다", "나는 숨 쉬고 싶다"고 외치는 모든 힘없는 존재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면서, 종교와 신념의 차이를 넘어 평화와 구원을 간구하는 모든 양심적인 독자들의 책상 위에, 작은 촛불과 함께, 이제 작가 김곰치의 두 번째 르포·산문집이 놓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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