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김이설의 <환영>(자음과모음 펴냄)은 이 두 단어를 묘하게 겹치면서 결국에는 이 둘 모두를 뒤집는다. 그것이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는 현실을 드러내는 이 작가의 방식이며, 이 현실을 구성하는 우리에게 그가 질문을 던지는 형식이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그의 서사가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과는 달리 매우 윤리적이다. 말하자면 이런 질문. 환영(幻影)을 어떻게 환영(歡迎)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다시, 저 온갖 환영(歡迎)이야말로 환영(幻影)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이어진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누구에게나 공평한 저 환영과 환송은, 도시의 경계를 알리는 관용어일 뿐이지 않은가. 눈앞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든다는 점에서 도시와 도시의 경계도 인간이 만든 일종의 환영(幻影)이다("안녕히 가십시오. 시와 도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선을 아침저녁으로 넘나들었다.").
<환영>의 주인공 윤영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의 경계를 매일같이 넘나들며, '경계 위에서의 삶(survie)'(데리다)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가혹한 현실이 차라리 환영이길 바란다.
"아침마다 안녕히 잘 가시라는 말 때문에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 같았다. 그런데 밤이 되어 되돌아오는 여기도 다른 세계 같았다. 왕백숙집이나 옥탑방이 나의 세계라고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 ▲ <환영>(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그러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되는'("내내 용선을 응시한 태민은 돈을 받아들자마자 쌩, 앞서 사라졌다. 이제 나는 없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이 환영-되기는 비단 윤영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인물들 전반에서 다 일어나는 현상이다. 누구도 존재 그 자체로 서로에게 환영받지 못하며, 가족이야말로 없어지면 딱 좋을 존재들로 취급당한다. 물론 <환영>은 깨어나면 사라지는 가상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이 곧 환영이라는 전언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이설의 소설에서 현실은 생생한 공포다. 그러나 이 생생한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환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폭력의 오래된 발원지이기도 하며, 문명의 이면이자 문명 그 자체이며, 공포이자 환멸이고 끝내 살아내야 하는 생의 맨얼굴이다.
이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환영>의 색채는 전작 <나쁜 피>(2009년)나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2010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독하다는 말이다. 여전히, 아니 더욱. 현실에 대해 조금이라도 환상을 품어볼 만하건만 그 일말의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고 인물들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이 작가의 근성에는 정말이지 집요한 데가 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30대 초반의 여성 화자 윤영, 그에게는 젖도 떼지 않은 백일 난 딸이 있지만 그는 고시 중독에 빠진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 산후 조리도 못한 채 물가 식당의 종업원으로 나간다. 가난한 아버지는 암에 걸려 박대만 받다가 사망했고, 촉망 받던 여동생은 사업을 한답시고 집안을 풍비박산 낸 뒤에도 끊임없이 윤영에게 돈을 요구하다가 스스로도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 결국 죽임을 당한다.
게임 중독에 빠진 남동생 역시 주위 사람에게 사기를 치거나 윤영의 전세 계약서를 빼내 돈을 대출해간다. 병든 남편에게 발길질을 하던 엄마는 자식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도 그 길을 바로잡아주기는커녕 방관하거나 부추기며 끝까지 윤영의 삶을 옭죄고, 아들을 고시 중독자로 만든 시어머니는 아들이 무능력하거나 말거나 아들 둔 위세를 톡톡히 부린다.
이혼 위기에 몰리자 남편은 드디어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하지만 출근 3일 만에 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고, 딸은 두 돌이 되도록 걷지 못해 치료에 오랜 시간과 엄청난 액수의 돈이 들어갈 판이다. 가족. 윤영에게 그것은 육친의 정을 느끼게 하는 친밀하고 편안한 공동체가 아니라 "참을 만큼 참고도 더 참아야 하는" 부조리한 짐들이다.
남은 반찬만 갖다 버릴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식구도 갖다 버렸으면 싶었다. 앓아누웠던 아버지가 죽기까지 그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걸핏하면 용돈 좀 보내달라는 준영이나 빚 독촉 전화를 대신 받게 하는 민영도 마찬가지였다. 밥만 축내면서 밤이면 취하다시피 잠든 마누라 배 위에 올라타 남자 행세하려는 남편도 꼴 보기 싫었다. 가족이어서 더 그랬다. (48쪽)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며 우리는 쉽게 현대 산업 사회의 인간 소외를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윤영의 이런 적나라한 목소리 앞에서 그런 빤한 비판은 도리어 탁상물림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 인간 소외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관계가 가족인 것은 가족의 타락 때문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우리의 환상 때문이다. 근대 소설의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는 낭만적 사랑이었지만, 사랑이 아니라 경제력이 가족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버린 현실은 소설에서도 이제 익숙한 풍경이다.
윤영은 "남편이 허드렛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드는 사람이어서" 그와 살림을 차리지만, 그가 고시 중독생일 뿐 고시에 붙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자 남편을 점점 난폭하게 대한다. 거기에는 젖이 새어나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매춘까지 해야만 했던 어미의 원초적인 분노가 서려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윤영이 매춘에 내몰린 것은 단지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식당 종업원의 월급도 "분명히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이 공부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생활은 가능하지만 꿈을 이루기는 힘들었다. 배는 부르지만 희망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래하지 않을 미래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윤영의 이러한 꿈은, 이미 민영의 파국을 통해 그 불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한 것이다. 총명했던 민영의 타락과 가난한 고시 중독자의 연기(延期)될 뿐인 현재는, 더 이상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는 현실과 여전히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힌 개인들 간의 슬픈 간극을 드러낸다. 이제 우리는 꿈도 꿀 수 없는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렇게 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제는 가난한 주제에 꿈까지 꿨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벌었을지언정 실제로는 벌이가 가장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대표 선수에게 자신의 꿈을 위탁하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집을 팔고 어렵사리 장만한 가게까지 날리면서 민영에게 온가족이 투자한 것이나, 아이를 시골로 내려 보내고 몸까지 팔아가면서 남편의 고시 공부를 뒷바라지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이 남루한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과도한 기대, 혹은 환영. 의존, 혹은 공모. 우리 사회의 무책임한 희망 고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결국 윤영 역시 꿈이라는 이름으로 이들 모두와 결탁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탁의 결과는 과도한 노동, 질병, 죽음, 파산, 신용 불량, 한탕주의, 사기, 도박, 매춘, 고시 중독, 권위주의 그리고 결국에는 가족의 붕괴이다.
그러므로 민영과 남편에 대한 윤영의 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는, 어쩌면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향한 것, 자신을 매춘으로 내몬 현실에 자기 스스로가 공모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다. 왕사장의 아내가 복수라는 이름으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학과 자학은 같은 얼굴의 다른 이름이다. 가족은 그렇게 서로에게 치명적 상처를 낸다.
그렇다고 가족 바깥에서 윤리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주부였던 윤영이 물가 식당의 매춘-종업원이 된 것은 가난하고 무능력하고 몰염치한 가족들뿐만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부인까지도 매춘으로 내모는 왕사장, 불법 매춘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새로 오는 여자 종업원들을 때마다 '상납'받는 경찰, 번듯하게 배우고 입성 좋게 살면서 매춘을 일삼는 교육자들과 예비 교육자 그리고 그들에게 그 어떤 윤리도 교육받지 못한 있는 집 자식들의 이해와 요구가 공모한 결과다.
국가는 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만 삼고 있을 뿐, 이러한 불법 매춘이 자행되는 현실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육아와 교육, 주거와 양육, 취업과 노동, 각종 질환과 상해 치료……. 이 모든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긴 국가야말로 주부 매춘을 낳은 주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국가에는 국민만 있을 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까지 돈을 벌려고? 결혼도 안 했으니, 남편도 없고, 애도 없을 거 아냐. 부모나 형제자매가 속 썩여?"
"사람 대접 받고 싶습니다."
"그럼 많이 벌어야겠다."
"네."
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 매춘을 하겠다는 용선의 아이러니한 대답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치는 윤영의 저 한 마디. "그럼 많이 벌어야겠다." 그 어떤 보충 설명도, 설득도, 반론도 없이. 슬픔도, 한탄도, 다른 삶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그 어떤 기대도 없이 무심하게 전개되는 이 짧은 대화를 읽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그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이미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다 싶던 윤영은 더욱 극한으로 내몰려 결국 다시 왕백숙집의 매춘-종업원으로 돌아온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한 시도가 모두 좌절되고,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 결론. 견딤만이, 누구보다 끈질긴 견딤만이 유일한 삶의 형식이라는 듯한 이 결론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환영으로 들끓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고발인 것일까, 아니면 현실의 강고함보다 더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긍정인 것일까.
몸은 물과 같아 고이면 흐르고 마르면 채워져, 없앤 아이의 흔적은 사라지고 윤영의 몸은 또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으로 회생된다. 윤영은 이런 몸의 본능, 새끼를 향한 본능이 끔찍하다고 말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지우고 후련해했던 그도 자신에게 웃어주는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덥혀지는 걸 느낀다. 돈을 들고 튄 준영, 관절염을 앓는 엄마, 다리에 철심을 박아 넣은 남편 그리고 걷지 못하는 아이. 그러나 그녀가 다시 왕백숙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 때문이다.
"걱정 마. 엄마가 평생 몸을 팔아서라도 네 다리 고쳐줄게."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결국 자식들을 다 망쳐놓은 두 명의 어머니에게 온갖 비난을 퍼붓던 윤영이, 자신은 자식을 위해 몸이라도 팔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이율배반적인 모성으로의 회귀는 국가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일까, 또 다른 순응의 형식일까.
애초에 국가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을 이 '환영'과도 같은 '경계 위에서의 삶'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인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은, '어서 오세요'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들이 드러내는 우리 삶의 맨 얼굴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환대의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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